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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는 자여 어찜이뇨? (욘 1: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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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는 자여 어찜이뇨?
본문- 요나 1: 4- 6
설교 - 황요한 목사

우리의 인생에는 우리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 있게 마련입니다. 또한 짐작하기도 어러울 만큼의 엄청난 위기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큰 배가 깨어질 정도의 엄청난 폭풍을 만나면서 위기에 처한 네 종류의 사람들을 통해 요나서가 주는 은혜와 깨달음을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는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로 내리셨다는 4절의 기록을 근거로 볼 때, 지금 이 상황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삶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적 전제가 없이는 이 말씀을 통한 은혜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셨다..."

큰 폭풍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여러분들 기억하시지요? 작년 12월 26일 주일에 인도네시아, 태국, 스리랑카 등 인도양과 인도차이나 반도지역에서 쓰나미라고 하는 엄청난 해일이 일어나서 무려 22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하루 아침에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늘 지중해를 운행했던 선원이나 선장에게 있어서도 이렇게 큰 폭풍은 만나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주인공은 5절에 등장하는 사공입니다. 사공은 그야말로 먼 항해에 꼭 필요한 전문가입니다. 배를 운행하는데 있어서 이들의 전문적인 경험과 기술은 탁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지금 상황으로서는 그들이 가졌던 경험과 기술로도 감당을 할 수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하게 되는데, 하나는 종교적인 방법으로서 자기들이 믿는 신을 부르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물건들을 바다로 내어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기업을 하는 이들의 최고선은 이윤을 남기는 것입니다. 상업이든, 농업이든 어떠한 종류의 사업이라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지중해를 오가는 큰 배를 이용하여 국제무역을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경제활동은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큰 폭풍을 만난 지금의 상황에서는 경제적인 목적이나 이유도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생활속에서는 경제적인 이유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심지어는 신앙생활까지도 좌우할 때가 있습니다.‘집사님 어떻게 주일날 못 나왔어요?’라고 불으면 ‘주일날 출근 때문에 예배 참석을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지요. 출근 안 하면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니까 경제적인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주일도 빠지고, 때론 신앙생활도 포기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경제적인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성도 중에는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애지중지하던 직장을, 그 분야의 전문가인 나를 최고로 알아주고 대우해 주는 직장을 사표내고 주일을 성수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한 존경스러운 분들도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바로 요나입니다. 그는 배 밑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70인역에는 그가 코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배 위에서는 큰 풍랑을 만나 죽게되었다고 아우성인데 정작 풍랑의 원인을 제공했던 요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선장이었습니다. 그는 이 환란을 해결할 사람은 요나라는 사실을 짐작했습니다. 그런 판단을 한 선장은 배 밑에서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요나를 깨웠습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지금은 잘 때가 아니라 당장 일어나 당신이 믿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서 믿음의 삶을 결단하라는 부끄러운 충고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누구 때문에 이 풍랑이 일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요나는 현실을 외면한 채 숨어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공통적인 특징을 몇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알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허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취시절, 도둑이 방에 들어와서 제가 자고 있는 주변을 다 누비고 다녔는데 저는 몰랐던 거예요. 시계와 구두를 잃어버려 속이 많이 상했는데, 집 주인에게 그런 일을 당했다고 했더니 오히려 깊이 잠든것이 다행이라며, 깼다면 젊은이가 다치지 않았겠느냐며 위로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정말로 깊이 잠든 사람은 의식이 없어 주변에서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나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깊이 잠든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잠 자는 사람을 옆에서 본 적 있습니까? 아무리 예쁜 아내라도 잠자는 모습을 보면 낮에 볼 때 그 예쁜 모습과는 다르지요. 팔자로 떡 이러고 잔다던지, 혹은 어떤 사람은 침을 흘리며 잔다던지, 낮에 그 정갈하고 정숙했던 모습이 아니던지, 그래서 밤에 잘 때는 불을 끄거나 아니면 조명등을 아주 흐리게 해 놓고 자는 것이 바로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자기의 그 험한 모습을 서로가 보여주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의미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깊이 잠든 사람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모릅니다.

세 번째 깊이 잠든 사람의 특징은 시끄럽지요. 코고는 사람 옆에서 잘 수 있습니까? 모임에 가면 코고는 사람들은 자려고 하면 밖을 나가지요. 산책을 한 시간 빙빙 하다가 다른 팀들이 자면 그 때 들어와서 자요. 하지만 그것도 웬만큼 골아야지요. 아주 되게 골면 결국은 다 깨서 고통을 받지요.

잠을 깊이 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어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잠을 깊이 드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이 무엇입니까? 위험을 느끼지 않습니다. 지금 자기 주변에 어떤 위험한 사람들이 지금 움직이고 있는지 지금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의 입장에서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자기의 신을 부르고, 자기의 소중한 물건을 바다에 버리면서 이제는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 치지만 요나는 아랑곳 하지 않아요.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태평할 수 밖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모르면 용감하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기 때문에 평안한 것입니다. 평안한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우리의 심령이 죽어가는 지도 모르고, 자기의 영혼이 죽어가는 지도 모르고 그냥 태평한 것입니다. 그의 영혼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안타까워 하고, 속상해 하고, 어쩔줄 몰라 하지만 본인은 태평한 것입니다. 뭐가 어때서요?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태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태평할 수가 없는 거예요.

6절에 보면 선장이 요나를 찾았습니다. 그래도 선장은 배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나가 저 배 밑에서 코를 골면서 깊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요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요나에게 말합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해라.

지금 믿음의 사람이 오히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서 신앙적 행위를 신앙적인 결단을 요청받고 있어요. 여러분, 종종 가족들 중에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집사요, 권사지만 신앙생활을 데데하게 하면 그렇게 충고하지 않습니까? 믿으려면 똑바로 믿어, 교회 다니려면 똑바로 다녀. 그렇게 충고받지 않습니까?

지금 요나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서 신앙생활 똑바로 하라고, 지금 충고를 받고 있어요. 하나님께 구해야 할 시간에 도대체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이와 같은 메시지를 듣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는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것을 먹고 나서 눈이 밝아져서 그들이 여호와의 낯을 피해서 수풀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합니다. ‘벗었음으로 두려워 숨었나이다.’ ‘누가 너희 벗었음을 고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그 실과를 먹었느냐?’

그 때부터 인간의 간교함이 작용합니다. 당신이 지어준 그 아내, 뱀으로부터 아담은 변명거리를 찾아갑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너는 왜 70점 밖에 못 받았냐고 엄마가 야단치면 엄마 내 짝은 60점 맞았어. 그러면서 피해가는 것처럼 지금 아담은 아내에게, 뱀에게서 끊임없이 변명거리를 제공받고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지금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아담 자신의 정체성을 지금 뒤집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 있을 자리냐? 내가 지금 여기서 낯을 피해서 자는 자여 어찜이뇨?

지금 당신이 여기서 잠을 자고 있어야 할 그런 시간과 장소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명을 받고, 지금 니느웨로 가서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가진 당신이 지금 여기에서 잠을 자고 있어야 할 때인가?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각성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위기가 다가왔을 때 우리가 그 위기를 피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택해 본다고 하는 사실을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에스더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그런 결단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1940년 5월 14일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이 프랑스, 오스트리아, 폴란드 주변을 유럽 대륙을 석권한 후에는 이제 유럽 대륙에 건넌 편에 있는 영국을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이 개발한 장거리 포로, 독일 해안에서 포를 때리면 영국 런던까지 그 포탄이 떨어졌어요. 영국에 남아있는 건물이 없을 정도로 영국 런던 주변은 완전히 폐허가 됐어요. 영국국왕이 윈스턴 처칠 경에게 전시내각을 구성하도록 위임을 했습니다.

당신이 수상과 국방장관을 겸임해서 이 위기의 국가를 좀 맡아 주십시오. 윈스턴 처칠경이 그 위임을 받으면서 하원에서 연설을 이렇게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위대한 일은 피와 눈물과 땀으로 이루어집니다. 피는 용기의 산물이요, 눈물은 정성의 상징이요, 땀은 근면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피를 흘려야 할 때가 있고,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고, 땀을 흘려야 할 때가 있는데, 피를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나라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눈물을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물과 같은 삶을 살 것입니다. 땀을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이 부족한 사람, 제가 바칠 수 있는 것은 피와 눈물과 땀입니다. 이 윈스턴 처칠 경의 연설은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이상으로 유명한 연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5년 3개월동안 위기에 처한 영국을 잘 이끌어내서 결국은 승전국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윈스턴 처칠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위기 속에서 피와 눈물과 땀을 국가를 위해서 바쳤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살아있는 신앙이, 여러분들의 위대한 신앙이 언제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우리의 신앙의 위기가 왔습니다. 우리의 교회의 위기가 왔을 때, 우리의 사회의 위기가 왔을 때 그 때 여러분의 피와 눈물과 땀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시편 146편 3절에 보면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5절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께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 6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하늘과 바다와 땅을 지으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 바다의 풍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위기를 피해가지 마시고, 여러분들의 피와 눈물과 땀으로 주님 앞에 헌신하며 그 위기를 극복하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이 시간 충만함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피와 눈물과 땀이 필요로 할 때에 결단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하옵소서. 배 밑에 깊이 내려가 코를 골며 잠을 자는 요나의 모습에서 일어나게 하옵시고 이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믿음의 능력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믿음은 위기에서 빛을 발하는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은 살아있음은 위기에서 하나님을 살아계심을 증거할 때 인줄 믿습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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