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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세 가지 기본 감사 (딤전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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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부모들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여러 가지 교육을 합니다.
  처음에는 걸음마를 가르치고 말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조금 더 자라면 우유병을 떼고 수저로 밥 먹는 것도 가르치고 또 대소변 가리기도 시킵니다.
  그런 다음에는 어른을 만나면 인사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기본적인 예의를 몸에 배도록 가르치게 됩니다.
  이런 교육들은 대체로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 몸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치는 행동교육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반면에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교육이 있는데 그것이 곧 인성교육입니다.
  그렇다면 그 인성 교육의 제일 첫 과목은 주로 무엇이 되겠습니까?
  아마도 그것은 아이에게 감사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무엇 좋은 것을 받았을 때 그냥 덥석 손에 쥐지 않고 반드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할 줄 알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이의 마음속에 고상한 인격이 자라나도록 하는 첫 단계라 할 만합니다.

  오늘의 본문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의 생애 말기에 씌어진 성경입니다.
  이제 곧 자신의 목회 은퇴와 순교를 앞둔 바울이 자기 뒤를 이을 후배 목사인 디모데에게 앞으로 그가 어떤 복음 전도자가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를 이끌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목회서신들의 첫 번째가 바로 이 디모데전서인 것입니다.
  그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감사"라는 말을 세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이 남달리 많은 사람이었고 또 항상 감사드리면서 살았던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제목들에 대하여 그의 후배 디모데 역시 꼭 같이 감사할 줄 알게 되기를 바랐으며, 또 디모데로 하여금 모든 기독신자들 역시 같은 제목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지 말도록 가르치라고 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하나님께 감사드릴 줄 모르고서는 결코 신앙 인격이 자랄 수 없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적어도 참된 기독신자라면 누구나 공히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할 것 세 가지를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중생 받게 됨을 인하여 늘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1장 12절부터 16절의 말씀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같은 죄인을 불러 구원해 주시고 더욱이 사도라는 직분까지 주셨음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충성되이 여겨"라는 말은 바꾸어 번역하자면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여겨'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판단으로 보자면, 바울은 사도라는 직분을 맡기기에는 그 과거 경력이 너무나도 끔찍했습니다.
  그는 교회와 신자에 대하여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악독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회심한 이후에도 대부분의 초대교회 신자들이 그를 믿지 못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바울을 "충성되이" 즉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 주셨고, 사도의 직분을 맡길 만큼 신뢰해 주시는, 실로 큰 "긍휼"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그처럼 신임 받는 직분자가 된 것은 물론 바울로서는 말할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14절 말씀은 '내 속에'라는 말을 첨가해서 번역해야 합니다.
  여기 "주의 은혜가...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다"는 말은, 바로 바울 자신 속에 일어난 일을 뜻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심령에는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충만했을 뿐 아니라, 그 주님의 은혜가 넘치고 넘쳐서 그로서는 황송하기 짝이 없는 사도의 직분까지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인됨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극단적으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그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과거를 가진, 죄인 중에서도 제일 극악무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는 도무지 재기불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토록 살기등등하게 교회와 신자를 핍박하며 날뛰던 때의 사울을 보면서, 그 누가 그런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 믿게 될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울에 대하여 "일절 오래 참으심"으로 "긍휼"을 베풀어 주셨고, 그 결과 변화된 바울은 오히려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훌륭한 모범 신자가 되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아무 가망성 없어 보이던 극악한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은 그런 바울까지도 바꾸어 놓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과거의 생활과 현재의 모습을 잘 알고 있던 바울이었던 까닭에 그는 자기라는 존재 속에 일어난 그 엄청난 기적적인 역사를 두고 이처럼 감탄과 감사를 연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고 고집불통의 죄인까지도 불러 회개시켜 새 사람 만드시는 것, 교회와 신자에 대하여 최고 악질의 핍박자까지도 변화시켜 오히려 충성된 일군으로 바꾸어 버리시는 것 -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이런 기적을 오늘도 택자에게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인생 최대의 기적이 바로 내 인격 속에서, 내 생활 속에서 일어난 것을 체험하는 신자는 정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자나 깨나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이런 감사가 절로 터져 나왔듯이, 참된 신자는 그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자기가 중생 받았다는 이 감사의 간증이 절로 넘쳐흐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기독신자라는 사람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 받은 것을 두고 먼저 감사할 줄 모른다면, 다른 그 무엇을 두고 그 얼마나 많이 감사한들 그것이 어떻게 참된 감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물에 빠졌다가 구조된 사람이 자기를 살려 준 구조대원에게 먼저 감사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담요 덮어 주는 사람에게만 고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장에서 부상당해 쓰러져 있던 자신을 그 총탄이 빗발치는 중에도 끌어내어 구해준 동료병사에게 먼저 감사하지 아니하고 지금 병원에서 자기를 치료해 주는 간호원에게만 감사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감사를 잊어버리고서 나오는 다른 감사들은 오히려 부당하고 악한 행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을 구원해 주신 사랑,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던 '훼방자'를 이제 충성된 교회의 일군으로 세워 주신 은혜 - 영육으로 새로 태어난 이 중생의 삶을 두고 날마다 제일 먼저 감사드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국가를 통하여 신앙의 자유와 사회의 안보를 누리고 살게 됨을 감사해야 합니다.

  2장 1절과 2절 말씀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신자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며 특히 그 중에서도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 즉 나라의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간구와 기도와 도고"를 하는 중에 또한 "감사를 하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제목과 감사의 제목은 신자들이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기독신자들은 나라의 정치가들이 제대로 정치를 하여 자신들이 이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도 또한, 이미 그런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누리게 해 주시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경건"이란 말은 신자의 개인 신앙생활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단정"이란 말은 품위 있는 생활, 즉 인간답게 사는 육신생활을 뜻합니다.
  "고요하고"란 외적인 장애가 없는 생활, 즉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떤 전쟁이나 혼란이 없는 안정된 생활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평안한"이란 내적으로 근심 없는 생활이란 말입니다.

  종합하여 다시 말하자면, 영육 간에 안정된 환경을 누리며 사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그런 환경을 국가라는 조직사회를 통하여, 위정자라는 사람들을 통하여 누리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신자는 나라와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또 자기 나라와 사회를 통하여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에 대하여서도 늘 진정으로 감사드릴 줄 알아야 마땅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감사를 했을 때, 그에게 있어서 '국가'란 바로 로마제국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의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그렇게 옹호하고 보호해 주는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황제숭배와 우상숭배가 국교화되다시피 한 나라였으며, 바울의 조국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만들어 버렸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차츰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박해하는 기운이 이미 싹트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런 로마제국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또한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로마제국이란 국가를 통하여 그래도 기독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신앙의 자유와 사회적 안보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로마제국의 법과 치안과 국력이 초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전쟁 없는 평화 시대, 이전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다니며 전도할 수 있는 교통망, 각 민족 고유 종교의 자유 등을 누리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제국을 그렇게 사용하심으로써, 초대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중해 연안의 각 민족과 나라에 급속히 전파되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로마제국이란 나라와 그 위정자들 두고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조국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사회는 어떠하겠습니까?
  아직도 불교와 유교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는 이 나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완벽한 국가라고는 할 수 없으며, 현재의 위정자들 역시 친공 외교 정책을 가지고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나라를 옛날 왕조 시대나 일제 때에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오직 왕 한 사람만 자유롭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우리들은 그래도 개인의 자유와 생존권이 보장된 나라에서 살고 있으며, 국권을 빼앗긴 가운데 종교의 자유마저도 크게 핍박당하던 때와는 달리 마음대로 예배드릴 수 있는 정말 좋은 시절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의 총칼 앞에서 신앙을 위협당할 걱정이 없는 평화시대에 살고 있으며 정부에 대하여 비판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체포당했던 군사독재시절로부터도 이미 완전히 벗어난, 실로 조국의 사상 이래 최고의 자유 민주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에도 바로 이런 나라에서 이런 평화 시대를 누리고 살아왔는데 어찌 우리가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세상 국가의 체제는 완벽할 수 없고 위정자들의 정치는 불신앙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런 나라와 정치가들을 붙잡으시고 주장하셔서 이 조국을 지켜 주시고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와 생존의 안보를 베풀어 주신 사실에 대하여 또한 진심으로 감사드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일용할 양식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육신 생활의 축복을 두고 감사해야 합니다.

  4장 1절 이하 5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믿음에서 떠난" 이단들 중에 한 가지 유형을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가르치는 자들로서, 금욕주의가 곧 진리인 것처럼 가르치는 이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또 고린도전서 7장에서 환난의 시기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에 더 좋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바울은 결코 결혼을 금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처럼 결혼 금지를 법으로 정해 못 박는 것은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 하는 말이라고 단정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인 역시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셔서 인간에게 주신 관례이기 때문입니다.

  '식물을 폐한다'는 것 역시 금욕주의자들이 가르친 것인데 특히 육식을 금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이처럼 자기 의지로 자신에게 고행을 줌으로써 스스로 거룩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것으로서, 여지없는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이처럼 금욕주의의 이단을 경고하는 가운데 사도 바울은 "식물은...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음식물은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만 받아먹도록 만드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식물을 대할 줄 알게 되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즉 어떤 음식물이든지 귀중히 여기고 낭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다"라는 말은 바로 예수님께서 음식을 앞에 두고 항상 하신대로 먼저 '축사'하는 것 즉 식사 감사기도를 뜻합니다.
  음식을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신 바를 기억하면서 감사함으로 받고, 또 기도를 통하여 그 감사를 하나님께 올리게 될 때, 그 음식물은 실로 "거룩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식사 감사기도는 아마도 기독신자가 제일 먼저 배우게 되는 감사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성경의 진리를 아는 자'들은 그 음식물에 대하여서부터 '감사함으로 받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제일 쉽게 감사하는 마음이 떠오를 수 있는 일이고, 매일같이 일정하게 감사하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식사 감사부터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릴 줄 알게 됨으로써, 신자는 더 많은 감사 제목들을 기억하고 더 깊은 감사들을 더욱 자주 하나님께 올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혹 집에서 혼자 식사할 때 식사 감사를 잊어 먹거나, 직장이나 학교에서 남들이 보는 자리에서 부끄러워서 식사 감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 있습니까? 신앙 인격 교육의 첫걸음도 안 된 사람입니다.
  진짜 감사, 마땅히 드려야 할 더 많은 감사는 평생을 살아도 하나도 더 배우지 못할 사람입니다.
  식물조차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 내게 내려 주시는 각양 좋은 것들을 두고 다 감사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뭔가 한 건 크게 터지면 감사드리겠다.'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큰 감사 제목 주실 것을 기다리고만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장담하건데 그런 교인은 절대로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자신의 육신의 생명을 영위시켜 주고 있는 '일용할 양식'이 얼마나 귀중한 감사 제목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더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그 정도도 계산 못하시고 그런 사람에게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내려 주실, 그렇게 '만홀히 여김을 당하실'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먼저 자신의 일용할 양식 주시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감사를 드림으로써, 그 외에도 나의 육신 생활을 위해 자상하고 풍성히 베풀어 주시는 '셀 수 없는 복들'에 대하여서도 하나도 빠짐없이 감사드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어린 아이가 제일 처음 배우는 감사는 자기에게 무언가 좋은 것이 주어질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누가 자기에게 과자나 선물을 줄 때, 반드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받는 것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신자가 일용할 양식부터 감사하는 것이 바로 그런 단계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 감사조차 할 줄 모른다면 그야말로 동물과 다름없는 수준입니다.

  그러다가 그 어린아이가 조금 생각하는 것이 높아지면, 무슨 특별한 것이 주어질 때뿐 아니라 자기가 매일 누리고 있는 생활환경 그 전체를 감사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방이 있고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가 있는 집, 학문을 배울 수도 있고 자기 또래의 친구도 있는 학교, 이런 것들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신자들이 이 신앙생활의 환경, 즉 국가와 사회를 통해 누리게 되는 이 자유와 평화를 감사하게 되는 것이 그런 수준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장성하고 생각이 더욱 깊어지면 이제 자기가 누리고 있는 생명 그 자체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자기가 호흡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기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그 사실을 두고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신자의 최고 수준의 감사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명 정도가 아니라 영육 간에 영원한 새 생명 주신 것을 두고 날마다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00여 년 전에 미국 동부 연안 플리머스에 정착했던 청교도들이 바로 오늘의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왔던 사람들의 반 이상이 굶고 춥고 병들어 죽은 첫 겨울을 지냈지만, 다음 해에 경작하고 추수한 후 그 남은 자들은 자기들에게 일용할 양식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새 땅을 감사했습니다.
  비록 거친 자연과 원주민의 위협이 있는 곳이었지만, 적어도 신앙의 자유와 평화가 있는 땅에 살게 된 것을 두고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들의 감사는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기 영혼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들은 음식과 생활 터전만 두고 감사한 자들이 결코 아니라, 그 신대륙보다 훨씬 더 좋은 천국에 이를 새 생명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았던 조상들이었습니다.
  실로 참된 신자들은 어떤 피부색을 가지고 어떤 땅에서 어떤 시대에 살아도 이처럼 꼭 같은 기본적인 감사 제목을 공유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은 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과연 어떤 감사를 드리고 있겠습니까?
  기독신자라면 그 누구나 기본적으로 늘 기억해야 할 세 가지 감사 제목들 중에 과연 몇 가지를 오늘도 감사드리고 있겠습니까?
  대부분은 그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감사 정도에서 그치고 말 것이며, 조금 나은 사람은 이 자유민주국가에서 평화시대에 살게 된 것까지 감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중생의 삶, 영원한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이 은혜에 대하여 비단 감사절에뿐 아니라 매일 진정으로 감사드리고 사는 신자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 추수감사절을 우리 신앙의 조상들과 꼭 같이 지키기 위해서는, 그 날자만 같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감사 제목을 꼭 같이 기억하고 지킬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바울이 드렸던 세 가지 감사들은 디모데에게도 그대로 공감되었습니다.
  그 감사들은 참된 기독신자들에게 항상 넘쳐 있었고, 청교도들 역시 바로 그 감사 제목들을 가지고 이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감사, 신앙의 선조들이 드렸던 감사 - 바로 오늘 우리의 감사가 되어야만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시한 모든 육신 생활의 축복, 이 나라를 통해 주신 신앙생활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영육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말할 수 없이 크신 은혜 - 이것들을 두고 하나님께 오늘 특별히 크게 감사드리며 남은 평생을 통하여 그 감사들이 나날이 더 자라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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