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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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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의 본 설교는 이야기식 설교 양식에 따라서 작성된 것입니다.

임상 심리학자인 폴 호크라고 하는 사람이 쓴 '오버카밍 더 레이팅 게임' 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어려운 병이 바로 우울증과 열등감이라는 겁니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적어도 약으로서 고칠 수 있는 병은 아닙니다.  수술로 고칠 수 있는 병도 아닙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우울증의 결론은 자기가 죽던지, 남을 죽이던지 거기까지 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울증은 정신적으로 이미 자살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정신적 만성 자살 상태가 우울증입니다.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우울증과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현대인으로서는 없다는 겁니다.  정도의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끝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 평가하는 비교의식에서 생긴다고 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불행하게 비하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은혜를 생각해야 되고 내가 처한 처지 속에서 절대적인 은혜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어느 사이에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자기 존재를 잃어버렸습니다.  거기서 정신적인 이런 무서운 질병, 고칠 수 없는 상황에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자신에 대한 문제,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문제를 비교하는 중에 아주 심각하고도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문제를 볼 때는 공평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불공평합니다.  문제는 어느 잣대로 세상을 보느냐?  어떤 시각에서 나 자신을 평가하느냐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새벽 인력 시장에 후덕하게 보이는 사장님 한 분이 나타났습니다.  마침 일터를 찾아 서성대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일할 생각이 있습니까?"  "예, 시켜만 주세요.  열심히 일해 드리겠습니다."  "포도원이오, 추수하는 일입니다."  "좋지요.  저도 아주 잘합니다."  "좋소, 임금은 어떻게 할까요?"  "알아서 하십시오.  그래도 식솔이 있으니 먹고 살만큼은 주셔야죠."  "자!  이렇게 합시다.  십만원을 드리리다."  불경기에 그만하면 넉넉한 삯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맡겨만 보십시오.  잘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0여명을 차에 태우고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풀어놓았습니다.
"자, 여기 따뜻한 보리차가 있으니 한 잔씩 하고 어서 가서 일합시다"  그런데 그 일꾼들과 포도원을 보고 있던 주인이 아침 9시에 다시 인력시장에 나타났습니다.  다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일터를 찾으세요?  자, 갑시다.  차에 타시오"  포도원에 풀어놓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고 있던 주인이 낮 12시에 다시 인력시장에 나타났습니다.  "일터를 찾으세요?  우리 농장으로 갑시다.  자! 타시오.  일하러 갑시다."  "고맙습니다.  일자리를 찾았구나."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돌발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거의 하루 해가 끝나 가는 무렵인 오후 3시에 주인은 다시 인력시장에 나타났습니다.  아직도 일터를 못 찾고 서성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하러 가실래요?"  "예, 일감만 있으면요."  "갑시다!"  "허탕칠 뻔했는데"  "포도원입니다.  임금은 십만원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이제 1시간만 있으면 끝날 시간인 오후 5시에 주인이 인력 시장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낙심과 좌절과 불안으로 이제 '오늘도 허탕치는가 보다.' 하고 집에 돌아가려고 짐을 챙기던 인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일하러 가실래요?"  "예, 일감만 주시면요."  "갑시다.  포도원입니다.  일당은 십만원입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그룹에서 일하기를 원하십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누가 행운입니까?  누가 땡 잡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는 철없이 어리석게 지나간 날, 어쩌다 나에게는 그렇게 모진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후회스럽거나 한스러운 사람도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고통스러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지나간 세월을 더 이상 묻지 않으십니다.  "지난 세월을 후회하지 말고 가서 일하라!"고 하십니다.  남은 시간이 중요하니 남아있는 생을 기억하며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 지나간 것은 후회도 원망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그 미래에 시간도 열정도 다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나간 것을 후회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한 사건으로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 안에는 하루가 천년 같을 수 있습니다.  먼저 된 자가 늦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늦게된 자가 먼저 되는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입니다.

남은 인생이 언제나 더 중요합니다.  여기 서 있는 저는 제 시간과 열정과 모든 삶의 지혜를 미래에서만 쏟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야할 곳이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자기 선언을 하십시오.  "지난 날의 어떤 실망도 고난도 앞만 바라보고 가는 나를 단념시킬 수는 없다!  나에게는 아직 내 인생을 바꿀 멋진 일터와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역경도 내 삶을 바꿀 미래의 영역을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란 미래 건설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어차피 미래에 그 나라에 갈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시간 성령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고 모든 과거의 소모적인 논쟁과 고통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책 제목을 하나 드립니다.  "내 인생을 바꾼 때 늦은 일터와의 만남"  이 제목으로 책을 한 번 써보십시오.  베스트셀러가 될 것입니다.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환상을 보기 바랍니다.  예언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 삶의 고통이 사방에서 오지만 자세히 보면 모든 고통은 오해의 시각에서 시작됩니다.  저녁 6시가 되어 포도원의 모든 일이 끝났습니다.  일꾼들은 짐을 챙기고 떠들며 기쁨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시간입니까?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기다리는 자식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녁 식탁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랑스런 아내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때 주인이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웃으며 돈 봉투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자! 수고했습니다.  여기 일당을 받으세요."  그런데 맨 나중에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로부터 일당을 주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들은 거의 문닫을 시간이 되어 들어온 일꾼으로 겨우 1시간 일한 사람들입니다.  "자, 십만원이오!"  일찍 온 사람들의 얼굴에 잔뜩 기대감이 흐릅니다.  "이것 봐라.  우리에게는 십만원을 준다고 했는데, 아마도 우리에게는 훨씬 많은 삯을 주겠구나?"  이번에는 오후 3시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일당을 줍니다.  "자, 십만원이오.  수고했어요."  갑자기 이곳 저곳에서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수군수군 거리더니 불평이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주인은 일꾼들의 반응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낮 12시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십만원의 일당을 줍니다.  이제는 수군거리는 수준을 뛰어 넘어 아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이것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항의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뭐야? 아니 이럴 수가?  이것은 말도 안돼!  원칙도 없잖아!  이것은 공정거래위원회에 고소감이야!  원 저런 주인이 다 있어?  이것은 불공평하다."  웅성웅성하더니 "자, 우리 데모합시다!  농성합시다!  우리 받지 마십시다!  노래합시다!  우리 투쟁합시다!  우리 것을 착취한 악덕 사장은 회개하라!  물러가라!  우리는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한 발자국도, 한 사람도 물러나지 않는다!  자 어째 동무를 하고 투쟁가를 부릅시다!  한 사람도 먼저 집에 가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판단, 우리의 잣대, 우리의 집단 시각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만은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만든 자기 기대감의 피해자들입니다.  더 받을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릇된 추측! 억지 시각! VIP 의식!  우리는 뭔가 특별하다는 의식이 지금 나라와 역사를 망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인데 지금 국가가 뒤엉켰습니다.  암울한 역사의 독재 정권 속에서 민주화를 위해 감옥에도 가도 갖은 고통을 견디며 일한 사람들, 물론 그들은 훌륭하고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들만의 시각이 옳다는 잣대는 역사에 또 다른 고통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그들만의 생각은 개혁적이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수구적이라고 비난하는 사고 방식이 오늘 이 사회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역사에는 투쟁자들만이 공로자가 아닙니다.  그런 정권 하에서도 참고 견디며 오늘의 발전된 나라를 이룩한 바보 같은 충성파도 있습니다.  이들의 시각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투쟁 라인에 있던 사람들만 애국자이고 저들만이 권리가 있습니까?  저들이 국가 관리를 맡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협동을 모르는 비판과 투쟁 시각, 자기들만의 특권, 패거리 의식이 나라를 구한말과 같이 만들고 말았습니다.  정말 진정한 애국자라면 차이점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며 민주주의를 만든 다음 국가 경영을 능력 있는 분들에게 물려주고 지지와 격려를 보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성경에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주인의 기준입니다.  VIP의식, 특별 공로자 의식, 내가 먼저라는 것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연공서열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했을 뿐입니다.  불만을 품고 주저앉아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일꾼들 앞에 농장 주인은 알 듯 모를 듯한 말 한마디를 남겨두고 그 자리를 떠나갑니다.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될 자가 많으니라"
우리가 본문을 대하면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좀 지혜로운 주인이었다고 한다면 가장 먼저 일찍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고 돌려보내고, 그 다음에 낮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또 한 데나리온을 줘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오후 느즈막이 들어온 사람들이 '자신은 얼마 일을 하지 못했으니까 몇 푼 받지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역시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한다면 모두가 감사할 수 있었을 터인데 왜 긁어 부스럼을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십시오.  주인은 나중에 온 사람을 부르더니 한 데나리온 줍니다.  잔뜩 기대감을 부풀려 놓고 그 다음 사람에게도 여전히 한 데나리온 씩을 줍니다.  그러니 일꾼들 사이에서 불평이 터져 나올 수 밖에요.

문제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불평하는 일꾼들에게 들려지는 주인의 마지막 말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오늘 본문의 초점은 먼저된 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신앙의 퇴색을 경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기득권 의식, VIP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한 준엄하신 경계의 말씀입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불평하는 일꾼들에 동정하면서 본문을 억지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새참타령이나 하고 빈둥빈둥 놀면서 일을 했고, 나중 온 사람들은 죽을둥 살둥 일을 했기 때문에 일의 분량이 비슷해 졌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부질없는 해석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이해하려고 하면 먼저 본문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그 시간부터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자기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소중한 자리에 앉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문득 나타나서 가난한 자가 천국에 더 가깝다.  죄인들도 회개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유대인들만 구원받는 것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더욱더 풍성한 구원이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먼저 온 너희들이 나중 되고, 나중 온 이방인들이 먼저 될 수 있다고 하니 그들에게 납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배경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인의 음성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늦게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는 먼저 된 자가 언제나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된 자가 언제나 먼저 되어 있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이 나라를 망치는 주범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득권 의식, VIP 대접은 결코 하나님의 농장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포도원 농장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시간 따라 주지 않고, 일한 만큼 줍니다.  늦게 왔어도 포도를 얼마나 땄느냐, 짧은 시각이라도 충성되게 일했으면 그것으로 합격이라는 것입니다.  늦게 불림 받고 1시간 일한 사람들은 이랬을 것입니다.  "오늘도 허탕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일터를 주시다니!  기회를 주셨으니 무엇을 보답할꼬?  주인님! 감사합니다.  저는 원래 동작이 빠르지 못해서 첫 번째 부르고 두 번째 부르고 세 번째 부를 때에도 다 놓쳤지만 사실 저는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입니다.  이제 두고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온 일꾼들은 주인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들도 처음에는 빈둥거리고 있던 자신들을 불러 주었을 때에 감사하고 감격해서 흥분했을 것입니다.  "와! 일터를 얻었다!  내가 뽑히다니!  주인님, 고맙습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첫 은혜, 첫 사랑을 다 소멸하고 이제 하나님의 농장의 일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농장의 비판거리만 보입니다.  주인의 흠집만 찾아내며 주인이 하는 일이 자기 잣대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계산과 주인의 계산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이 주인의 것을 가지고 주었습니다.  주인은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일당을 주겠다는 대로 준 것뿐입니다.  주인이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저들과 다르고 주인은 나를 특별대우를 해야 되는데 주인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답답한 것은 일터를 주고 밥 먹여 주고 지켜주고 세워주고 나니 주인의 처사가 옳지 않고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이 심보를 가지고 있으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심보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뭐가 문제였습니까?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를 보는 방식이 문제입니다.  문제를 보는 방식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바꿀 수 있다고 한다면 당장 변화가 시작됩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시험자의 패턴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형의 주장도 똑같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걸리면 고통스러워집니다.  어려움을 당합니다.  내 안에 비판 의식이 들어오면 감사가 없어집니다.  비판 의식이 싹트면 은혜가 떨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딜 가든지 어디서 일하든지 내 속에서 포도원 주인을 비판하고 물고 늘어지는 어리석음에서 해방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본문을 대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참으로 간사하고 사악한 존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먼저 온 사람들이 모두 불평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침 6시에 와서 온종일 일한 사람들이 오후 5시에 느지막이 와서 일한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할 때에 불평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오후 3시에 조금 덜 느지막이 들어온 사람들이 '내가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하고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넋두리를 합니다.  남들이 보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이게 사악한 인간의 태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포도원에서 불평하는 일꾼들에게 있어서 잘못된 점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강해 설교가로 잘 알려진 제임스 보이스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포도원에 먼저 온 사람의 결정적인 잘못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무엇인가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채권자 의식에 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채무자가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무언가 빚을 졌기 때문에 우리에게 뭔가를 갚아 주어야 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빚진 자들입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로 의식, 채권자 의식,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공로 의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 공로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교회 생활 중에서 낙심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 채권자 의식입니다.  자기가 어떤 일을 했다고 하는 자기 업적을 마음속에 기록해 놓고 자신의 공로만큼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괴롭고 자신이 비참해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했다고 하는 공로 의식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봉사의 기록을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록만이 가장 정확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아무리 높이 올려놓아도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지막 때에 '주여! 주여!' 하고 신앙 생활하던 사람들 가운데 버림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습니다.  귀신을 좇아 냈습니다' 하는 사람들 가운데 버림받는 장면이 마지막 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 한마디는 이것이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에게서, 우리들에게서 채권자 의식, 공로 의식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결단코 하나님의 역사가 경험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채권자 의식, 공로 의식이 있는 한 그에게서는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나는 빚진 자라는 습관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인간의 움직일 수 없는 고백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는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곳에만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 직분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나는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그 누구에게나 나는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빚진 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기도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불러주시고 구원해주신 은혜, 먼저 직분을 맡겨주신 은혜, 받은 축복이 얼마인데 더 드려야 하는데….  주님! 저는 빚진 자입니다.  참 죄송합니다.'  남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받은 사랑! 내가 받은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며 주님께 빚진 자로서 충성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내 안에, 우리들 안에 성령께서 주시는 순수함을 일으키십시오.  하나님이 늦깍이와 같은 나를 쓰신다는 감격, 어쩌다가 세월도 기회도 다 놓쳤지만 뒤늦게 주님 손에 잡혔으니 죽도록 충성할 것입니다.  신나게 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농장 포도원은 일찍 와도 OK, 늦게 와도 OK입니다.  그저 일감을 주시니 감사하고, 일을 하면서 감사하고, 일을 마치고 감사해야 합니다.  "주인님! 주인 것 가지고 마음대로 하시니 그저 저는 제 몫만 가지고 감사하며 살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품꾼들은 당시에 아주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품꾼이란 글자 그대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로마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연적인 악조건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고용해 주지 않는다면, 누군가 내게 품삯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굶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내 처자식도 굶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아십니까?  일터가 없는 사람의 괴로움을 말입니다.  아십니까?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야만 하는 사람의 처절한 절망감과 허탈감을 말입니다.  이런 나를 주인이 불러서 일터를 주었습니다.  손에 희망과 보람을 가지고 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주인 앞에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주인 앞에서 불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주인의 얼굴만 봐도 감사하고 써주신 그 분의 은혜만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불평하고 일터에 간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감사했을 겁니다.  주인의 손을 붙들고 고맙다고 인사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일을 진행하는 가운데에 나중에 온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선배 의식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권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수 믿으신 분들은 이 흥정의식, 동기의 변질을 조심하십시오.  주님과 첫 사랑을 맺었을 때에는 무엇을 해도 감사했습니다.  작은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은혜가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갈 수록 동기는 변질되었습니다.  올바른 동기가 결핍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쁨이 불평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감사가 원망으로 끝나버리는 실패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 학교 교실에 아주 잘 생겼는데 얼굴이 까맣게 생긴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자리에 아주 예쁘고 하얀 얼굴을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  하얀 아이는 까만 얼굴이 예쁘다고 이야기하고, 까만 아이는 하얀 얼굴이 부럽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까만 아이가 자꾸 하얀 아이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얼굴이 하얘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잘 모르겠는데 표백제로 한번 씻어보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얼굴이 까만 아이가 저녁에 잘 때마다 표백제로 얼굴을 닦고 잠을 잤는데 더 얼굴이 새까매지는 겁니다.  이게 웬일인가? 하고 표백제 광고를 보니 '흰옷은 더 희게! 색깔 옷은 더 선명하게!'

사랑하는 여러분, 왜 비교하다가 불행해 하십니까?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 자신보다 일을 더한 사람들과는 비교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신보다 적게 일한 사람과 비교합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제발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나는 나처럼 하나님 앞에 살고, 너는 너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받은 은혜가 있고, 너는 네가 받은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주위에 보면 안타깝게도 은혜로 시작한 일을 불평으로 마치는 인생이 있습니다.  먼저 시작하고 상급없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주위에는 힘들게 시작한 일을 은혜와 기쁨으로 마치는 인생도 있습니다.  늦게 시작해도 칭찬과 상급으로 끝나는 인생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그만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너는 행복자로다.'  그러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탁합니다.  비교하다가 불행해지기보다는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십시오.  지금은 남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누구 때문에 되고 안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내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는 이 말씀 자체가 은혜요 여기에 절대적 은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 백성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감사하며 일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일을 시킨 것도 감사하고, 일하면서도 감사하며, 일이 끝난 후에 품삯을 받는 것은 덤으로 받는 것처럼 고마워하는 그 사람이 하늘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실, 포도원 주인에게 있어서 어쩌면 품꾼이 전혀 필요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길거리에 주저앉아 방황하고 있을 저들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주인의 마음은 포도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리를 방황하는 심령들에게 있었습니다.  임금을 계산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주인의 관심은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을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은 일을 시키기 위해서 돈을 준 것이 아니라 돈을 주기 위해서 일을 시킨 것입니다.  한 시간 밖에 일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이 사람아, 처자식이 있는데 놀로 있어서야 되겠나?  한 푼이라도 벌어야 살 것이 아니겠는가?"  이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귀합니까?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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