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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손에 물매를 가지고 (삼상 17:31-40, 히 13:20-21, 요 10: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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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서 주기도문을 빼놓고 가장 많이 암송하는 것은 아무래도 시23편일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설교의 황제라고 일컬음 받는 찰스 스펄전은 “시편 23편은 다윗의 하늘 목회론이며, 그 누구도 추월할 수 없는 탁월한 찬송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양을 쳤던 목동이었으며 나중에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양이라고 할 수 있는 백성들의 목자가 된 다윗은 하나님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목자라고 했습니다. 특히 다윗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춤추는 예배자 다윗⌟이라는 책을 쓴 Juduson Cornwall은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하여 아주 의미 깊은 말을 했습니다. “양들은 목자에 관한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목자와 함께 산다” 다시 말하면 목자에 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목자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종종 양의 목자로 말씀하신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요10:14-15)고 했습니다.

목자가 양과 함께 하고 양을 안다는 것은 목자가 양의 자리에까지 낮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사람이 되시고...종의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목자가 낮아지니까 양은 그 목자를 신뢰하고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목자에게는 절대적인 겸손이 있었고, 양들에게는 절대적인 신뢰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1) 먼저 목자는 양에 대하여 공급과 보호의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이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라고 한 것은 그가 자기 양을 위하여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했으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그 양을 지킨 것을 말합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고, 우리를 온갖 위험에서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시118:에 보면 “주는 나를 돕는 자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라고 했습니다.

(2) 다음으로 목자를 위한 양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양은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든지,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든지 무조건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양의 또 한 가지 책임은 생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절마다 새로운 양털을 내고, 매년 봄마다 양 새끼를 낳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목자와 양과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지고, 지속되어지고, 더 풍성하게 발전하게 됩니다.

오늘 목동이었던 다윗이 국가적인 위기에서 자기 한 몸을 던지기 위하여 나서면서 그는 자신의 지혜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잘 결속된 목자와의 끊을 수 없는 관계 다시 말하면 자신의 목자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의 평소의 신앙 즉 하나님과 나와의 긴밀하고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되어질 때 우리는 과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고 또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2. 우리는 먼저 저 엘라 골짜기의 전쟁터에서 각각 다른 3종류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 다윗의 맏형 엘리압입니다. 다윗이 형들을 위문하러 왔다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의 오만 방자한 모습을 보고 전황을 물었을 때 벌컥 화를 내면서 다윗을 책망했습니다. 엘리압은 지금 골리앗의 그 엄청난 위력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숨도 크게 쉬지 못하면서도 자기 아랫사람인 다윗에 대하여는 아예 취급도 인정도 하려하지 않습니다. 엘리압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도 그 형제에 대한 우애 같은 것도 다 살아질 만큼 그 심령이 황폐해 버렸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내 형제에게 대하는 태도가 바로 내 신앙의 바로메터가 됩니다. 그것이 내 신앙의 열매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왕이요 그 전쟁의 지휘관인 사울입니다. 32절에 보면 다윗은 왕에게 나아가서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지금 완전히 낙담해버린 상태입니다. 사울의 눈에는 오직 골리앗만이 태산 같은 문제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은 이미 “끝장났다!”고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가서 싸우겠다고 하는데도 “너는 안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절망감이 이스라엘 모든 군인들의 분위기를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앞선 사람의 중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새 성전 건축을 더 잘 감당하려면 무엇보다 앞선 사람들의 신앙과 자세가 중요합니다. 말 한마디나 행동하나도 믿음에 입각해서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줄 수 있도록 처신해야 합니다. 신앙에 입각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우리를 다른 사람 앞에 세워주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다윗입니다.

a. 먼저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위대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그 군대를 모욕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이상 이런 망령된 하나님의 대적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절대 신앙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옛날 예수께서 저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했을 때 “내 양을 먹이라”고 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신앙과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가장 먼저 주님을 향한 이 절대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주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진정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윗처럼 주의 일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어놓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을 들어 놀라운 일을 이루어나가십니다.

b. 다윗은 자신의 목양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자이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자께서 자신을 절대적으로 지켜주심을 믿었습니다.

그의 목양 경험이 무엇입니까? 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 짐승을) 쳐 죽였나이다.” 선한 목자였던 다윗은 어떤 사나운 짐승에게도 자신의 양 새끼 한 마리도 빼앗기지 않고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목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양인 자기를 절대로 지켜주신다는 확신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심지어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편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를 믿는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세상 끝 날까지(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당하든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의 표현대로 하면 비록 거기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할지라도 거기서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 임마누엘의 신앙입니다. 다른 것 다 없어도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이 계시니 다 좋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무장이었습니다. 여기에 다윗의 승리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이런 임마누엘의 신앙을 소유하고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 다윗의 결심이 단호한 것을 본 사울 왕은, 그리고 사실은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한 사울로서는 궁여지책이기도 했지만 일단 다윗을 전쟁터로 내보내기로 허락을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군복과 무기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39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칼을 군복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라고 했습니다.

왕이 자기 옷을 벗어주고, 자기 무기를 준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기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얼마나 감지득지할 일입니까? 그리고 지금 아주 위험한 전투 현장으로 가는 신하에게 왕이 그 무기를 들려주는 것이 얼마나 지극한 배려입니까? 누가 감히 이런 왕의 호의를 뿌리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왕이 입혀준 갑옷을 벗어버렸습니다. 왕이 들려 준 무기도 버렸습니다. 빌려온 것으로는 전투에 임할 수 없고 또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에게 맞는 무기였습니다. 엘리사의 제자 한 사람이 도끼를 빌려왔다가 낭패를 당했던 일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윗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시내에 가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첫째, 빌려 온 무기 즉 빌려 온 신앙은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에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들은 대로 대답했습니다. “엘리야, 예레미야, 세례 요한,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더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들은 풍월식의 신앙정도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들으시고야 기뻐하시면서 교회의 약속, 천국 열쇠의 약속, 음부의 세력도 이길 수 없다는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입으로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이 저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능력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돌을 줍기 위하여 시냇가에 무릎 꿇은 다윗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전쟁을 하려는 사람이 무릎을 꿇으면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본 골리앗은 다윗을 경멸하며 조롱합니다. 사울 왕은 걱정스럽게 바라봅니다. 그러나 다윗의 승리는 먼저 무릎 꿇은데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무능력자의 모습으로 노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릎 꿇는 그 순간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연결 되어집니다.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릎 꿇은 다윗을 맡아주셨습니다. 여기 승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펄전은 “천국은 무릎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무기 가진 거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소년이 승리했습니다. 믿음과 기도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사역의 승리의 비결이 바로 여기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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