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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가지 부족한 것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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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목적지를 정해놓고 그 길을 절박하게 찾는 것은 참 소중한 일입니다. 그런데 실컷 노력해 그 길의 코앞까지 왔다가 돌아선다면 얼마나 불행하고 답답한 노릇입니까? 이런 일이 우리 신앙생활에 종종 일어납니다. 성실한 신앙생활의 과정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 입구까지 이릅니다. 그런데 막상 그 길에 첫 걸음을 내디디지는 못합니다. 슬픈 마음으로 돌아섭니다. 그 길이 자기 생각과 다를 뿐 아니라 너무 힘들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한 구도자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 슬픈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꼭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고 그리로 걸어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 영생의 길을 절박하게 찾았습니다(17)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사역을 마무리하시고 다시 여행길에 오르실 때였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로 달려오더니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달려올 정도로 그의 마음은 절박했으며 간절했습니다. 무릎을 꿇을 정도로 겸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그 동안 마음 깊은 곳에 품었던 질문을 던집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찾는 구도자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단순히 끝없이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대로 무한히 산다면 그렇게 좋은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생명은 죄의 유혹 앞에 쉽게 무너지고 육체적 고통을 시시 때때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도자는 생명이란 말에 헬라어로 조에(zoe)를 사용했는 데 이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육신의 생물학적 생명을 말하는 바이오스(bios)와는 대조가 되는 단어입니다. 조에란 육신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 즉 하나님이 새롭게 부어주시는 생명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다른 차원의 삶을 영원히 살고 싶었습니다.

이 구도자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강한 도전이 되는 인물입니다. 물론 현대인들에게도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웰빙이란 단어가 이를 잘 대변해줍니다. 그러나 웰빙 역시 현실을 조금 개선한 삶일 뿐이지 현실을 초월하는 새로운 삶 즉 조에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현대인이 빠져 있는 함정은 소비주의입니다. 현대과학문명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상품과 문화를 최대한 누리고 싶어합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돈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경제력 확보에 모든 것을 겁니다. 영원한 생명이 비집고 들어갈 마음의 틈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분위기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는 삶을 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속사람은 질식사를 당하기 일수입니다. 오늘 이 구도자를 통해서 강한 도전을 받아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얼마 전 친구와 함께 무당벌레를 보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친구가 무당벌레를 손등에 놓은 다음에 손을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락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다음엔 날개를 펴더니 날더라고요. 다시 손등에 떨어집니다. 다시 올라갑니다. 몇 번을 그러더니 지쳐서 날개를 펴지 못합니다. 그리고 손가락 꼭대기에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절대로 손가락 아래로 다시는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너무 세상 밑으로 내려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높은 곳을 향하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등지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천덕 신부님이 말씀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늘에서도 살고 땅에서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땅에서 제대로 살려면 먼저 하늘에 사는 법을 잘 배워야 하지요.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면 저 높은 곳에 올라가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배고픈 마음을 다시 찾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을 찾기 위해 예수님께 달려갑시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영생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조릅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구도자는 예수님께 달려와 간절한 심정으로 물었지만 그 길을 찾지 못하고 슬프게 돌아섭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2. 자신도 선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18)

예수님은 그 구도자가 자신을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이는 예수님이 선한 분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 자신이 율법을 계시하신 하나님 자신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아 신성모독죄를 범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막 2:7).

예수님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구도자의 의식세계수준으로 내려갑니다. 이 구도자는 예수님을 선하신 선생님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처럼 위대해지면 선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을 잘 배워서 자신도 그렇게 선한 인물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를 이런 꿈에서 깨어나게 만듭니다. 선함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선해질 수 있으리라는 꿈을 깨라는 것이죠.

영생을 얻고자 할 때 이점을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선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코 선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진정으로 선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이 악한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도를 많이 닦고 나서 자신이 이젠 선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도를 잘못 닦은 사람입니다. C. 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사람이 선해질수록 악을 더 깊이 깨닫고 악해질수록 둔해져서 악을 보지 못한다'고 갈파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은 율법에 비추어볼 때 흠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빌 3:6).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난 후엔 세월이 지날수록 더 깊이 자신이 죄인의 괴수임을 절절히 깨달았습니다(딤전 1:15). 이는 진실하게 도를 닦는 사람도 어느 정도 경험할 수 있는 바입니다. 그 점에서 이성철 스님의 열반송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깊습니다.

生平欺男女群하니(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彌天罪業過須彌라(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活陷阿鼻恨萬端이여(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一輪吐紅掛碧山이로다(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그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을 틈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참선에 정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이 맑아지면 맑아질수록 그는 더 깊은 차원의 죄를 발견하고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것은 고차원적인 죄를 깊이 발견했지만 용서받았다는 진정한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점이겠죠.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선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서 완전히 해방되길 바랍니다. 그것이 영생에 이르는 첫걸음입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구도자의 문제는 예수님과 대화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더 깊이 드러납니다.

3. 계명을 다 지켰다고 주장했습니다(19-20)

예수님은 그 구도자가 이미 주요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알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여 그에게 다시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예수님이 여기 까지 말씀하자 구도자가 차고 들어왔습니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여기에 이 사람의 영적인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는 진실로 유대교가 강조하는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성실하게 다 지켰습니다. 그의 고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왠지 불안했고 두려웠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는 율법과 자신에 대하여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가장 깊은 뜻은 인간의 죄와 무력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점을 놓쳤습니다. 하여 자기는 율법을 다 지킨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속아있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영생의 기쁨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역설적으로 '과연 내가 온전히 율법을 다 지켰을까'라는 흔들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구도자는 바울과 흡사한 사람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울 역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기 전 까진 자신이 율법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흠이 없다고 착각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율법의 진정한 깊이를 보기 시작하면서 그는 도저히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임을 발견하였습니다(롬 7:7-25). 그 결정적 계기는 '탐내지 말아라'는 계명의 참뜻을 발견함으로써 마련되었습니다. '율법에 "탐내지 말아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롬 7:7b-8a). 그 전까지 그는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란 거짓된 확신 속에 살았습니다.

얼마 전 박종운 변호사님이 「성서한국의 뜻」을 간증을 통해서 풀어나갈 때, 고백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자신이 균형이 잘 잡힌 좋은 그리스도인이요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연을 당한 후 자기를 찬 여자를 죽여버리고 싶은 증오심이 불타오르는 자신을 대면하면서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 들었던 비유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밑바닥은 더러운 찌꺼기로 가득하지만 표면은 감쪽같이 깨끗한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돌을 던지면 침전되어 있던 더러운 찌꺼기가 올라와 물은 곧 더러워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이 돌의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흥미있는 것은 예수님이 십계명의 후반부를 인용하면서 바울이 언급한 마지막 계명 즉 '탐내지 말아라'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 그 구도자가 차고 들어오는 바람에 예수님이 미처 말씀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이 계명까지 언급했다면 그리고 구도자가 진실로 자기에게 정직했다면 감히 다 지켰다고 말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이 구도자처럼 힘든 하나님의 계명은 슬쩍 제켜 놓고 잘 지키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입니다. 그런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한 영생의 길은 열리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구도자로 하여금 껍데기를 벗고 나오도록 그에게 결정타를 던집니다.

4. 한 가지가 부족했습니다(21-22)

예수님은 이 구도자를 무시하거나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눈 여겨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절박한 구도자를 자기기만의 함정에서 건져내 주고 싶으셨습니다. 하여 참으로 중요한 요청을 하십니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예수님은 딱 한 가지를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는 에베레스트 산보다도 더 높아 인간으로선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산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매력적인 존재가 바로 재산 아닙니까? 재산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에 있어서 하나님을 필적할 만한 유일한 세력으로 맘몬을 꼽았겠습니까(마 6: 24)? 더더구나 이 구도자는 부자였으니 이 요청은 그에게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겠습니까?

하여 이 요청을 듣는 순간 구도자의 안색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까지 자신에 찼던 그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습니다. 상기되었던 그의 마음은 슬픔에 잠기었습니다. 그는 그 요청 앞에서 번민했겠죠. 선택의 기로에서 머뭇거렸겠죠. 그는 결국 예수님을 등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재산을 지켰습니다. 아마 여러 가지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너무 자기 중심적이다. 균형감각을 상실했다. 극단적 금욕주의다...'라고 말입니다.

그에게 한 가지가 부족했습니다. 그 한가지에는 두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영생의 길을 자기 능력의 한계 내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 좀더 선해질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이런 망상에서 깨어나길 원하셨습니다. 하여 그의 노력의 한계를 훌쩍 뛰어 넘는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연설명하시면서 사실 부자가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 나눠주고 영생의 길에 들어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못박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구도자는 자기의 도덕성과 인격적 능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 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영생의 길을 포기하고 뒤돌아 섰습니다.

예수님이 극단적인 금욕주의자여서 이 한 가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 한 가지를 요청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자기 능력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이 한 가지를 요청하십니다. 영생은 자기 노력으로 쟁취할 수 없음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으려면 교만을 꺾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항복해야 합니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이 요구하시는 한 가지 앞에서 우리는 다 이렇게 항복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둘째로 그는 영생과 맘몬을 동시에 거머쥐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찾는 훌륭한 구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맘몬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맘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경고한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마 6: 24).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기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인간에겐 가장 매력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에게 두 가지 본능이 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육체의 다양한 본능을 만족시키고 싶은 욕심입니다.

하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켜준다고 약속하는 거짓 복음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 거짓 복음이 바로 값싼 은혜, 기복신앙, 그리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소위 깨끗한 부자론입니다. 이중 가장 위험한 것이 깨끗한 부자론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다음 주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오늘날 이렇게 혼돈 속에 빠진 이유도 바로 이런 거짓 복음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기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오늘도 이 한 가지를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이 두 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맘몬을 깨끗이 포기하고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맺음말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강물에 빠지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수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오직 수영만이 그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그렇게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항복하여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맘몬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고 가난한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족하면 다른 것이 아무리 화려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놓쳐도 이 한 가지만큼은 놓치지 않는 사람이 꼭 되시길 축원합니다. (박득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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