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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따르는 바른 자세 (막 10:3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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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할 때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자세가 틀리면 아무리 수고를 해도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기가 매우 힘듭니다. 스포츠 스타들도 슬럼프에 빠지면 자세를 교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곤 합니다. 신앙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세에 따라 결과가 많이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엔 같은 여정 길에 오른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엔 여행에 임하는 자세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자의 자세가 잘못되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 예수님과 함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주님을 따르기는 하되 잘못된 자세로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를 잘 점검하고 바른 자세를 회복하는 아름다운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용기 vs 두려움(32a-32b)

예수님과 제자들의 첫 번째 차이는 용기와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은 용감하게 여행길에 나선 반면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두 번이나 예고하신 고난과 죽음의 길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주저함 없이 그 길을 앞서 가십니다. 앞서 간다는 것은 단순히 전통이나 예의의 문제는 아닙니다. 'We were soldiers'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멜 깁슨이 주연으로 나오죠. 그는 소령으로 대대를 이끌고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의 도덕성 문제는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다루지는 안겠습니다. 다만 대대장으로서의 멜 깁슨의 감동적인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베트남으로 가기 전 부대를 연병장에 모아놓고 의미심장한 연설을 합니다. '나는 제군들이 모두 살아서 집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맹세한다. 나는 전장에 제일 먼저 발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그리고 맨 나중에 떠날 것이다. 한 사람도 내 뒤에 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끝까지 약속을 지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하지만 그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절규합니다. '내 부하들은 죽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 남았다'.

많은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땀과 피와 눈물을 요구합니다. 자신도 고난에 참여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막상 고난이 다가오면 제일 먼저 도망을 칩니다. 예수님은 그런 부류의 지도자와는 차원을 달리 하십니다. 제자들을 고난의 길로 초대합니다. 그리곤 자신이 제일 먼저 그 길에 발걸음을 내디디십니다. 제자의 길을 간다는 것은 때로 무척 외롭고 힘듭니다. 양심적으로 정도를 걸어가려다 보면 혼자 잘난 척 한다는 비난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 때 기억합시다. 예수님이 여러분보다 앞서 그 길을 앞서 가시고 계시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 가야할 길을 용기 있게 갈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앞서 가는 것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엄숙하고 담대한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엔 두려움이 엄습해왔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따라 갈 용기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은 제자도에서 반드시 넘어가야 할 장벽입니다. 정직하게 제자의 길을 가다간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낙오할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느냐 아니면 두려움에 압도당하느냐에 따라 제자도의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이 점에서 세상의 전쟁과 영적 세계의 전쟁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 전쟁에서 총을 제대로 겨냥해서 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고 하죠.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구잡이로 총을 쏜다고 합니다. 이렇게 덜덜 떠는 군대가 적군을 이길 도리가 없습니다. 하여 군대훈련에서 매우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담력훈련이지요. 하나님께서도 가나안 정복전쟁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도전하십니다. 두려움은 제자들이 반드시 싸워서 물리쳐야 할 주적(主敵)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이 두려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2. 두려움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32c-34)

예수님은 두려움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달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가야할 고난과 죽음의 길을 수정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폭풍이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고 거짓된 희망을 불어 넣어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따로 불러 내 예수님이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전에 당할 고난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33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34 그리고 이방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편안한 우회로를 열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을 극복해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부활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매우 부담스러운 역사의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에서 고난의 길을 가시고 계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고통의 길을 가십니다(마 25:31-46). 이것이 세상 통치자와 예수님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제자들에게 그 길을 따라오라고 부르십니다.
하여 오늘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진리를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을 피해가기 위해 좀더 안전하고 편리한 우회로를 찾습니다. 이들의 욕구를 잘 충족시켜주는 설교와 신학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됩니다. 더 핵심적인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 믿고 내가 잘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난과 고통을 겪으셨기 결국 십자가를 걸머지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고난이나 가난을 더 이상 당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이런 왜곡에 대한 경고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 앞에 발가벗고 정직하게 서는 것입니다. 그 뜻을 진실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낳게 하시기 위하여 사정없이 찢기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갖은 조롱과 멸시를 다 당하시고 결국엔 매우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모든 죄인들은 회개하고 용서받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영접할 때 놀라운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진리를 진정으로 깨닫게 될 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더 이상 두려움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는 감격 속에 그 진리를 영접하게 되고 용기 있게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 외에 다른 방법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것은 거짓과 파멸에 이르는 길임을 명심할 수 있길 바랍니다.

3. 높은 자리 vs 고난과 슬픔(35-40)

두 번째 차이는 야고보와 요한으로 대변되는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구한 반면 예수님은 고난과 슬픔의 자리로 걸어가셨습니다. 불행하게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른 길을 찾습니다. 예수님께 은밀하게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당돌한 요청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알고 있었지만 일단 그들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래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어내심으로 스스로 자신을 발견하여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에 야고보와 요한은 아주 노골적으로 본심을 들어냅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과 일종의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가겠습니다. 단,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받게 될 때 우리에게 가장 높은 자리인 좌·우의 한자리씩을 주십시오'. 그들은 미래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보장받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욕망 중에 가장 큰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높은 자리에 대한 욕망입니다. 한 자리 차지하여 권력을 휘두르며 명예와 영광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죠. 이를 잘 아는 사단은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달콤한 제의를 합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

이 욕망과 시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사단은 더 교묘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분명히 표면적으론 모든 것을 버린 것 같습니다. 경제적 부요함도 포기한 것 같습니다. 세상적 영광과 명예도 버린 것 같습니다. 헌금도 많이 바치고 희생적으로 교회 일에 헌신합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에게 속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새로운 계산법에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주님, 제가 이렇게 충성을 하니 제게 교회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좋은 자리를 주시겠죠'. 문제는 이런 식으로 헌신하고 충성하다보면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욕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주님을 위해 충성했기에 주님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까지 생각합니다. 아마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당돌하게 주님의 좌우 자리를 요청한데는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정말 깨어서 이런 자기 기만적 욕망과 늘 싸워야 합니다. 이런 마음까지 버릴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한번 크게 싸워서 이겼다고 해서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유혹은 언제라도 다시 찾아와 우리의 마음을 공략합니다. 제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그런 마음을 다 버린 것 같은 데 어느 새 모르게 내 마음 한 구석에 다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며 낭패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곤 합니다. 어느 날 다른 사람이 특히 내가 잘 아는 친구나 후배가 더 유능한 지도자요 목회자로 인정받는 모습을 보면 정말 마음으로부터 기뻐해야 하는 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싸 할 때가 있곤 하지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이런 마음과 늘 싸움을 해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당돌한 요청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들이 구한 것은 예수님의 좌우 옆자리였는데 그 자리의 본질과 성격에 대하여 무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하여 반문을 하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여기서 잔과 세례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표현입니다. 잔은 고난을 세례는 압도적인 슬픔에 깊이 잠기는 것을 말합니다(시 11:6; 사 51:17; 시 42:7; 69:1; 124:4, 5). 예수님은 예수님 좌·우의 자리를 얻으려면 그 자리에 대한 욕망과 모든 관심을 떨쳐 버리고 주님이 마신 고난 잔을 마시고 주님이 받은 슬픔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역설적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우리도 이런 무지를 떨쳐 버리고 바른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받을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나라가 요구하는 길을 가시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자유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심각하게 핍박받고 고난받을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씀도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를 않습니다(행 14:22). 그것은 기독교가 엄청 핍박을 받을 때나 적용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와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유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들이 빠지기 쉬운 교묘한 함정입니다. 신앙생활을 가정과 교회에 국한시킨다면 고난받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굳이 핍박을 받는다면 노방전도를 하다가 비난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님을 위한 핍박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도덕적 위상이 추락된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고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전도하다 당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제외하면 사실 핍박에 해당되는 것이 거의 없지요.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신앙을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영역에 적용하려고 하면 당장에 고난을 겪게 됩니다. 최근 진실한 우리 교인 중 한 분이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회사의 재정관리와 관련해서 최소한의 원칙과 신앙양심을 지키려다 보니 동료로부터 비난과 소외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지나치게 이상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부분도 있지요. 때로는 복잡한 사회현실에서 어느 정도 타협이 가능한 것인지 진지하게 기도하고 지혜를 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신앙과 양심을 사회생활 가운데 지키려 한다면 결국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시대이든지 고난받지 않고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의 슬픔에 동참하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깊은 슬픔을 겪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이 망할 것을 미리 내다보시며 우셨습니다(눅 19:41). 우리에게 이런 슬픔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는 웃음을 찾습니다. 개그콘서트와 웃찾사가 매우 인기 있는 프로그램 중에 하나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그런 프로를 보지도 말고 유머도 하지 말고 매일 울기만 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울어야 할 때 정말 깊이 울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볼 때 울 수 있어야 합니다. 불의로 말미암아 멸망해 가는 교회와 나라를 지켜보며 눈물을 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질문에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자신들의 무지를 다시 한번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책망하기 보단 그들이 결국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인내가 얼마나 큰 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내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즉 예수님께 떼쓰고  조른다고 예수님이 자의로 주실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놓은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 더 이상 예수님께 떼쓰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기준에 맞춰 살 것을 권면하십니다. 그 기준은 다음 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맺음말

예수님을 그저 따라 나서는 것 만으론 부족합니다. 바른 자세로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경험하는 제자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복음을 왜곡시켜가며 까지 두려움을 우회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정면으로 주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대면하여 그 의미를 깨달음으로 두려움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대한 욕망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신 고난의 잔을 마시고 예수님이 받으신 슬픔의 세례를 받고자 하는 마음준비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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