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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손과 희생으로 하십시오 (마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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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유능한 청년이 결혼했습니다. 위니라는 아리따운 여인을 아내로 맞은 이 젊은이의 하루하루는 꿈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62년, 두 사람은 강제로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국가전복 협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것입니다. 평생토록 감옥에 있어야 할 이 남자와 그 남자를 사랑하는 아내의 그리움은 글로 표현되어 전달되었습니다.
“당신에 대한 생각으로 내 마음은 불타는구려……. 당신의 사랑을 받으며, 당신이 만든 맛있는 음식과 잊을 수 없는 순간들……. 내겐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라오.” 이런 그 남자의 편지에 위니의 마음은 더욱 아프고 저려왔습니다.
1990년 2월, 그 젊은이는 이제 늙은 몸으로 출옥했습니다.

그런데 27년 동안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이 부부는 만나자마자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오매불망 꿈속에서 조차 그리던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27년, 두 사람이 떨어져있던 27년이란 시간 동안에 두 사람의 사고방식이 너무나 달라져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둘은 법정에서 이혼확정판결을 받고 뒤돌아서야만 했습니다.

이 어설픈 사랑의 주인공은 후에 온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입니다.
그렇게 끈질기고 뜨겁게 보이던 사랑이었는데, 막상 가까운 거리가 되어서 부딪히자 그만 접시처럼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부딪힘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의 사이에도 불협화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기준으로 하는 이기적인 생각과 판단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예수님께서 마지막 희생의 길인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을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들도 예수님을 수행하며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가 예수님께 나아와 무엇을 구하였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그들의 어머니는 살로메 혹자는 살로매라 하는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자매지간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과 인척관계라는 것을 내세워서 예수님께 무엇을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뇨?”고 물으셨습니다.
살로메는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렇게 대답합니다. 살로메가 생각하는 주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는 권력 구조로 이루어진 나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제자들 “분히 여겼다.” 제자들 역시 똑같은 생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차마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이 그 어머니를 통해 그 권력의 최고 자리를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니 화가 안 나겠어요?
몇 명씩 몰려서 수군거리며 웅성거렸을 것입니다. 왜 있잖아요? 기분 나쁘면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서 불평하는 거. 현대식으로 생각하면  베드로는 늘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위치였으니까 확실하게 불만을 나타났을 거고. 그래서 베드로에게 붙은 사람이 있을 거고. 어떤 제자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붙어서 그들이 잘됨으로 덕을 좀 보려는 생각도 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이쪽저쪽에서 웅성웅성 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눈치 채셨습니다. 그리고 26-28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막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불교, 천주교와 비교할 때 개신교가 인기를 잃어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목사직을 권력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교회의 직분은 권력적이 아닙니다. 목사는 교인들에게 가르칠 뿐이지 명령하는 것 아닙니다. 장로는 교인들에게 가르칠 뿐이지 역시 명령하는 것 아닙니다. 권사라고 해서 집사들이나 직분이 없는 자들에게 명령하는 것 아닙니다. 교회의 직분은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벽마다 제 기도.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게 하소서. 섬기게 하소서. 사랑과 위로 받기보다 성도들을 사랑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그렇게 기도합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십자가 지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그런데 제자라고 하는 것들이 자기들의 꿈에 부풀어서 권력다툼이나 하고 있으니…….
여러분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책망하시기보다 올바르게 이해시키는 교훈으로 그들을 유익하게 하셨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감정도 배알도 없으시는 분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의 모습을 가르치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6절, 섬기는 자가 되라.
27절, 종이 되라.
그것은 한 마디로 겸손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겸손을 잘 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겸손을 개인의 덕목으로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겸손은, 혼자서 조심스럽게 하는 그런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있어도 있다고 자랑하지 않고, 배워도 배운 척 드러내지 않고, 그러는 것을 겸손이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겸손은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오히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무 자리나 주시는 대로 받는다.”가 아니라, 자기 것조차도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린 그저 교만하지 않는 것을 겸손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 정도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겸손은 곧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종이 되어 남을 주인처럼 모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24에,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셨고, 빌립보거 2:3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라고 하셨습니다.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앉아있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보들이지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뭐가 있겠어요. 겸손해서 돈 안 벌고, 겸손해서 안 배워요? 겸손해서 높은 직위에 올라가는 것도 마다해요? 그게 무슨 겸손이에요?
겸손은 돈이 많은데도 가난한 사람을 섬기는 겁니다. 겸손은 많이 배웠는데도 못 배운 사람들을 섬기는 겁니다. 겸손은 직위가 높은데도 낮은 직위의 사람들을 섬기는 겁니다.

신앙도 그래요.
로마서14:1-3, “믿음이 연약한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판단하셨음이니라.”
왜 겸손해야합니까? 죄 없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 유대인들은 “유법에는 돌로 치라 했는데 어찌할까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처라.”고 하셨습니다.
왜 겸손해야 합니까? 우리는 다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 똑같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도토리 키 재기 일뿐입니다. 잘났어, 못 났어 해도, 50보 100보일 뿐입니다.

올림픽. 달리기 잘해서 금메달 따는 거 보고 우리 아들도 달리기 잘했더라면……. 수영 잘해서 금메달 따는 거 보고 우리 아들도 수영 잘했더라면……. 체조 잘해서 금메달 따는 거 보고 우리 아들도 체조 잘했더라면……. 그렇다고 제 아들이 다 할 수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남이 못하는 것을 내가 잘하는 것 있습니다. 반면에 남이 잘하는 것 내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사람은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누구에게 완벽을 요구할 수 있을까?
달리기 100m 우승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수영도 잘할까요? 금메달 5개 딴 사람이 축구도 잘해요? 완벽할 수 없기에 우리는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서 섬길 줄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모두 물러갔습니다. 아마 현대 같으면 서로 먼저 돌을 던졌을 것입니다. 없는 죄도 만들어 내서 상대를 때려 눕혀야 하니까요. 또 돌을 안 던지면 나도 죄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밖에 안되니까요.

정의는 좋은 겁니다. 정의가 없으면 사회는 엉망될 겁니다. 그러나 정의는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정의라는 명분 때문에 소중한 생명을 잃은 예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람을 살릴 뿐 아니라 세상도 살립니다. 그래서 로마서 13:8에,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빛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옳으냐, 그르냐, 율법으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오히려 희생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따진다면 예수님은 당연히 죽으셔야 합니다. “사람이 감히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랑에 의해서 입니다. 그 사랑이 율법을 완성시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겸손은 스스로의 몸가짐을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희생시키면서까지 남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남을 섬기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힘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사랑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힘으로 세계를 재패하려던 나폴레옹. 생명을 내놓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 예수. 나폴레옹은 헬레나라는 외로운 섬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시면서, “나사렛 예수님은 사랑으로 온 세상을 다스림으로 성공하였으나 나는 패배자이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겸손은 곧 희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하나님의 일을 시작한 세례요한 그에게는 제자들도 있었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대해, “나는 그의 신들매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였습니다. “저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것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었다.
소리는 소리만 있을 뿐 형체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저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예수님을 향해, “저분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다.” 그 말만 남겼고 그 자신은 사라졌습니다.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곧 섬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진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건물을 크게 지은 교회? 교인이 많은 교회? 아닙니다.
세상을 향하여 가장 많이 봉사하고, 가장 많이 희생하며,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가장 많이 지고 가는 교회가 큰 교회인 것입니다.

참 좋은 교회란 겸손히 섬기며 희생하는 교인들이 많은 교회일 것입니다. 성공한 목회는 희생하고 봉사할 줄 아는 겸손한 교인들을 많이 길러내어, 하나님 나라에서 쭉정이가 아니라 알곡 되게 하는 것일 겁니다.
목소리 크다고 지도자 되는 것 아닙니다. 힘이 있다고 지도자 되는 것 아닙니다. 지도자는 남을 섬기며 자신을 희생시킬 줄 알아야 한다.

사회 부조리. 모두 다 힘 있는 사람들이 그 힘으로 뭔가를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힘이라는 것이 안 되는 것 되게 하고, 자기 욕심이나 제기 주장 관철하려고 합니다. 그 힘은 국민을 섬기라고 준 힘 아니던가요? 하물며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왜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말로는 사랑을 외치면서 겸손으로 섬기며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똑같이 돈이나 권력으로 힘자랑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한동안 학교에서 아이들 테스트 할 때 IQ, 즉 머리가 얼마나 좋은가를 검사했습니다. 그래서 IQ가 높으면 칭찬해고 기대했습니다.
요즈음 EQ를 테스트합니다. 소위 감성지수,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제는 것입니다.
슬픈 것 보면 슬퍼할 줄 알아야 하고, 기쁜 것 보면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이 따뜻해서 쉽게 감동받고 쉽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1:16-17, 예수님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러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하셨습니다.
도무지 맹맹한 사람들. 도무지 자기 감정 밖에 모르는 사람들. 야고보의 말씀처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한다는 말이,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면서 그 몸에 쓸 것은 전혀 주지 않는 사람들.
육상선수는 폐기능이 튼튼하고 다리가 발달되어야 합니다. 성악가는 음량 크고 음색이 맑아야 합니다. 무용가는 유연한 몸매를 갖추어야 합니다. 사업가는 경영두뇌가 발달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겸손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1등 신자는 자진해서 섬기면 희생하는 신자이고, 2등 신자는 희생과는 상관없이 자기만 잘 사는 신자이고, 3등 신자는 부정적으로 말하고, 불평 속에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잇몸이 부어서 통증 때문에 고생합니다. 온 몸의 신경이 그곳으로 쏠립니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그렇듯이 돌봄을 받으려는 상태는 병든 상태입니다. 남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굉장한 사람입니다. 배운 것도 있고, 로마 시민권, 히브리민족 등 사회적으로 충분히 갖추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 만나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기적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
즉 그는 약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약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명령 할 수 있지요. 그 당시 사도바울의 말씀이라면 성도들이 어찌 안 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힘으로 명령한 것 없습니다. 그 자신이 강한 자가 되어 약한 자들을 어떻게 해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 약한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며, 그들을 위해 희생하였습니다.
세상의 이치는 그렇습니다. 올라가는 출세 길에는 박수갈채도 있고 꽃다발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지고 내려가는 길에는 조롱과 눈물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바로 그 십자가 지고 내려가는 길이 성공의 길 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 프랜시스. 그의 아버지는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성 프랜시스는 그 아버지의 상속권을 등 돌리고 맨발의 십자로 유럽을 누비고 다니면서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세월이 흐른 오늘에 와서는 당시의 황제나 교황을 존경하고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지만,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며 걸어간 복음 전도자 프랜시스와 그의 삶은 온 인류가 추앙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축복의 보증수표입니다. 그 약속대로 겸손히 섬기며 희생해 보십시오. 어떤 결과가 생기나…….
빌립보서 2:1-4,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낮게 여기고 각각 다른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무슨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낮아질 대로 낮아졌습니다. 6-8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세워주셨다. 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끝내는 높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겸손히 섬기며 죽도록 희생하며 충성하고 살아온 삶의 결론은 “나를 위해 위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해서 남을 섬기는 것, 어떻게 보면 바보 같지요?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 어떻게 보면 멍청한 것 같지요?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면,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 위해 희생하면, 하늘의 상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여러분의 섬김과 희생은 오히려 엄청난 은혜와 복으로 돌아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겸손과 이 희생으로 여러분의 신앙이 여러분의 삶이 승리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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