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수감사]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자 (시 100:1~5)

  • 잡초 잡초
  • 318
  • 0

첨부 1


미국뉴욕에는 102층짜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있습니다. 높이를 102층으로 지은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1620년 9월 7일 신앙의 자유를 찾아 66일 동안 대서양을 건너 미국 신대륙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 항구에 도착한 102명의 믿음의 조상인 청교도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평양 대동강변에는 북한이 자랑하는 주체탑이 있습니다. 이 주체탑은 25,550개의 돌로 세웠는데 그것은 김일성 주석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온 날수의 숫자라고 합니다.

이 두 건물은 건축의 동기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청교도의 후예들은 빌딩 하나를 세워도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를 기념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지금 세계 속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인구가 세계인구의 6%정도 되는데, 그들은 세계천연자원의 2/3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먹다 남은 음식만 가지고도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소외된 자를 먹여 살릴 수가 있다고 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부정하는 북한은 한 독재자를 높여 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습니다.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북한난민들의 문제와 북한의 인권은 국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두 건물이 상징하듯, 두 나라를 비교해볼 때, 이는 마치 뿌리가 튼튼한 나무와 뿌리가 병든 나무를 보는 것 같습니다. 나무는 뿌리가 튼튼해야 잘 자랍니다. 인간에게도 근본이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전도서 12:13에“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 삶의 본분일까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편 100:3)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님이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양들인 우리들이 하나님께 해야 할 가장 소중한 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말씀하시기를“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인간의 본분입니다.

본분이란 나무의 뿌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양인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본분은 하나님을 높여 찬양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때 더없이 기뻐하십니다. 시편 69:30~31의 말씀에“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감사는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소나무의 에이즈로 불리는 재선충병을 막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어느 한 지역에서 재선충병이 발생하게 되면 그 나무를 베어내고 그 나무가 다른 지역으로 반출되지 못하도록 단속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데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영혼의 재선충 같은 풍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미혹입니다. 디모데후서 3:1~2에“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말세에 나타나는 심각한 영혼의 질병은 감사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감사를 모른다는 것은 은혜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 가운데 가장 몹쓸 사람은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유명한 평신도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 배신이나 죽음으로 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감사가 사라진 것은 저주받은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사라진 마음은 곧 어두움의 영인 악령에게 사로잡힌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깨닫고 항상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을 교훈하는 내용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제는 가난도 아니고, 질병도 아니고, 실패도 아닌 감사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감사함이 없으면 그것은 타락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소유를 늘리기보다는 욕심을 줄이는 삶입니다. 욕심을 줄일 뿐 아니라 현재 내게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성도여러분! 한 번만 위를 올려다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위로부터 내려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약점이 바로 감사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끊임없이 불평하며 불만을 갖습니다. 왜 그런지 얼굴에 웃음이 없습니다. 불평해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불평을 하고 짜증을 부리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를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감사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젓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성경의 감사는 무(無)로부터의 감사, 환란가운데서의 감사, 범사의 감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有)로부터의 감사, 형통가운데서의 감사, 선택적 감사를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있어서 감사하고, 건강해서 감사하고, 형통해서 감사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결과적인 감사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삶에서는 조금만 힘들고 조금만 잃어버리면 감사의 삶이 아닌 불평과 원망과 좌절과 포기의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 가족이 곁에 있음이 감사하고. 하루를 시작하면서 조용히 무릎 꿇어 주님과 대화할 수 있음이 감사하고, 식탁 앞에 앉으면 먹고 마실 수 있음이 감사하고, 문밖을 나서면 웃음을 주고받을 있는 이웃이 있어서 감사하고, 하루라도 가만있지 않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간과 재능과 모든 것이 주어져 있음이 감사한 것 아닙니까?,

감사란 꼭 좋은 환경에서 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깨달음에서 옵니다. 독일의 정치가 가운데 마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노선 때문에 관직에서 쫓겨나 어렵게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서 고생하는 것이 늘 불평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한 가지 사건을 경험한 후로는 불평을 버리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나는 이제 나의 운명을 슬퍼하거나 불평하지 않겠다. 한번은 구두가 다 떨러졌는데도 구두를 사 신을 수 없는 극도로 어려운 때가 있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불만이 가득한 가운데 예배를 드리고자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그때 나는 거기서 두 발 없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는 두 발이 없이 목발 두 개 만을 옆에 둔 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앉아 있었다. 내 마음은 순식간에 변하고 말았다. 감사할 줄을 모르는 내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완전한 두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까짓 구두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그의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이처럼 감사하는 마음이란,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환경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욕망의 충족으로 감사하려 한다면 일평생 감사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같은 환경이지만 있는 것에 대한 고귀함을 깨달을 때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우리는 새 신발을 샀을 때는 감사하면서 두 발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는 감사할 줄 모릅니다. 새 장갑을 샀을 때 그 새 장갑을 산 것에는 즐거워하면서 두 손을 주신 하나님께는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는“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8)고 했습니다.

二. 감사는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영국의 런던 타임지가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조사했습니다. 상위에 뽑힌 네 부류의 사람들은 뜻밖에도 아주 소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위는 바닷가에서 멋진 모래성을 완성한 어린이, 2위는 아기를 목욕시킨 후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어머니, 3위는 멋진 공예품을 완성하고 손을 터는 예술가, 4위는 죽어가는 생명을 수술로 살려내는 의사였습니다. 행복한 사람들 중에 재벌이나 귀족, 권력자는 없었습니다. 즉, 이들에게는 감사의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행복이 있을 때 비로소 감사가 있게 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또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행복은 서로 비례합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삶을 바라시는 하나님은 당부하시기를“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하셨습니다.
예수님은“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감사의 열매를 보아 그 사람의 신앙인격과 측정해 볼 수 있습니다.“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감사하는 마음에 행복이 있을까요?

첫째, 감사하는 삶에 자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11에서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자족의 삶은 주안에서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남보다 내가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몫이 남보다 적다고 생각할 때 감사보다는 불평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남과 비교하려는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우리는 항상 두 가지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는 나보다 늘 부하고 성공한 사람을 바라봄으로 열등의식에 빠지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내려다보므로 그를 멸시하는 죄를 범하고 교만한 생각을 갖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남과 비교함 없이“내 모습 이대로”를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족의 삶입니다. 현재 있는 것에 만족해 할 때 감사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감사하는 곳에 평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6~7에“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는 곳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욕심이 가득한 마음에는 불평과 불만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곳에 하나님의 넘치는 평강이 있습니다.

셋째,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긍정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까?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게는‘예’만 있고‘아니오’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는 매사에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밝은 면이요, 다른 하나는 어두운 면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인생의 밝은 변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요, 불평하는 사람은 언제나 어두운 변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미국 뉴욕의 어느 가정에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고 눈까지 쇠약해서 겨우 생명만 연장 할 수 있는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가 열한 살 되던 해 아버지는“아들아 육신의 장애는 장애가 아니다. 네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면 너는 모든 사람이 너를 주목하는 역사에 남을 삶을 살게 될 것이다.”라고 격려했습니다. 그 아들이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꿈과 소망과 용기로 가득했습니다.

이처럼 감사하는 사람은 자족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평강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긍정적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승리와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三. 감사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소와 양의 생리는 털을 내거나, 젖을 내거나, 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소는 노동력을 내고, 어떤 소는 우유를 내고, 어떤 소는 가죽을 냅니다. 어떤 양은 털을 내고, 어떤 양은 양유를 냅니다. 우유의 경우는 날마다 젖을 짜야 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젖을 짜면 다시 새 젖이 솟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때그때 젖을 짜지 않으면 그 젖은 말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나 소나 양이나 모두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나중에 한꺼번에 많이 하려고 지금 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십일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봉사하는 것도 기회가 주어질 때 해야 합니다. 나중에 봉사하겠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것도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 바로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 젖을 짜지 않다가 그 젖이 다 말라 버리고 마는 것처럼 감사의 조건이 사라지고 맙니다.

포도나무도 그 열매를 적기에 따야합니다. 제때에 따지 않으면 날짐승들이 와서 극상품의 포도를 불량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의 감사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감사해야할 때 감사를 해야 합니다. 감사를 미루면 그 감사의 내용 자체를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랫동안 감사할 내용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으면 마귀가 와서 그 감사의 내용을 불평의 내용으로 파괴해 버리고 맙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벌써 계절이 바뀌어 추수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다음주일은 우리교회에서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온 세계교회가 다 지키는 소중한 절기입니다. 이 절기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출34:22~23)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신명기 16:16~17)고 하셨습니다.

올해에도 풍년을 맞이했습니다. 일조량이 많고 강우량이 많아 산천의 단풍은 더없이 아름답고 과일은 맛이 좋습니다. 먹을 양식은 넉넉하여 북한을 돕고 있습니다. 농사하는 농부가 수고를 했지만 농부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인 것은 비와 공기와 햇빛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양들인 우리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편 100:3~4)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이 고위한 절기를 지키시므로 하나님의 더욱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익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