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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와 치열하게 싸우는 삶 (막 9: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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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을 넓혀 다른 사람을 관대하게 품을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반면에 오늘 말씀에선 자신의 죄와 관해서는 절대로 관대해선 안됨을 매우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과연 온유하고 부드러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라는 반문이 생길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때로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정신을 바짝 차려 깊이 생각하게 만드십니다. 죄를 가볍게 생각하기 쉬운 안일함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십니다. 얼마 전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에서 신학강좌가 있었습니다. 주제는 '죄와 회개'였는데 부제가 '현대신학에 인기 없는 두 가지 주제'였습니다. 오늘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은 인기 없는 주제와 씨름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여 죄와 치열하게 싸우는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1. 믿는 사람을 죄짓게 하지 말라(42)

예수님은 믿는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사람에 대하여 심각하게 책임을 물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원인제공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죄지은 사람에 대하여 그냥 넘어가시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아담,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하와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원인을 제공한 자에게도 엄중하게 책임을 물으신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엄중함은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짓게 만드는 사람이 치러야할 대가의 심각성에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그 대가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비교할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시면서 그 심각성을 느끼도록 하십니다. 비교사례로 제시한 것은 당시에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범죄자의 목에 맷돌을 매달아서 물에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물 속에서 발버둥쳐보지만 점점 가라앉으면서 물을 어쩔 수 없이 들여 마시면서 숨이 끊겨 가는 고통은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집니다. 물 고문이 그렇게 무서운 고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믿는 자를 죄짓게 만들면 이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죄짓게 되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로부터 면제되지 않습니다.

이런 심각한 경고 앞에서 믿는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바로 앞서 있던 사건도 다시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속 좁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던 낯선 사람에게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말라고 촉구했습니다. 이 때 만일 그 사람이 너무 화가 나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욕을 했다거나 제자들에게 몸싸움이라도 걸어 왔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짓도록 원인제공을 한 셈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상대방을 실컷 화내게 만들어 놓곤 그 사람이 화를 내면 화낸다고 난리를 칩니다. 부부사이가 종종 힘들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입니다. 상대방이 화를 낼 때 혹은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 당장에 대응을 하지 않고 숨을 한번 고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혹시 내가 원인제공을 한 것은 아닐까?' '사람이 대화 중에 제일 화나는 때는 경멸을 당할 때라고 하는데 내가 상대방이 모멸감을 느끼도록 하지는 않았는가?'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부부싸움의 횟수는 아마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벗어버려야 할 편견 중에 하나는 나는 다른 사람을 웬만해선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닐 거라는 착각입니다. 이는 사람이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놓치는 데서 오는 착각입니다. 한국사람들과는 달리 서양사람들에겐 상대방의 나이나 결혼 여부를 물어보는 것은 큰 실례입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이 서양사람들을 당황하고 화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문제도 가만히 보면 처음엔 별것이 아니었는데 나중에 크게 증폭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화 중 상대방의 감정이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그로 하여금 더 큰 죄를 짓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사태가 증폭되기 전에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 다른 형제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일단 죄를 짓게 했으면 죄를 지은 형제를 탓하기에 앞서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또한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죄짓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은 자기들만 죄짓는 것에 대하여 속으로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은근히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고 부추겨서 자신들의 죄에 합류시켜 공범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때론 소외시키고 손해보게 함으로써 압박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직장에서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해 심각한 경고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을 두려워하거나 미워할 것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주면서 그런 죄에 빠지지 않도록 권면 해야 합니다.

2. 죄와 단절하라(43-48)

예수님은 죄와 과감히 단절하라고 강력히 권면하십니다. 죄와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경고하십니다. 죄를 짓게 하는 몸의 지체를 언급합니다. 손, 발 그리고 눈입니다. 모두 훌륭한 몸의 기관들입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기관으로 죄도 많이 질 수 있죠. 과학이 발전하면서 죄질 수 있는 길도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얼마 전 손에 의한 컴퓨터 조작으로 다른 사람의 예금 수천만 원을 간단히 빼 간 사건이 있었지요?

이렇게 죄를 짓게 만드는 손과 발은 찍어 버리고 눈은 빼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만일 가만 놔두고 계속 죄를 지으면 삶이 심각한 결말을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던져집니다. 지옥은 신약성경원어인 헬라어로 '게헨나'라고 하는 데 구약의 '게 힌놈' 즉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 우상숭배하면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곳입니다(렘 7:31). 요시아 왕의 개혁운동 이후 쓰레기 퇴적장이 되었습니다(왕하 23:10). 심판장소에 대한 비유로 적절한 곳입니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예수님은 자세히 설명해주진 않습니다. 다만 지옥에 들어온 이들을 파먹는 구더기가 죽지 않고, 그들을 태우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경고하십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상징적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옥은 이 세상의 어떤 경험으로도 묘사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의 장소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죄짓는 지체를 제거하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건장한 몸으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제 3의 길은 없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고집스러워서 때론 이런 경고가 없다면 죄의 달콤한 유혹을 결코 뿌리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낮은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의 친절한 경고를 수준이하라고 무시해선 안됩니다. 겸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때론 인자하신 하나님이 설마 그렇게까지 심판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자함을 보여주시지만 동시에 거룩하셔서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성경은 명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는 것은 인간을 경멸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책임을 지닌 위대한 존재로 대우하시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자녀가 아무리 악을 행해도 전혀 야단치지 않는다면 그를 더 이상 자녀로 여기지 않고 낯선 아이로 대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홀히 여기지 않고 경외심을 갖고 받아들여 떨리는 마음으로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죄짓는 몸의 일부를 제거하란 말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죄로부터 떠나라는 뜻입니다. 죄와 치열하게 싸워 죄와 단절하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싸우는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찬송가 499장의 가사처럼 장미 꽃 위에 이슬이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들려오는 주님의 달콤한 음성을 들으며 그의 사랑에 흠뻑 빠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때론 용맹스러운 전사(戰士)가 되어 죄와 대면하여 피 흘리는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성령님과 사랑으로 교통하시면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행복함을 누리며 사셨습니다. 하지만 때론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때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면서 죄와 무섭게 싸우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고통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더 치열하게 죄와 싸울 것을 권면합니다(히브리서 12;2-4):
 
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죄와 싸우는 삶을 율법주의나 행위구원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믿음으로 은혜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은 죄와 싸울 때 자기 힘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힘으로 싸웁니다. 또한 아무리 죄와 싸워 이기는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거나 구원을 받는다고 착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은혜와 믿음으로 의로워진 그래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죄와 싸울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실패하여 죄를 짖고 회개하면 언제든지 다시 영접하시고 용서해주십니다. 우리를 격려해서 죄와 싸워야하는 세상으로 다시 보내십니다. 요즘 한국축구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는 박지성 선수와 세계적 축구감독으로 그 자리를 굳힌 히딩크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를 생각하면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스페인전이었죠? 박지성이 가슴으로 볼을 트래핑해서 발로 강하게 차 넣어 골대 그물을 흔들었습니다. 그 순간 박지성은 히딩크에 달려가 펄쩍 뛰어 그 가슴에 안깁니다. 히딩크는 박지성을 강훈련시켜 운동장으로 보냅니다. 박지성은 사력을 다해 뛰면서 골을 넣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강하게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떠밀어 보내십니다. 골은 감독이 아닌 축구선수가 넣는 것인 것처럼, 죄와 싸워서 이겨야하는 이는 바로 그리스도인 자신입니다.

죄와 우리가 싸워야 합니다. 바울이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밝힌 것처럼 싸우지 않고 굴복하면 죄의 종이 되는 것이고 싸워 이기면 의의 종이 됩니다(롬 6:12-16, 19). 목욕탕에 가면 떼를 밀어주는 서비스가 있지요. 떼를 밀어주면 참 편하고 좋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선 우리에게 스스로 떼를 밀 수 있는 의지와 에너지를 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떼를 직접 밀어야 합니다. 떼미는 침대 위에 아직도 안일하게 누워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힘을 따라 자신의 죄의 떼를 벗겨내시기 바랍니다. 실패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주님은 언제라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 힘을 불어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을 갖고 죄와 싸우시기 바랍니다.

3. 연단을 잘 받아라(49)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해석하기 난해한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란 것을 볼 때 지옥불에 이미 던져진 사람으로보단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불은 지옥불이 아니라 연단의 불을 의미합니다. 금광석은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 집니다. 불을 통과해야 순금이 불필요한 돌과 흙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용광로를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되기 어려운 죄들이 있습니다. 우리 실존에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죄가 있지요.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시련을 보냅니다. 그 불시련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원망도 하지만 결국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게 됩니다. 그 뼈아픈 경험을 치르면서 죄의 무서운 힘으로부터 해방되는 희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것을 아시지만 우리를 소금에 저리듯 불에 푹 저리십니다. 우리는 불에 저려지는 동안에 낙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이젠 나를 버리셨는 모양이구나 생각하며 좌절하게 됩니다.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불에 저려지는 동안 낙심하지 않도록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임을 잘 설명해줍니다(히 12:5-13). 자식을 연단하지 않는 아버지는 진정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걸어가면 훈련시키십니다. 분풀이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잠시 동안 자기들의 생각대로 우리를 징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징계하십니다'(히 12:10).

우리가 회개하고 믿으면서 불시련을 통과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죄를 이겨내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더욱 닮아가게 됩니다. 자기만의 유익을 좇던 삶을 청산하고 진정으로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구하고 평화를 만들어 가는 위대한 삶에 동참하게 됩니다. 혹시 불에 저려지고 있는 분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십시오. 참아내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주님이 걸어가라 하신 길을 힘을 내어서 걸어가십시오.

4. 소금을 마음에 두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50)

예수님은 제자들 안에 있는 소금이 맛을 잃은 것을 보셨습니다. 소금으로 배추를 저리면 거센 잎들이 부드러워집니다. 강한 자아가 소금으로 저려지면 온유하고 부드러워집니다. 그러나 소금이 그 맛을 잃어 제자들의 이기적인 자아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어언 3년이나 제자훈련을 받아 왔지만 경건으로 가장된 권력을 향한 욕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하여 서로 화목할 수 없었습니다. 방금 전까지도 서로 '누가 크냐'고 싸웠습니다. 예수님이 건설하실 하나님나라에서 각자 자기가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우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맛을 잃지 않은 소금을 가슴 깊이 두어 서로 화목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소금은 성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에 사로잡히면 자기를 비우게 되고 다른 사람을 내 가슴에 담아 화목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지난 주간에 최병성 목사님의 「새벽이슬」사진전을 감상하는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참으로 작은 새벽이슬의 아름다운 세계를 사진으로 담아냈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작은 이슬 안에 주변 세상이 다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 작가의 시골집 그리고 심지어는 얼어붙어 눈이 쌓여 있는 강 그리고 그 강 위를 거닐은 사진작가의 발자국까지 담아내었습니다. 작가의 설명이 은혜로웠습니다. 이슬은 자기가 없고 투명하기 때문에 주변의 아름다운 것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슬을 보며 '내 안에 가득한 너'를 발견하고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소금을 우리 가슴에 두어 이렇게 자기를 비워 다른 사람을 용납하여 화목하는 축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맺음말)

예수님은 죄와 치열하게 싸우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삶을 청산합시다. 어떤 고통을 치르고라도 죄와 단절합시다. 하나님의 불시련을 잘 감당합시다. 소금을 가슴에 두고 자기를 비워 새벽이슬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갑시다. (박득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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