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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감사만 하는 성도 (시 1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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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서전을 읽어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쓴 자서전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쓴 자서전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훌륭한 정치가가 되었다든지, 부자가 되었다든지, 출세를 했다든지 할 때 전부 자기 공로밖에 없습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렇게 섰다"하고 자기만 강조되어 있습니다. 읽다보면 신경질이 납니다. 집어던지고 싶습니다. 반면에 예수를 믿으면서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서부터 그가 자라는 순간순간 예수님의 손길과 인품이 느껴집니다.
  "내가 그때 주님을 떠나서 세상의 길로 가려고 했는데, 주님이 사랑의 손길로 나를 붙들어주셨다. 내가 거의 다 죽게 된 그때 주님께서 나를 찾아와서 위로해주셨다. 그때 내가 아주 잘못된 판단으로 사악한 길로 가려고 했었는데, 주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내 앞길을 막으셔서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셨다."
  이렇게 그 사람의 인생에서 주님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글을 읽고나면 그 사람에 대한 존경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격이 앞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한 자서전을 쓸 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삶의 순간순간에는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모든 철학과 종교는 거의 공통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여전히 오늘까지도 난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시인은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시편8:4)라는 질문까지 했습니다. 인간 앞에서 인간이 누구인지는 해결이 안 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생각할 때 분명한 대답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와 인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거역과 불평과 불만의 삶이 아닌 감사와 찬송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할 때 비로서 자녀다운 자녀가 되고, 성도다운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하나님께 감사만 하는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하나님의 피조물

  본문 3절"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인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본문의 시인은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알리려고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인간을 하나님과 떼어놓고서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세기2:7).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만불손한 사람들은 스스로 태어난 것처럼 의시대면서 살고 있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 것입니다. 인체 구조를 연구하고 난 학자들은 빠짐없이 그 정밀한 조직과 움직임을 확인하고 나서 하나님의 솜씨에 경탄을 합니다. 일찍이 다윗은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시139:14)고 찬탄하였습니다. 인간의 두뇌로 만들어 낸 컴퓨터의 기능을 보면서 저마다 놀라지만 실상 인간 두뇌의 창조성까지도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인생을 풀의 꽃이라고 했습니다(벧전1:24). 일주일 이상 가는 꽃이 없습니다. 야고보는 인생을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습니다(약4:14). 새벽에 앞이 안 보이도록 자욱하게 끼었다가도 금방 사라져버리는 안개처럼 인생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 모두가 다 인생이 잠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인생을 회고하면서 "참으로 인생은 잠깐이다"라고 말합니다. 인생이 참 짧습니다. 그래서 20년을 살았던 사람도, 50년을 살았던 사람도 똑같은 소리를 합니다. 돌이켜보니까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짧게는 연말쯤 되어 한 해만 되돌아보아도 '벌써 이만큼 되었구나. 참 순식간에 지나갔구나'하고 느끼게 됩니다.

  인생이 이렇게 짧고 잠깐이지만, 그래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바로 고통의 시간입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의 시간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시간이 다릅니다. 특별히 군인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 바로 "벌써 제대야?"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큰일납니다. 한 청년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는데, 그 다음달이면 제대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별 의미없이 "벌써 제대야?" 그랬더니 순간 안색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런 목사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했나?'하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 제가 말실수했음을 직감했습니다. 특별히 군인들이 휴가 나오면 "또 휴가 나왔니?"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말을 듣는 군인들이 살맛을 잃어버리고 자꾸 탈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군인들의 시간 관념이 민간인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편안할 때의 10년보다도 고난중의 1년이 더 길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모든 인간은 늙고 병들고 반드시 죽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모양과 시간의 차이일 뿐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임을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을 섬기는 것은 어리석고 저주받을 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 섬겨야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 되었음을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감사함으로 잘 섬기는 최고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하나님의 소유

  본문 3절"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인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본문의 시인은 '우리는 그의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 얼마나 심도 깊은 파악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정할 때 당연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땅과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입니다. 여호와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몸과 영혼과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잠깐 빌려 쓰다가 다시 반납해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사용하다가 다 드려야 합니다. 다 드리고 빈손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 놓고 갑니다. 어느 누구도 집이나 땅이나 돈을 가지고 가는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원통과 분노의 마음을 버리고 감격하는 마음만 가지고 가야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할 때 감사만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고 크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경배해야 됩니다.

  크리스토퍼 랜 경이라는 사람이 교회를 하나 지었습니다. 영국에 있는 교회인데, 성 요한이라는 큰 교회입니다. 그 큰 교회를 지을 때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교회를 짓고 있던 목공 세 명에게 한 기자가 가서 똑같은 질문으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런데 세 명의 대답이 다 달랐다고 합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먹고살려고 일하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물었더니 "직업이니까 이 일을 하고 있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지금 하나님의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누가 제일 덜 피곤하겠습니까? 세 번째 사람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사명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이고, 앞의 두 사람은 먹고살려고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짜증스럽고 힘이 들고 오히려 그 일을 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부르셨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그 도구로 쓰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을 하면서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도 하나님의 사역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으로 인하여 우리는 오히려 더욱더 강한 성도가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병원 심방을 갔습니다. 맹장 수술을 한 여집사님이었습니다. 심방 중에 여집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집사님은 아이를 낳아보았으니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아이 낳는 것이 아픕니까, 맹장 수술이 아픕니까?"
  그러자 심방을 갔던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맹장 수술이 더 아프다는 사람, 애 낳는 것이 더 아프다는 사람으로 서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그런데 그 맹장 수술을 하신 여집사님이 참 의미있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맹장 수술이 더 아픕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맹장 수술은 의미없는 고통이었지만, 해산의 고통은 아이를 낳는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실제로 어느 것이 더 아픈지는 모릅니다. 똑같이 아프겠지요. 고통의 깊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하나는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한 고통으로 영광의 고통이며 의미있는 것이기에 그것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고난 없는 성도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발 자신의 고통이 제일 크고 가장 아픈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나 다 똑같은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겪는 그 고통은 나에게만 크게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잘 극복하지만 어떤 사람은 넘어집니다.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기심에 빠질 때는 고난이 얄미워 죽겠고, 억울해 죽겠고, 도무지 못 참고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주를 위한 고통이요 헌신이라고 여긴다면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내가 무슨 팔자야?"하면서 "무슨…"으로 불평을 시작하면 목사의 사명을 감당 못합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서 헌신하고 주를 위해서 부르짖는 고난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영광입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서게 될 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세로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과 재산,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과 고난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이기에 자녀인 우리들의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드립시다. 감사할 때 더 풍성하고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는 감사만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하나님의 양

  본문 3절"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인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 있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가리켜 목자로 표현하고 그분의 백성을 가리켜 양떼로 표현한 것은 탁월한 묘사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 그 관계 양상이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신자들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양의 관계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결코 인간 스스로는 살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축복된 존재이며 구원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어리석습니까? 생명을 걸 가치가 없는 것들에 생명을 거니까 어리석은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에서 '그리스도'라는 말 대신에 다른 것들을 대입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돈'이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돈이 무엇이 유익합니까? 죽으면 끝이지요. 그리스도 대신에 쾌락을 대입해봅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쾌락'이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쾌락이 사는 것의 목표였던 사람은 나중에 죽으면 지옥입니다.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이는 내게 사는 것이 '명성'이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럴 수 있습니까? 나이 오십이 넘으면 이제 심각하게 살아야 합니다. 몇 년 안 남았습니다. 예수님 앞에서야 할 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준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허한 자세로 내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지, 내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어리석습니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런데 평소에 사람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준비가 없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참으로 우리의 남은 인생이 10년, 20년밖에 안 된다고 하면 어디 한눈 팔 시간이 있겠습니까? 이젠 모든 것들을 다 집중해서 주님의 일을 하기에도 바쁜 시간입니다. 우리는 안주(安住)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근심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제발 그 사소한 일, 문제 같지도 않은 일 때문에 넘어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며, 또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가는 능력을 가지고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데 충성을 다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바랍니다.

  다이아몬드는 세공사가 예리한 칼로 정성을 들여 갈고 닦습니다. 다이아몬드가 귀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면에 물건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올려놓는 돌은 어떻습니까? 그런 것은 전혀 세공할 가치가 없으므로 다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이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다이아몬드 인생으로 만드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건이 날아가지 않도록 올려놓는 돌은 굳이 다듬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묵직하면 됩니다. 따라서 내 삶 가운데 시험도 없고 환난도 없고 그냥 평탄하기만 하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별로 쓸모 없는 돌덩이 인생입니다. 쓸모 없는 돌덩이를 왜 다듬습니까? 버려야지요. 그러므로 내 삶 가운데 시험이 있고 환난이 있고 칼질이 있을 때 '아, 하나님이 나를 향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구나'라고 깨닫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7남매를 키웠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부인은 줄곧 '일곱 십자가'라는 표현으로 어머니의 괴로움을 말하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목사님이 집에 들어섰는데 부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먼저 소리를 쳤습니다.
  "여보, 오늘은 나쁜 소식들뿐인데, 당신만이라도 뭔가 좋은 소식을 말해 주구려."
  그러자 부인이 말했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고말고요. 아이들 일곱 가운데 여섯 명은 오늘 하루 종일토록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어요."
  믿음은 생각과 관점과 표현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믿음의 사람은 반드시 다릅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감동의 날을 감동적으로 잘 마쳤습니다. 남은 생애가 감동에 푹 빠진 축복의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감사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 소유, 양이 된 것을 생각하여 감사만 하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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