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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시 116: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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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는 지난 주간에 가을 대성회를 은혜롭게 가졌습니다. 강사님을 통해서 열정을 회복하라는 강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교회 부흥, 꿈에도 소원은 교회부흥, 교회부흥, 교회부흥, 교회부흥 아멘, 주여 우리교회 부흥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구호를 외쳤습니다. 교회가 부흥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교회가 부흥하면 간증자가 나오고, 성공자가 나오고, 축복자가 나온다 . . 등.
많이 기도했고, 풍성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는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은혜를 보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제 이 은혜를 잘 간직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심정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은혜를 잊는 것은 짐승과 같다.

요즘 우리 시대는 은혜를 잊고 사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뻔뻔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잊고 부모님을 공경하기는 커녕 부모님을 학대하고 폭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은혜를 돈으로 환산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 아니라 ‘내돈 주고 예수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헌신의 결단은 잘 하면서도 돌아서면 쉽게 포기합니다. 열정도 쉬 사라지고, 작정한 것도 지키지 못합니다. 마음이 잘 변하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고 쏟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받고 변질되지 말아야 합니다.

탈무드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가 아주 많이 와서 범람한 강을 가로지른 외나무 다리를 한 사람이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건너기 전에 밑을 내려다 보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 채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무사히 이 다리를 건너가게 해주신다면 내가 가진 전 재산을 바치겠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힘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는 발을 내딛어 외나무 다리를 건너갑니다. 다리 중간쯤 갔을 때 앞을 보니 이제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 만만하게 보여졌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의 재산의 전부를 드리겠다고 했는데 사실 너무 많습니다. 절반만 드리면 안되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한 후에 조금 더 가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디선가 뿌지직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깜짝놀란 그는 얼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이고, 하나님, 농담도 못합니까? 다 드릴께요" 그리고서는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은 쉽게 변합니다. 눈물 흘리면서 큰 은혜를 받고서도 쉽게 과거로 돌아가기를 잘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명한 이솝 우화의 한 토막입니다.
한 늑대가 저녁을 너무 빨리 먹다가 그만 가시를 삼키고 말았습니다. 늑대는 목에서 따끔거리는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 발버둥을 쳐봅니다. 그러나 목의 가시를 뽑아낼 수가 없는것입니다. 그 때 긴 주둥이를 가진 학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여보게 친구, 자네의 긴 주둥이로 내 목의 가시를 좀 뽑아줄 수 있겠나? 사례는 충분히 하겠네’. 학은 늑대의 입에 긴 주둥이를 집어넣고 목구멍에 걸린 가시를 어렵게 뽑아냈습니다. 늑대는 ‘야! 이제 살겠다. 참 시원하다. 이렇게 좋은걸’ 
그 때 학은 늑대에게 손을 내밀며 말합니다. ‘자, 이제 약속한 사례비를 좀 주시지요’ 그러자 늑대란 놈이 화를 벌컥 냈습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구. 네 머리가 내 입에 들어갔을 때, 깨물어 토막을 내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지. 사례를 내라구?’
늑대는 학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도 감사하지 않으면 배은망덕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배은망덕 보다 더 큰 죄가 있겠습니까? 성도가 감사가 없으면 불신자보다 더 나쁠 수 있습니다.

흔히 욕을 할때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을 합니다. 그러나 개를 키워보신 분들 아시지만 주인은 개를 배신할지 몰라도 개는 주인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한번은 목사님들을 초청해놓고 귀한 분들을 대접하려고 집에서 기르는 누렁이(개)를 산으로 끌고 가서 목을 매어 달아매고 몽둥이로 . . . . 그러든 중 몸집이 큰 누렁이가 몸부림을 치다가 그만 목을 맨 끄나풀이 풀려서 심한 상처로 피를 흘리는 누렁이가 그만 도망을 쳤습니다. 장로님은 허무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 상처 난 누렁이가 먼저 집에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꼬리를 치는 것입니다. 피로 얼룩진 누렁이가 주인의 품에 뛰어듭니다. 장로님은 꼬리 치며 안겨오는 누렁이를 품에 안으면서 통곡 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개보다 못한 놈이구나! ‘하나님 나는 누렁이보다 못한 놈입니다. 개만도 못한 놈입니다. 조그만 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실망하고 화만 내는 내 삶이 개보다 못한 죄인입니다.’ 하면 목놓아 울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시편49:20에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하였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것은 사탄이 좋아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답하는 삶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원망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 향한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

2. 구원의 은혜를 늘 기억하라.

본문은 심각한 위기 상황 속에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의 시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보답하여야 할지를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성도의 중요한 자세인 것입니다.

다윗은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 받은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의 위기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한 질병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운전이나 교통사고의 위험, 그 외에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있을 수 있습니다. 다윗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다고 하면 많이 있다. 그런데 다윗은 감사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믿음의 고백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 왕이 엔게디 황무지 굴에서 죽음에서 죽이지 않고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일이 있습니다. (삼상24:2-6)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또 사울 왕이 악신이 들어 수금으로 물리치는 다윗을 죽이려 할 때가 있었습니다. (삼상19:9-10)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사울 왕이 보내 자객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고 아내 미갈에 은혜를 입어 죽음을 피한 일도 있었습니다. 성벽으로 향한 창문으로 달아 내려서 . . .(삼상19:11-13)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또 압살롬이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반역을 일으켰을 때의 일이 있습니다. 다윗은 고통 중에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의 칼에서 구원해 주셨던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마치도 영화의 주인공 처럼 죽을 위기 때마다 도움의 손길들이 작용했습니다. 먼 훗날 생각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는 다윗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은혜’는 ‘선물’입니다.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은혜로 받았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우리는 간혹 오해를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거져 주셨다는 말씀은 너무 값싼 ‘싸구려’이기 때문에 공짜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이것은 도저히 값으로 계산 할 수 없어서 돈으로도 권세로도 안되기 때문에 거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죄사함을 은혜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을 은혜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질도 은혜로 받았습니다. 성경은 재물 얻을 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신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 .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병들고 영혼이 죽어 영원히 멸망 받을 우리를 살리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셨습니다. 사람들을 통해서 설득도 해보았지만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 선지자를 죽여버렸습니다. 결국 하나뿐인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위에 보내주시고 십자가형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물과 피를 쏟으시면서 고통중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시면서 나와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죽어주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들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마귀의 지배아래 살다가 영원한 진노를 받아야 할 우리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십자가의 보혈로,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된 것입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것은 내 힘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은혜요,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은혜를 가장 잘 기억하는 사람은 지난날의 내가 누구였던가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날의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과거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겸손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님! 나는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사람입니다.”
“내가 제일인 줄 알고 교만하고 거만하여 자신만을 드러내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나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 .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과거의 나는 누구였습니까? 죄 많은 사람아니었습니까?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직분과 직임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다시 한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오늘의 내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본래 바울의 이름은 ‘사울’입니다. 사울의 이름의 뜻은 크다는 뜻입니다. 그의 가문이나, 혈통이나, 학벌이나 종교적 열심으로 보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훌륭한 이력을 지닌, 이름처럼 큰 자였습니다.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 왕족인 베냐민지파, 종교적으로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로서 바리새파 사람,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로마의 시민권, 당시 유명한 석학 가말리엘의 제자, 그러나 지난날들의 모든 자랑거리들을 배설물처럼 미련없이 내어버리고 오직 복음의 길을 걸어갈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다는 뜻의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작다는 의미의 이름인 바울이라고 개명하고 낮은 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의 감격에 빠진 것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 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9-21)고 외치고 있습니다.
다윗이나 바울은 감격에 젖어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내가 구원의 감격에 빠진다는 것 정말 귀한 은혜요 복입니다. 감격이라는 말은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감격하면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감정이 격해지면 폭행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살인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주님의 사랑에 감동받고 감격하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당당하게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다윗처럼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구원의 감격에 젖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 은혜를 받은 자는 구체적인 응답의 삶을 살아야 한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며 했습니다.
감사의 기본은 마음입니다. 다윗은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해 있습니다.
깁슨이라는 사람은 “그대의 마음속에 감사가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셈이다. 그대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싶은 말은 다른 어떤 공부보다도 감사할 줄 아는 방법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고, 현재의 생활 속에서 늘 감사하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의 사람 다윗은 시편119:164-165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일곱번’은 ‘온전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감사를 찾아야 하고 찾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은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구체적으로 하려면 입이 열려야 합니다. 말로써 해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것도 문제지만 마음만 있고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13절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도하에 홍해를 무사히 건너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고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십시오.
말로만해서는 안 됩니다. 감사를 아는 사람은 물질을 아끼지 않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손님 접대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부자가 풍성한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141장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정말 감사를 아는 사람은 몸을 드립니다. 몸을 사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끔 교회에서 어떤 봉사의 일을 해야 할 때 보면 몸을 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에 물 묻을까봐, 옷이 더러워 질까봐 . . .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주신 건강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몸 드려 기꺼이 봉사함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있는 것인 아닙니다만 은혜주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은혜 받은 것을 감사하여, 예배드리는 일에 더욱 열심 참석하고 열정으로 기도하고, 찬양 . . . 선교에 동참하는 것 이런 것들이 은혜를 보답하는 삶인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몸 드려 예배드리는 것은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의 복된 행동입니다. 주신 은혜 보답하는 마음으로 몸을 드려 더욱 감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7절 보면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감사의 물질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있을지라도 말로 잘 표현한다 할지라도 물질의 표현은 가장 귀한 표현입니다. 감사의 마음을 물질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감사의 보답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믿음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큰 믿음의 사람이 크게 바치고 크게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자라고 부족해서 우리의 물질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2:8)라고 하셨습다. 마음이 담기지 않는 몸, 봉사, 물질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다음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해동안 열심히 땀흘려 얻은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입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나의 생명도, 건강도, 가정도 직장, 사업도 . . .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추수 감사절’ 이라고 하면 스트레스부터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헌금 때문에 시험드는 성도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고 인정할 때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지난 성회 때 강사님이 하신 말씀중에 이런 생각이 납니다. 강사님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자기 옆에 항문이 없어서 일년 육개월 동안 밥을 먹어보지 못하고 과일즙을 먹으면서 수술을 받고 있는 환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화장실은 아무나 가나?” “방구는 아무나 끼나?"

우리교회 정의선 집사님은 또 다시 월요일 폐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23번째. 할말이 없습니다. 이젠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 . . 그래도 감사한 것은 수술이 성공적으로 잘 되었답니다. 상처가 다 아물고 회복이 되어도 또 한번의 수술이 남아 있습니다. 다른 쪽 폐 암이 지금도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꺼번에 수술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랍니다. 여러분 감사해야 합니다.
혹시 아직도 감사할 조건을 찾지 못한 성도들이 있다면 깊이 생각하십시오.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다윗의 이런 마음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다윗같은 마음으로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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