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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쓰던 열쇠는 항상 반짝입니다 (행 28: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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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중국에 단기 선교를 갔을 때 어느 날 저녁에 예배드리러 모였는데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어 보니까? 한국 가수의 CD를 아주 싸게 샀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방패장 유치를 위해 얼마 전 투표를 했는데 유치를 원했던 도시가 되었을 때 그분들 아주 축제적 분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월세를 살다 그렇게도 소원했던 집을 산다면 하루 정도 밥을 먹지 않아도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의 꿈이 성취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그렇게도 소원하고 기대했던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 23:11)”는 계시의 말씀, 비전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 꿈이 드디어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 꿈의 바울이 만들 낸 꿈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주신 꿈입니다. 자신의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라굴라 광풍이 바울의 앞길을 방해했습니다. 사람의 장애물이 있고 자연의 장애물이 있어도 그것이 바울의 앞길을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님과 저에게 주신 꿈은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나에게 주신 것이 주님께서 주신 소원이라면 그 어떤 소원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우리는 어떤 과정도 성실하게 받아들이고 중이 여기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11-15).

하나님은 바울을 부르실 때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부르실 때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불렀습니다. 그 후 바울은 로마에 대한 비전을 품었습니다.(행 19:21) 자신의 나라를 정복하고 압제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군사력이 아니라 복음으로 정복하고자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주 악랄한 네로가 통치할 때였습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난도질해 살해한 사람입니다. 신하의 아내를 간통하고 부인을 제거하기 위해 증기찜으로 죽인 사람입니다. 간통한 신하의 부인과 결혼하고 마음에 거슬린다고 발길로 차 죽이고 그가 낳은 왕자를 바닷물 속에 차 넣어 죽인 잔인한 사람입니다. 로마 시를 불질러 14구 중 10구를 전소시켰고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에게 뒤집어 씌어 수많은 기독교인을 잔인하게 순교시킨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죽이고 콜로세움에서 짐승의 가죽을 입혀 굶주린 사자들에게 잡아 먹히게 하고 사람의 머리에 불을 붙여 촛불 대신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잔인한 군주가 통치하는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비전을 하나님은 바울에게 주었습니다. 황금이 판을 치는 땅, 윤리가 땅에 떨어진 땅,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바울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폭풍 가운데 가이사 앞에 설 것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었습니다(행 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바로 로마 황제 앞에 간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앞에서 심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2년 동안이나 벨릭스 총독 밑에서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신임 베스도 총독 앞에 서야했고 아그립바 왕의 심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 태풍을 만나야 했고 뱀에 물리기도 했습니다. 위험한 폭풍으로 인하여 멜리데섬에 온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3개월을 머물렀습니다.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이제 바로 로마로 보내어 주시지 무엇이 더 필요한 과정이 있겠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로마에 가기까지는 마지막 과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여정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수라구라가 남아 있었습니다(12). 레기온이 있었습니다(13). 보디올이 있었습니다(13). 수라구라의 3일과 레기온의 하루와 보디올의 7일이 더 필요했습니다. 수라구라는 멜리데로부터 약 150K 떨어져 있고 항구였습니다. 이 도시는 유명한 수학자 아르키메테스(Archimedes)의 고향이었다고 합니다. 보디올은 그곳에서 340km가 떨어진 항구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복잡하게 수라구사에서 사흘 간 머물고 레기온에서 하루를 머물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불평하지 않습니다.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4절을 보면 그가 머물 때 무엇을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디올에서 형제들을 만나 이레를 유했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무엇을 했겠습니까? 바울이 영화보고 있었겠습니까? 관광을 했겠습니까? 아니면 화투치고 있었겠습니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 과정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중요한 사역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목적을 성취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이 중요했습니다. 우리 인생에 왜 수라구라가 있고 레기온이 있고 보디올이 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살이에 의미 없는 과정은 없습니다. 주님께 초점을 맞추면 모든 과정 과정은 의미가 있습니다. 광풍 때문에 오히려 로마에 더 빨리 갔습니다. 원치 않는 멜리데 섬에 갔지만 그곳에 바울이 감으로 말미암아 멜리데 섬처럼 추장이 변하고 그 섬이 복음화 되었습니다. 역사에 기록할 정도로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지라도 한 곳에서 한 명에게 만이라도 복음이 증거되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성과가 없이 실패했을 지라도 그 과정도 중요한 것입니다.
과정 없는 결과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송곳도 끝부터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과란 과정이 모여서 된 것입니다. 과정의 질이 결국 결과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는 너무 과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정 자체로 인정받는 사회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운동 선수가 은메달을 따면 은메달에 그쳤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은메달을 따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훈련을 했는가 그 과정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과 지상주의입니다. 업적 지상주의입니다. 출세 지상주의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결과가 없다해도 별로 출세를 못했다해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과정을 귀하게 보십시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것은 과정 과정을 성실히 수행한 결과입니다. 노예로서 살 때도 죄수로서 살 때도 충실하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때로는 10년을 일하였는데 아무런 성과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성과가 없는 시간, 실패의 시간도 우리 주님께 초점을 맞추면 아주 귀중한 시간입니다. 실패가 주는 교훈이 있고 침체가 주는 교훈들이 있습니다.

커넬 샌더스는 65세의 나이에 주유소를 경영하면서 간이 식당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90세로 죽을 때 전세계의 6,000개의 점포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과정의 중요성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테이블 하나에 의자 여섯 개뿐인 간이 식당을 운영하면서 그가 가진 생각은 단순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손님들이 좋아할 것인가?" 그의 식당의 메뉴는 후라이드 치킨, 햄콩, 비스킷 등 어느 식당에서나 먹을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었답니다. 그러나 커넬 샌더스는 '맛'에 더욱 신경을 써 음식을 만들었답니다. 무엇보다 '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자세로 식당을 운영했답니다. 그는 '돈'이라는 결과보다는 '맛과 기분 좋은 서비스'라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답니다. 때로는 실패할 수도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모든 과정 속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까를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로지 산만 오르기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산을 오르길 원합니다.

2. 우리는 동역자를 보내주어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5)

바울은 이제 보디올에서 로마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바라고 소원한 땅인데 바울은 고독하게 죄수의 몸이 되어 홀로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누가가 있었습니다. 죄인이지만 자유인처럼 대해주는 폭풍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백부장과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또 보십시오. 항구에서도 대접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조금 가니까 바울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신앙의 동역자들이 바울 일행의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까지 마중 나왔습니다. 저자라는 말은 시장 광장을 말합니다. 이는 압비우스 광장(Forum of Appius)을 가리키며 로마로 부터 65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압비아 대로상에 있었답니다. 로마의 개선 장군들이 돌아 올 때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황제의 사절단이 이 광장에서 장군들을 영접하였다고 합니다. 이 도로는 로마로 향하는 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완벽한 도로의 하나로 로마의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의 입성을 할 때, 군중들이 열렬한 환영을 하며 맞이하던 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로 가는 길이지만 마음이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꿈에서도 그리던 로마입니다. 이 도시에도 이미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오순절 때 모인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수년 전에 고린도에서 이미 로마서를 보내어 그들에게 복음을 소개하였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그 길을 걷고 있지만 사실상 그 길은 복음으로 로마를 정복하기 위한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외로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소수의 무리지만 바울을 개선장군처럼 환영하는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또 삼관에 나왔습니다. '세 개의 숙소'(Tres Tabernae)라는 뜻입니다. 로마로부터 50Km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도 바울을 환영하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감격하였습니다.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이들을 만난 바울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죄수의 몸이지만 소명과 양속을 주시고 드디어 그것을 성취하게 하신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동역자를 보내주어 환영하게 하고 위로를 주시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해외 여행을 할 때 아무도 모르는 곳에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바울은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로마에 왔는데 홀로가 아니라 같은 동료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본문의 '맞으러'는 '아판테신'으로 어떤 도시의 대표단이나, 왕이나 장군을 맞이할 때 쓰는 단어임을 생각할 때 로마의 성도들이 바울을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로서 얼마나 뜨겁게 환영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낯선 곳에 대한 어색함이 없어지고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생겼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아무도 없이 홀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죄수가 되어 아무런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가는 길처럼 보입니까? 걱정 근심의 결박, 돈의 결박, 질병의 결박으로 몸부림치며 가는 길입니까? 바울처럼 죄수가 되어 군인들에 의해 포박되어 가는 길일지라도 주를 위한 영광스러운 길입니다. 아무도 나를 돕는 이 없는 것같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나를 지지해 주고 나를 격려해 주고 나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나의 적이고 경쟁자이고 핍박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어 우리를 세워주고 사명을 이루도록 해 주십니다.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을 때 바나바를 세워 인정을 받도록 했습니다. 눈을 뜨지 못하였을 때 아나니아를 통해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외롭고 힘들어 지쳐 있을 때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릴 정도로 바울을 헌신적으로 돕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통해 도움을 받게 하였습니다. 건강을 잃을 때 의사 누가를 붙여 주어 늘 바울 곁에 있으며 건강을 돌보도록 해 주었습니다. 가족이 없어 외로울 때 디모데와 같은 사람을 통해 아들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홀로라고 늘 외로워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불러 동행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늘 동역자를 붙여 주어 용기와 위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주변에 치열한 경쟁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사 흠집을 잡고 비판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이용해 먹고 내 아픔을 외면하는 무관한 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깎아 내리고 자존심을 뭉개고 희망을 꺾는 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격려로 춤추게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붙여 주십니다. 어떤 길을 가더라도 힘을 내야 합니다.

우리 나라 목사님 중에서 머슴 출신으로 총회장을 세 번이나 지낸 분이 계십니다(1924년 1947년 1948년). 이자익 목사님이십니다. 어릴 때 아버지 어머니를 다 잃은 사람입니다. 행상을 하다 실패하여 머슴살이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훌륭한 목사가 된데는 좋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김제 금산의 대지주인 조덕삼씨 집에 들어가 머슴살이를 시작한데서부터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국회의원이었던 조세형씨의 친 할아버지였습니다. 머슴으로 일하며 어깨 너머로 글을 깨우쳤으며 조씨와 함께 선교사였던 테이트(최의덕)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답니다. 그는 주인 조덕삼씨와 함께 학습과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부자인 조씨는 1907년 금산교회를 설립했습니다. 두 사람은 1909년 금산교회 장로투표에 응해답니다. 그런데 머슴인 이자익이 장로로 피택이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님이 주인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조세형 장로의 할아버지가 참으로 신앙이 좋은 인격자였다고 합니다. 이자익을 머슴으로 부리던 조씨는 믿음이 신실하고 총명한 이자익을 신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고 합니다. 191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 5년만에 졸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머슴을 자기 교회의 담임 목사로 청빙을 하였습니다. 주인은 장로로 봉사하고 머슴은 목사로 성도를 섬겼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자익 목사님의 삶에 이런 사람을 만나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에게 비전을 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소원과 꿈을 주신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도록 우리게에 동역자도 허락해 주시고 격려해 주고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3. 어떤 환경에서도 끝까지 복음 전파의 소원을 붙드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16-22)

드디어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비전이 이루어졌으면 좋은 환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출세하고 부자가 되고 영광을 받은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장애물이 거두어지고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일이 벌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20절에 보십시오. 몸은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16,30절을 보십시오. 셋집에 머물며 자유롭게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2년이라는 긴 세월입니다. 로마 병사가 온 종일 감시를 합니다. 바울은 죄인으로 로마에 갈 줄 몰랐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비전을 이루길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좀더 화려하고 소원을 성취하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바울을 바로 무엇을 합니까? 감옥을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신음하며 고통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고 사람을 살리는 장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3일 후에 바로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지도자급 되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들은 개별적 공동체들의 장로, 지도자, 회당장과 같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죄수의 신분으로서 활동 공간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초청을 합니다. 갈 수 없으며 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도 바울의 복음 증거 방법입니다. 바울은 정중하게 자신이 로마에 재판을 받기 위해 온 경위를 설명하였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동족인 유대인을 거스르거나 유대의 관습을 반대한 일이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무죄하게 로마인의 손에 넘겨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로마인들이 심문하였지만 죽인 죄를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놓아주려고 했는데 유대인들이 반대하였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러므로 자신이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재판받을 것을 호소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살해하려한 동족을(23:2-15 ;25:3) 송사할 의사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장황한 설명을 합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자신이 죄수의 몸이 된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공의회에서도(23:6), 벨릭스 앞에서도(24:15),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26:6) 증언했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 이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입니다. 메시야적 소망입니다. 정치적이며 현세적인 메시야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에게 바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그 소망의 주인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듣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자신을 감시하는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황제의 친위대원, 지금의 대통령 경호원들입니다. 그들이 교대합니다. 아마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강금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왕실 시위대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의 심장부를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바울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결국 로마는 변하였습니다. 황제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이, 그들이 만들어 놓은 헬라어가, 그들의 정교한 법이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하 이 복음이 머지 않아 칼과 창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온갖 우상숭배를 조장하며 무자비와 음란한 문화로 세상을 썩어 들어가게 하는 로마 황제의 깃발을 걷어 내리고 모든 사람을 살리며 참 자유와 평안을 주는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올리게 하였습니다. 황제의 친위대원들, 귀족들 더 나아가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 (빌 4:22)”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이 죄수로 가서 로마를 변화시켰기 때문에 유럽 전체에 영적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선교적 소망, 복음적 소망입니다. 나 인생 하나 먹고사는 것으로 끝내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소유에 애착 두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또 무엇을 했습니까? 감옥을 성경을 기록하는 성령의 서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연금 당함으로 오히려 안전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죽일 염려를 할 것이 없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적어도 재판을 받으려면 2년은 기다려야 합니다. 2년동안 먹여 주고 재워줍니다.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옥중서신인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붙들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 초점을 두었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빌1:12에서 "나의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죄수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로마의 황제 앞에 갈 수 있었겠습니까? 가이사 앞에 가는 것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자기에게 처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합니다. 한시도 좌절하거나 사명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어디에서나 가지고 다녔던 빛나는 열쇠입니다. 천국 열쇠 복음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는 바울의 인생을 끌고 가는 열쇠였습니다. 쓰던 열쇠는 항상 반짝입니다. 바울은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빌 3:8)”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환경이 주어질지는 모릅니다. 꼭 예수 믿으면 육신적으로 건강해지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고 모든 것이 잘 되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바울처럼 그렇게 소원했던 소원의 항구에 갔는데 오히려 감옥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비전을 가지고 결혼하였는데 시집에 가보니 참으로 안타까운 환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직장에 들어 갔는데 직장에 들어 가보니 직장이 지옥같을 수도 있습니다. 노예처럼 살아야 할 환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살면 지옥같은 직장을 천국으로 변합니다. 힘겨운 시집에 복음의 축복이 임하고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가정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쓰던 열쇠는 항상 반짝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주님의 천국의 열쇠 축복의 열쇠이십니다. 우리 주님 모시고 우리는 어떤 과정도 성실하게 받아들이고 중이 여기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11-15). 우리의 로마 길이 고독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동역자를 보내주어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5) 어떤 환경에서도 끝까지 복음 전파의 소원을 붙드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16-22) - 김필곤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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