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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먹고 놀아도 되나? (마 9: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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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불편한 일들이 생깁니다. 가장 큰 불편한 일은 주일 예배 시간입니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예배드리기 위해서 쉬는 것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주말에 놀러가는 일도 포기해야 합니다.

전에는 거침없이 하던 행동들도 조심스러워집니다. 고상한 말과 행동으로 종교인의 본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행가도 마음껏 부르지 못합니다. 왠지 찬송가 아닌 유행가를 부르면 경건하지 못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많은 세상 즐거움들을 하나씩 줄여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면 세상 친구들과도 점점 멀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인생의 재미거리들이 사라집니다.

개신교도 천주교처럼 술과 담배를 허용하면 더 많은 남성들을 전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좌우간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 금기사항에 동의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하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재미있는 삶을 포기해야만 합니까? 사실 교회는 성경에도 없는 계명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도 즐거워할 권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허락된 경계선인지 구별하는 것입니다.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하면 안 되는지 구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경건도 새로운 시대에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니 이제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구약의 계명에 따른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율법의 시대가 지나가고 복음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행동을 일일이 통제해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통제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주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또 다른 그룹이 나옵니다. 이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호감을 가지고 있던 그룹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세례 요한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물론 요한은 예수님을 세례 주는 일에 대해 황송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강한 요청으로 세례를 베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그의 제자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요한의 그룹에서 나온 신생 단체로 비춰졌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그룹을 자기들과 같은 계열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적대적이기 보다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친근하게 느낀다는 것은 뭔가 함께 공감대를 형성할 일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자기들과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의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앉아 밥을 먹는 것을 트집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한의 제자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이들도 예수님의 식사하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직접 대놓고 따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예수님이 생각 없이 경건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금식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 되신 예수님이 금식하지 않으니 그 제자들도 따르는 것이 아니냐고 따진 것입니다.

유대인은 공식적으로 일 년에 네 차례 금식을 했었습니다. 그 근거는 구약성경 스가랴에 잘 나와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슥 8:19>

4 월, 5 월, 7 월, 10 월에 하는 금식이 네 번 있습니다. 4 월의 금식은 주전 586 년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을 기억하면서 금식하는 것입니다. 5 월의 금식은 느브갓네살이 성전과 성읍을 불태워 파괴한 것을 슬퍼하며 하는 금식입니다. 7 월의 금식은 유다 총독 그달랴가 암살당한 것을 기념하며 금식했습니다. 10 월의 금식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한 비극적인 사건을 상기하면서 금식했습니다.

이런 금식들이 바벨론 포로 기간에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포로생활이 끝나고 본국에 돌아왔기 때문에 이런 금식의 풍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제 금식대신 희락의 절기가 왔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요한과 제자들이 이런 유대인들의 금식을 따르고 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함께 금식하고 있다는 말 속에는 요한의 독자적인 경건에서 나온 금식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 금욕과 절제를 통해 경건한 생활을 따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엣세네파라고 합니다. 이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흰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주로 산간 지역에 모여서 집을 짓고 최소한의 물건만 가지고 살았습니다. 쿰란 지역에서 이들의 유적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유적은 항아리에 잘 보관된 구약 성경들입니다. 그리고 극도의 극기 생활을 한 흔적들입니다.

세례요한이 이런 엣세네파였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요한은 금식을 밥 먹듯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하도 금식을 많이 하니까 귀신들린 자가 아니냐는 소문까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1:18 을 보면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했습니다.

요한이 금식을 자주한 이유는 그 나름대로 경건함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도 금식을 권했을 것입니다.

또 유대인의 전통적인 금식의 전통도 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하고 성향이 같다고 생각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전히 먹는 것을 즐기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래서 왜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이냐고 따졌습니다.

우리는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을 요구하는 모습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들 속에서 자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많이 할수록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의 눈에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눈에 잘 들어옵니다. 나는 경건하게 사는데 저는 경건이 없습니다. 혼자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엘리야가 실족한 것이 바로 이런 영적인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능력 대결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엘리야는 혼자였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850 명 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수적 절대 불리했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단을 살랐습니다. 저들은 별짓을 다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비를 내려 하나님의 능력을 보였습니다.

이 엄청난 승리 앞에서 엘리야는 영적인 교만에 빠졌습니다. 이세벨 왕비에게 쫓겨 도망을 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호렙 동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어찌 이곳에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엘리야는 주의 선지자는 나만 남았다고 호소합니다. 여호와의 단은 무너졌으며 주의 선지자들을 모두 죽었고 오직 나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선지자 칠천 명을 남겨놓았다고 하셨습니다. 나만 남았다고 생각한 것은 엘리야의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너만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엄청난 핍박 속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있는 주의 종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습니다. 자기만 남아 지금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경건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나 아니면 교회 일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순종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 기회를 주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을 했으면 그 금식을 통해서 영적인 은혜를 입으면 됩니다. 남이 나같이 금식하는지 안 하는지 살필 필요가 없었습니다. 남하는 것을 살피면 그것 때문에 내가 상처를 입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일을 하다보면 영적인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 혼자만 기도하는 것 같고, 나 혼자만 봉사하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돕지 않고 혼자서 일이 벅찰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힘에 지나도록 하다가 지쳐서 쓰러집니다. 이것이 교회 일을 하다가 오히려 시험에 드는 경우입니다. 내 힘에 맞게 하고 일에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내가 조금 더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금식하지 않는다고 따지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 9:15>

예수님은 금식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상설교 때에 예수님은 금식을 은밀히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즉 지금은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잔치에 와있는 것같이 즐거워할 때입니다. 지금은 주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즐길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때가 금식할 때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곁에 계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각종 병자가 치료됩니다. 소외된 자들이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모두 즐거워할 때라는 것입니다.

금식은 심각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할 때 금식은 도움이 됩니다. 죄의 구덩이에 빠졌을 때 회개하고 금식해야 합니다. 사단에게 억압되어 있을 때 금식하면서 대적해야 합니다. 금식은 음식의 즐거움을 끊고 오직 영적인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돌보려는 마음을 더 풍성히 얻기 위해 금식을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 자체에 매달려 있습니다. 밥을 먹지 않는데 그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스승 되신 요한이 하라고 시키니까 하는 것입니다. 금식이 경건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이 중요함을 가르치셨습니다. 두 개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헝겊을 기우는 비유와 또 하나는 포도주를 담는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같은 교훈을 가진 쌍둥이 비유입니다.

해어진 헌 옷을 기울 때는 생베 조각을 대지 않습니다. 처음은 그럴듯해 보이나 물이 닿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수축현상이 다르게 일어나서 기운 자리가 찢어집니다. 헌 옷과 새 헝겊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시에 포도주를 담는 용기는 가죽부대입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가 되기 때문에 팽창합니다. 새 가죽부대는 이 팽창을 충분히 견뎌줍니다. 그러나 가죽부대는 오래되면 탄력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부대가 터지고 맙니다. 그러면 포도주도 버리고 부대도 망가집니다. 새 포도주는 언제나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입니다. 헌 옷과 낡은 부대는 구약의 관습입니다. 이것은 헌 기준에 예수님을 맞추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헌 기준이란 유대인의 관습입니다. 금식을 비롯한 구약의 계명들을 복음에 맞대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 시대에 옛 질서를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본질을 잘 보존하려면 낡은 부대를 새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교회에 내려오는 전통들은 좋은 것입니다. 믿음의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다보면 그 지혜는 사라지고 껍질만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하는지도 모르고 그 형식만 따라서 하게 됩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전통은 오히려 폐해를 줍니다. 새 시대가 되면서 맞지 않는 전통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금식과 잔치가 부딪친 것입니다. 결론은 금식과 잔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훈은 오늘의 교회에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크리스천도 세상 즐거움에서 소외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즐거움에는 죄가 묻어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또 세상 즐거움에는 중독이란 독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이런 것들을 가려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유쾌한 즐거움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이 즐거움들을 모두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상하고 건전한 즐거움들을 찾아내서 크리스천 문화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사실 기독교 놀이 문화가 너무 부족합니다. 대중매체가 가지고 있는 유익한 것들을 즐깁시다.

그러나 여기 주의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즐거움 때문에 우리의 경건이 침해를 당하면 안 됩니다. 너무 즐기다가 경건은 없고 가볍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여가를 즐겁게 보내면서 재충전의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즐거움이 쾌락이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기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즐거움의 목적입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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