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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평생에 부를 노래 (시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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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다섯 명의 아이를 각기 다른 해의 같은 날에 낳은 사례가 있습니다. 미국<버지니아 주 클린튼우드>에 사는[커밍스 부부]사이에 태어난 오누이들의 생일은 모두가 2월 2일로 같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다섯 오누이의 생일이 일치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177억9757만분의1이라 합니다. 확률이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어떤 사건이나 사상(事象)이 일어날 가능성의 정도. 또는 그런 수치를 말하는데 그것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즉 이 말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계적인 개념을 말합니다. 이 확률은 믿거나 절대적으로 그 확률에 맞추면서 살기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 사람들은 이 확률에 목매고 살아갑니다. 복권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로또복권이 1등에 당첨될 확률은 얼마일까요? 구매자가 1장의 복권을 샀을 때 1등 상금에 당첨될 확률은 1/8,145,060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확률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작가[도스토예프스키]는 아내의 스커트까지 저당 잡히고 감옥 나들이를 한 노름 광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천재로 하여금 그렇게 만든 계기는 16세 때 정거장에서 우연히 복권 한 장 산 것이 그 가공할 수렁에 빠져들게 한 첫걸음이라고 하니 소위 대박의 꿈이 그를 이렇게 만들고 말았습니다.[오 헨리]의 단편소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궁색한 삶을 살던 어떤 사람이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쓰고 싶은 대로 돈을 써댔는데 그렇게 한 달 지나고 보니까 더 이상 돈을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리고는 엄습하는 허망함을 견디다 못해“돈이 충족시킬 수 있는 분량은 전 인생사의 12분의 1에 불과하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바라는 것들이 다양합니다. 복권 외에도 운이 좋아야 한다고 해서 점을 보고 그 운을 기다리며 삽니다. 횡재수라는 말을 쓰면서 일확천금을 노리기도 합니다. 도박을 합니다. 세계적으로 도박의 역사는 깊다고 봅니다. 우리민족도 예로부터 도박을 즐기고 우연을 통하여 이익을 얻고 사행심 속에 살던 민족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말에 속임수 쓰는 것을<야바위 짓>이라 하고, 훼방 놓는 일을<산통 깬다>하며, 도망치는 것을<삼십육계>라 하는데 이 말들이 모두 노름에서 나온 말들이라고 합니다.<야바위>는 속임수로 돈을 따는 중국 노름의 하나로써 팽이가 돌다가 쓰러지면서 나온 번호를 미리 맞히면 다섯 곱의 돈을 따도록 해 주는 노름이었습니다. <산통(算筒)>도 장님이 점을 칠 때 쓰는 숫자를 헤아리는 막대기를 넣은 통이며,<삼십육계(三十六計)>는 물주가 맞힌 사람에게 서른여섯 배를 주는 노름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자주 속이고 깨고 도망쳤기에 노름용어가 망신의 속된 말로 정착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옛날이야기만이 아닙니다. 한 때 대학가에 주로 성행했던 사주카페나 점술이 지금 극장가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극장이 수익차원에서 자리를 임대해주고 한번에 3,000원씩 하는 점술이나 사주를 보는 카페가 극장마다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라고 합니다. 영화 상영시간을 기다리는 젊은이들과 성인들이 오락실이나 카페에 가듯이 자연스럽게 휩쓸리고 있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의 한 모퉁이에는 바랄 볼 소망이 없어 요행만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더 가지기 위해 남을 속여야만 하는 일들로 냄새나는 곳들이 얼마나 즐비한지 모릅니다. 운 좋은 운명에 인생을 맡겨서 그것이나마 믿고 살겠다는 어리석은 군상들이 아직도 곳곳에 숨어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합니다. 그 삶의 질과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주목합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이 세상을 깨웁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11일자 국민일보를 보니까 어떤 단체에서 조사를 한 내용이 실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입니다. 가장 많은 질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무언가 달라야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예수를 믿는 우리가 믿지 않는 자기들과는 무언가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을 통해서 이런 삶을 깨우쳐 주는 다윗의 지혜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인식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며 사는 법이었습니다.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1,2절), 영혼을 소생 시키시는 하나님(3절), 보호 하시는 하나님(4절), 그리고 빈 잔을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5절)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 사랑 가운데 있으며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편23편을 마감하면서 은혜를 누리는 자가 불러야 할 평생의 노래를 배웁니다. 이 노래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이 노래가 삶의 방식을 바꿔줍니다. 이 노래가 우린 인생의 마땅한 노래입니다. 어떤 노래입니까? 본문 6절입니다.“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것이 감사의 노래입니다. 감격의 노래입니다. 승리자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한 것의 반대는 악한 것입니다.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악한 일들이 벌어집니까? 다윗도 이런 악한 일들을 경험해 왔습니다. 사울왕의 질투와 시기, 신하들의 배신, 심지어는 아들의 배신...그러나 돌이켜 보면 이 모든 악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선한 일들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이란 궁극적으로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선을 내가 바꾸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뜻을 내가 고치려 든다면 이 보다 오만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감사 할일입니다. 언제까지 감사하면 됩니까? 오늘 다윗은 그의 고백을 통해“나의 평생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내 인생의 모든 날에 ”라는 말입니다.“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제껏 살았던 모든 날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야 할 모든 날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른다고 고백하는 이 노래보다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노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에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선하신 하나님이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대체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삽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자하는 마음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내가 좋아 하는 것은 잘못 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내가 좋아 시작했던 그것이 악으로 바뀔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믿고 행하는 선(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가지신 선하심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온전합니다. 완전합니다. 그 선하심이 내 인생의 삶 속에 언제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정말 힘이 들 때는 누구든지 내가 나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여기까지가 내 한계이구나. 나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이구나. 소망도 없고 재생의 여지도 없는 쓰레기더미에 지나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에 자신을 버리고 싶은 절망 속에 빠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리할 때라도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게 이런 노래가 필요하다고 합니다.“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입니다. 운동장에서 하는 평가는 그가 얼마나 운동을 잘 하는가 입니다. 사업가에 대한 평가는 그가 얼마나 돈을 잘 벌었는가 입니다. 학자라면 얼마나 훌륭한 논문을 남겼는가가 중요한 평가의 가늠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평가하실 때 그 평가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엄숙하게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평가를 보십시오. 성전에서 부자들이 은전을 쏟아 부으면서 헌금을 했습니다. 많은 군중들은 그 은전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가에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관심은 달랐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 헌금을 낸다는 것이 부끄러워 숨기면서 마음의 전부를 바쳤던 과부의 엽전 두 닢을 보시면서 정말 헌금이란 이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평가도 중요합니다만 정말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평가를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하다 하십니다. 선한 것이 없는 우리들인데 고쳐서라도 선하게 하시며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 평생을 따라다니게 하십니다. 잘못 되는 것들은 바꿔 주시며, 악한 것들은 선한 것들로 바꾸어주시며, 약한 것들로 강하게 하시며, 위험한 것은 피하게 하시면서 마침내 우리가 바라던 결승점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다윗이 오늘 노래합니다.“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이 땅에서의 생명이 있는 동안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라도 부를 영원한 노래입니다.

참 가슴 아픈 소리를 듣습니다. 지금 교인들은 교회를 옮겨 다니는 것을 헬스클럽 회원권 바꾸는 것보다도 쉽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아이들 학원을 결정할 때에도 앞집 아줌마 뒷집 애들에게 수소문을 해보고, 그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심지어는 직접 가서 수업을 참관한 후 수강료를 내고 학원을 보내는 사람들이 교회를 옮기는 것에는 대수롭지 않게 아주 쉽게 생각합니다. 그 기준도 너무 이기적입니다.‘지하실 교회는 공기가 좋지 않아서 기관지를 버릴까봐 안 좋고, 상가 교회는 곧 건축헌금을 할 것 같아서 안 좋고, 교인들이 적은 교회는 목회자와 구역장이 자주 집을 찾아 올 것 같아서 싫고, 큰 교회는 너무 가족적인 분위기가 아니라서 마음에 안 내키고, 말씀이 은혜로운 교회는 집에서 멀어서 갈 수 없고...’전부가 이기적이고 다양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사랑하는 교회가 있어야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곧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앉은 이 교회가 우리가 영원히 거할 하나님의 전인 줄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평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리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시편84:10-11에는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그리고 오늘 다윗의 노래가 있습니다.“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이것이 여러분들이 또한 평생에 부를 영원한 노래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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