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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를 기뻐하리이다 (시 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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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주일에 시편 5편 첫 부분을 “주를 경배 하리이다”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시편 5편 후반부를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8절이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간구라면 9절과 10절은 공의의 시행을 호소하는 공적인 간구입니다. 11절과 12절은 새로운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면, 이제 후반부 첫 부분을 살펴봅시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시인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부름으로써 간구를 시작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힘을 얻습니다. “당신은 나의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나는 당신의 언약의 백성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이 기도의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시인은 “여호와여!”라고 부름으로써 기도를 시작한다면, 신약 성도들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기도를 끝맺습니다. 기도는 아무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간구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불변하는 성도들의 소원입니다. 특히 어려움 속에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할 때 아뢰는 소원입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의 인도함을 받듯이, 소경이 그 친구의 인도를 받듯이 성도는 언약의 하나님의 인도를 갈구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안전하고 즐거운 길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그 길을 찬송합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만약 하나님이 그 언약에 신실한 백성들을 인도하기에 실패한다면 원수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조롱할 빌미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주의 의로 자신을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그 목전에 곧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시인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주의 의’를 따라서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는 동시에 ‘나의 길’이 아니라 ‘주의 길’을 곧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기도의 요점입니다.

우리가 호소할 근거는 나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입니다. 나의 의는 불완전하지만 주님의 의는 완벽합니다. 의의 근본이신 주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이 기도의 핵심입니다. 시인은 또한 ‘나의 길’ 대신에 ‘주의 길’을 곧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뜻을 관철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뜻을 포기하는 것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소원하는 사람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주님이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의 일을 분명히 보는 것은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허물과 죄의 골짜기에서 헤매길 잘하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성도는 그 삶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그 길을 평탄케 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걷는 길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선택한 길임을 믿을 때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거기 있음을 또한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선택하시는 분인 동시에 우리의 길을 평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상황을 주관하는 분이신 동시에 모든 환경을 타개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렵고 힘든 길도 평탄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그 분의 인도를 받고 그 분의 길로 걷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나의 원수들로 인하여” 라는 구절은 난 하의 주를 보시면 “엎드려 나를 기다리는 자들을 인하여”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당면한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엎드려 숨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의 파멸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인도와 길을 평탄케 해 주시기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곳에서 원수를 만나게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제 후반부의 둘째 부분을 살펴봅시다.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 하나이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좇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 함이니이다.”

먼저,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6절)의 실상을 묘사합니다. 심중의 악한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서 입, 목구멍, 혀가 모두 동원됩니다. 다윗이 당면한 대적의 모습인 동시에 타락한 전 인류의 실상입니다.

바울은 동일한 묘사로써 인류의 타락상을 고발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악한 자의 길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파멸과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어떻게 알 수 있지요?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은혜 입은 자의 특징도 입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의 기쁨은 입술의 찬양으로 감사로 표현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인지 아닌지 자신의 입술을 살펴보십시오. 자신의 혀를 눈여겨보십시오. 신구약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입술을 주의하도록 명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안에 있는 우리의 실상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만나서 하는 말과 돌아 선 후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은 아첨하는 혀를 가진 자입니다. 모였을 때 하는 말과 혼자서 하는 생각이 다르면 신실함이 없는 죄인입니다.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다윗은 9절에서 악한 자를 있는 그대로 고발하고 난 후 10절에서 그들을 향한 선고를 요청합니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 함이니이다.”

우리는 이런 격렬한 간구를 들으면 사람들은 당황해 합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은 악을 수용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기를 바라는 소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와 같은 시인의 요청에 당황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늘 우리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대적들의 죄악이 사탄적임을 알았기에 그 죄가 용서받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악인들의 정죄를 요청합니다. “저희를 정죄하소서.”

의인을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은 죄인을 정죄하십니다. 너무나 당연한 명제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죄 받을 죄인을 사면하고 의롭다해야할 의인을 정죄하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 곳이 여러분과 제가 사는 세상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우리가운데서 사역했던 안주남 전도사님을 기억하실지 모릅니다. 젊은 부부가 서울로 예배하러 오기 위해서 프라이드를 타고 오다가 커브길에서 우유를 싣고 오는 탱크로리와 부딪혀서 프라이드는 나가서 논바닥으로 떨어졌지요. 남편은 즉사하고 의식을 차려보니까 모든 조서는 다 자기들한테 불리하게, 프라이드가 용감하게 중앙선을 침범해서 그 탱크로리를 받은 것으로 되었습니다. 남편이 마지막 그 위기 상황에 부딪힐 때 “아 저 차 왜 저래?”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저쪽 차가 그렇게 했는데. 그래서 간신히 현장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녹음해서 재판장에 증거 자료로 제출했는데 검사가 삼켜버렸어요. 그래서 폐기처분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프라이드가 용감하게 탱크로리를 받은 것처럼 귀결지어지고 3년인지 5년인지 해서 세월이 지난 뒤에 우유회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우유 값 물어내라’고. 우유 값까지 받아내는 큰 회사들의 횡포가 지금도 땅에는 있어요.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데요. 3년이 지나가니까 “목사님 올해는 봄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봄이 참 아름답네요.” 지난 3년 동안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오는지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척박한 삶으로 내몰면서도 우유 값까지 물리는 세상이 이세상인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자신이 그런 억울한 상황에 처해 보지 않으면 시인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시인은 재판자로서,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죄인을 향해 선고합니다.

심판의 제 2 측면을 들어 보십시오. “자기 꾀에 빠지게 하소서.”아히도벨에 대한 다윗의 기도는 놀랍게 응답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에 의해서 모반을 당해서 쫓기는 상황에서 압살롬 편에는 다윗의 심복이었던, 다윗의 전략가였던 아히도벨이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오늘 밤에 지금, 군사 만이천명만 추려서 기습합시다. 그래서 부친 다윗만 목을 베면 이스라엘은 전체가 다 당신에게로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또 다른 전략과 후세를 거기 남겨두었어요. 그러니까 압살롬이 후세에게도 한번 들어보자. 아히도벨이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네 생각이 어떠냐? “이번에는 아히도벨의 생각이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왕의 부친과 그 종자는 다 용사 아닙니까? 지금 곰이 새끼를 뺏긴 것처럼 격분해 있는데 또 당신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이니까 백성들과 들판에 자고 있지 않을 겁니다. 굴에나 다른 곳에 숨어있는데 우리가 기습해서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혹시 우리 쪽에서 몇 사람이 먼저 넘어지기 시작하면 완전히 전세가 역전 될 수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을 다 모아서 밤중에 이슬 내리듯이 덥쳐 버립시다. 성에 들어가 숨어 있으면 밧줄을 가지고 동에서 강으로 끌어 들여 버립시다. 돌덩이 하나 남지 않도록 합시다.” 말의 힘이 대단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아무리 큰 밧줄로도 성을 못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 하니까 그 말이 괜찮아 보이거든요? 그래서 “네 말이 맞겠다”고 포기 했습니다. 아히도벨은 머리가 있는 사람이잖아요.  자신의 앞날을 내다 본 그는 낙향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임금을 파멸시키려 했던 그의 꿈은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꾀에 빠지게 하소서”(시 7:15, 9:15, 35:8).시편을 읽어보면 자주 나오는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그들이 갖고 있는 그 악한 꾀에 스스로 빠져들게 해주십시오.

나아가 마지막 심판 요청을 들어봅시다.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그들의 죄는 이미 산더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모든 죄의 절정을 다음 구절이 보여 줍니다.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그들의 죄의 절정은 하나님을 향한 역모요 반역입니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 응분의 심판을 요청합니다. 시인은 자기 개인적인 원수 갚음을 호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사역에 비우어 심판을 호소합니다.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종, 다윗을 향한 미움은 하나님을 향한 미움입니다. 하나님의 종 다윗을 향한 미움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직면했던 이러한 미움은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동일한 미움이 오늘 우리 시대도 상존하고 있음을 여러분은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다윗의 간구에 ‘아멘’하게 될 것입니다. “저희가 주를 배역 함이니이다.”그 증오의 본질이 우리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 이름을 두신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기를 밤낮으로 사모하는 자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그 과부의 기도, 밤낮없이 부르짖는 과부의 모습 그것이 여러분과 저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을 목도하고자 하는 열심이 우리에게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악이 판을 치더라도 신경 끊고 당장 내 입에 들어오는 것과 관계가 없으면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 더 악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인의 신앙고백을 들어봅시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 하시리이다.”

여기, 앞에서 언급된 사람들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귀히 여기는 무리들입니다. 그들을 일컬어 성경은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는 이들입니다. 하나님과 진실된 교제를 경함하는 이들입니다.

아직 어려움이 모두 사라진 것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께 피하는 상황이고 하나님이 방패로 호위하심을 바라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더 이상 홀로 싸우지 않습니다. 이제 동료성도들과 더불어 서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홀로 기도의 씨름을 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일단의 성도들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

하나님을 아는 성도들이 누리는 특권이 기쁨입니다. 악인이 멸망 받을 때, 성도의 기쁨은 충만할 것입니다. 지금 웃는 자들이 그때 영원히 울 것입니다. 지금 우는 자들이 그때 영원토록 기뻐 외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습니까? 희희낙낙하며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세워지기를 바라는 거룩한 소원이 있는 자들은 그날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기쁨의 샘이 솟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쁨이 원천이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그 분으로 기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기에 우리는 그 분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에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

그로 인해서 평안과 풍성한 삶을 누리기에 영영히 기뻐 외치는 무리들이 성도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모이면 주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찬송하는 것은 분위기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예배 순서에 찬송이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서 입니다. 어젯밤에 성가합창제에 가신 분들 있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정말 한 시간이 넘도록 시간이 진행 되는데도 마치는 시간 생각하지 않고 교회마다 나와서 찬송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우리가 하는 것을 다 흉내 내는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름성경학교 하면 그쪽에서는 여름 불교 학교 하고 우리가 찬송가 가지고 있으니까 찬불가 만들고 우리가 연합 성가 찬양제 하니까 그곳에서도 합창제를 한다고 그러고 이게 우리 고유 아이템인데 자꾸 표절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겉모양은 흉내 낼 수 있지만 핵심은 가져갈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쪽 동네에서는 적선을 해야 극락에 간다고 그러잖아요. 적선을 하고 적선을 하고 적선을 해야 되는데 잘 생각해 보면 적선하는 속도 보다는 악을 행하고 악을 행하고 악을 행하는 게 더 빠르다니까요. 시각적으로 가까워지지 위쪽으로 안 가까워집니다. 그런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기쁜 노래가 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장차 받을 구원을 생각하고 지금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받은 구원 때문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성도들의 특권이고 합창은 우리 고유 브랜드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여호와는 그 백성을 축복의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아무도 그 축복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그의 충만한 능력으로 우리들에게 복주십니다. 그의 모든 속성이 복 주심에 하나 되고 복 주심을 기뻐합니다.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리이다.”우리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오늘 맛볼 뿐 아니라 우리는 그 축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약속은 무한한 미래에 까지 유효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의 생각이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만 누리다 끝나는 게 아니라 영원한 축복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는 마지막 기도를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습니까? “성자 예수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주의 백성에게 있을 지어다”라고 축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 사람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하였다함과 같으니라. 어떤 사람도 상상하지 못해본 축복을 여러분과 제가 받을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탁월한 이미지네이션이 미치지 못한 영역에 있는 그 축복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기뻐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이 본 적이 없고 사람의 귀가 들은 적이 없고 사람의 상상이 미친적이 없는 그 축복을 주시겠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축복을 말하면서도 의외로 성경은 천국에 대해서 거의 기록해 놓지 않고 있습니다. “정금바다와 같고” 뭐 이런 표현이지 어떻게 설명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축복의 대상인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가득해서 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신 33:29). 이스라엘이여 너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처럼 복 받은 사람이 누구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임시방편으로 예배처소를 바꿨는데 여기가 이렇게 잘 들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궁여지책으로 나왔는데 더 좋아졌어요. 그렇죠? 그러고 말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네요 “목사님 리모델링 되어도 여기서 예배드리면 어떨까요?” 그러네요. 돈 들여놨는데 안하면 아깝잖아요? 그래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1부, 2부는 거기서 보고 3부는 여기서 드리면 어떨까? 그러면 2부 3부 주차장 복잡한데 면하고 그렇게 하면 3부를 좀 당겨서 11시 반에 여기서 예배드려도 됩니다. 그렇죠? 저만 오면 되니까. 내가 차를 저쪽 가서 주차하고 오라고 아무리 말해도 여러분이 안 들으니까 결국은 제가 오는 수 밖에 없겠네요. 그래서 11시 반에 여기서 3부 예배 드리면 12시 반쯤 끝나면 집에 가서 점심 먹을 수 있으면 너무 좋잖아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 옛날에는 로켓포도 없었고 비행기도 없어서 높은 쪽을 장악하는 사람이 싸움에 유리했던 것입니다. 네 원수의 높은 곳을 장악하리라.

다윗은 여기서 동일한 심정으로 마지막 축원을 발합니다.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로다.”본문에 나오는 방패는 조그만 손방패가 아닙니다. 신체를 모두 보호할 수 있는 큰 방패를 의미합니다. 옛날에 로마 군인들이 가지고 있던 방패들, 앞줄은 앞줄대로 다 채우고 그 다음 사람은 위로 덮고 그러면 철갑을 두른 듯이 진전해 가는 것을 영화 같은데서 본 적이 없어요? 신체를 전부 보호할 수 있는 방패를 여기서 말합니다.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 하시리이다.

여러분의 발이 세상을 딛고 서 있는 한 여러분의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있습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싸워보십시오. 진리의 허리띠를 띠십시오. 의의 흉배를 하시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으십시오. 믿음의 방패를 가지시고 구원의 투구를 쓰십시오. 그리고 손에는 성령의 검을 가지십시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이 땅에 있는 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신갑주를 허락하셨습니다.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 하시리이다.” “호위 하시리로다” 라는 마지막 단어를 살펴봅시다. 같은 단어가 다시, 한번 삼상 23:26에 나옵니다.

“사울이 산 이편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편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며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사울의 군사가 다윗을 에워싸듯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호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만이 아니라 다윗의 축복의 대상인 여러분과 저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원수의 에워쌈 속에 사는 것 같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포위된 자들입니다.

아람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런데 백전백패입니다. 아무래도 정보를 누군가 전달하는 사람이 있다. 왕이 화를 냈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 짓을 하는데 나한테 아직 고발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참모들이 왕이여 그런게 아닙니다. 우리 중에 누가 변절한 사람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국보 제1호 엘리사가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왕의 침실에서 속삭이는 소리까지도 다 알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공적1호로 삼아서 수소문 해보니까 도단성에 있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밤중에 군대를 보내서 도단성을 완전히 포위를 해버렸습니다. 새벽에 일어난 엘리사의 종이 보니까 완전 위기 상화이거든요. 선생님한테 가서 급히 보고를 했습니다. 그리하지 말아라 우리와 함께하는 자가 저희와 함께하는 자보다 더 많으니라.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 주십시오.”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히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복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은혜로 포위된 자들이 성도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가 할 고백이 무엇입니까?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서로가 축복해 줄 말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하나님의 구원을 너같이 받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 이시로다.”

울산교회 성도들이여 여러분들은 복 받은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주시는 복을 여러분들처럼 받은 자가 누구뇨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늘도 우리는 복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기쁨을 간직하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기쁨을 새롭게 하며 살아가십시오. 기쁨과 즐거움으로 찬양하며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축복은 다함없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은혜는 벗어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대상이 된 자신을 보면서 함께 그 은혜를 베푸신 주님을 영원히 기뻐합시다. 아멘. (정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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