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수감사] 예수 안에서의 감사 (시 50:22-23)

  • 잡초 잡초
  • 299
  • 0

첨부 1


*****[엔트 윈 피셔]라는 미국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이 된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해서 만든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려져 고아원에서 갖은 학대와 상처 속에서 자라 청년이 되어 해군에 입대합니다.
그러나 군 생활, 특히 타인과의 관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적응자로 낙인찍혀 강제 제대 조치를 받게 됩니다.
영화는 그 조치의 마지막 과정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 도중 주인공이 자신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던 과거의 상처들을 발견하고 치료받으며 건강한 인물로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받으며 건강한 사람으로 변화되며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얼굴의 웃음과 감사의 언어입니다.
상처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주인공의 모습은 잔뜩 일그러진 모습과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면서 그는 행복의 사람, 감사의 사람이 돼 갑니다.

누가 성숙한 사람이요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가 가진 감사의 깊이만큼 사람은 성숙됩니다.
그가 지닌 감사의 폭만큼 인생은 행복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에 한해서만 인간은 삶에서 자유 합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만큼 인간은 노예이고 불행 것입니다.
보세요.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경제적인 혜택은 과거 6.25나 보릿고개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린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듣습니다.
더 못 가진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볼멘소리를 듣게 됩니다.
현재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치 못한 것만큼 지금 불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할 수 있는 삶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소유에 매여서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만큼만 자유하고 행복합니다.
그 만큼만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진정한 감사를 할 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감사 회복의 첫 번째 조건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22)

영어에서 ‘감사하다’를 나타내는 ‘Thank'와 '생각하다'를 나타내는 'Think'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하다'(Thank) = '생각하다'(Think)
결국 깊이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장애인 [이희아] 양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선천성 기형아로 무릎아래 양다리가 없고 양쪽에 두 개씩 네 개의 손가락이 전부인 1급 장애인입니다.
어느 잡지에서 사람들이 연주가 끝나고 자신의 모습에 대한 질문을 할 때 [희아] 양은 당당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뇌혈과 기형으로 수리 영역이 발달할 수 없지만, 언어나 예술 쪽의 감성......그리고 기억력이 좋아요. 청음이 좋다고들 해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한쪽 부분을 가져가는 대신 이 특별한 부분을 다른 사람보다 더욱 누리게 해 주셨죠.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해요.”

그리고 장애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경에 장애인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말이예요..... 그러니 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태어난 것이예요. 그래서 행복해요. 또한 누구나 다 장애가 될 수 있잖아요. 중요한 것은 모두가 그 자체의 소중함을 인정하고 더불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희아] 양은 자유인입니다.
누구도 못 누리는 깊은 차원의 행복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생각 속에서 자유하고 있습니다.
남이 보지 못하는 현상 너머의 삶의 의미를 보고 있고, 그로 인해 남이 누리지 못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감사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존재에의 용기(Courage to Be)'라고 하는 그 유명한 책에서 이렇게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대인의 불행은 숙명과 죽음의 문제에서 왔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도 팔자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 할 생각을 못했어요.
그대로 그 많은 고생을 치르며 수천 년을 살아오게 됩니다.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은 죄와 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저주다.
죄에 내리시는 신의 저주다.
죄와 벌! 그 무서운 심판 앞에서 벌벌 떨면서 흑사병이 돌아도 저주다.
전염병이 돌아도 저주다.
홍수가 나도 저주다.
이렇게 몰아치는 무서운 저주 속에서 저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그 불행의 원인이 생의 무의미에서 비롯된다고 신학자는 말합니다.
무의미함.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배고픈 것도 아닙니다.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고독해 하는 것입니까?
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감사가 없고 왜 감격이 없습니까?
그만하면 감사 감격할 만도 한데.
뭐 때문에 감사를 잃고 행복을 잃고 자유를 잃은 것입니까?
현실에 보이는 세계에만 집착하고 삶의 깊은 것을 들여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와 모든 삶을 있게 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이요, 물질적이고 현상 중심의 찰나적 생각만 있을 뿐, 이 모든 것의 근본인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이 현대인의 불행의 원인인 것입니다.

어느 사이에 인간의 생각과 철학이 세속화되면서 사람은 불행으로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그런고로 고마운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그 고마움에 따르는 행복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기에 자신의 자유도 없습니다.

오늘의 현상 너머에서 나를 있게 하고 나의 삶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인간에게 구원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감사도 없고 또한 행복도 없습니다.

2. 참된 감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이의 간청으로 학교 학부모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동안 아이 키우느라 바깥 상황에도 어둡고 제대로 가꾸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다른 엄마들은 보니 꾸미기도 잘 꾸미고, 바깥 활동도 하여 많은 화젯거리를 가지고 대화들을 나눕니다.
돌아보니 자기가 가장 초라하고 뒤쳐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왠지 서글프고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 동안 뭐하며 살아왔나 싶은 게 모든 것이 무가치해 보입니다.
남편이 원망스럽고 자기가 한 없이 무능해만 보입니다.
어깨가 축 쳐져 학교 문을 나서는데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가 자신을 알아보며 손짓을 하며 달려옵니다.
그리고 덥석 품안으로 안기며 주변의 아이들을 소개합니다.
“우리 엄마야! 우리 엄마 예쁘지!”
그리고 자기 엄마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합니다.
“엄마가 최고야!”

그 순간 모든 상황이 역전됩니다.
울적했던 마음도 무능했던 자신도 사라집니다.
마음엔 기쁨이 솟고 쳐졌던 어깨가 펴지고 발걸음엔 힘이 넘칩니다.
자기를 힘들게 했던 세상의 모든 것을 일순간에 날려버리는 가장 강력한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 하나면 족합니다.
이것 하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의미가 살아있는 한 다른 것은 다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행복이 살아있는 한 자신의 모든 수고는 더 이상 수고가 아니라 기쁨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얻고 싶은 최고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많은 용돈, 편안한 집, 안락한 생활, 물론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절대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자식들에게 부모가 언제나 제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부모가 계신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인생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웨스터민스트 소요리문답 제1장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23)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드려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찬사는 감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슨 업적을 쌓고 일을 성취하는 데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 편에서의 착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일의 파트너가 아니라 사랑의 파트너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그가 행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행하십니다.
인간의 삶을 위해 창조를 하셨고, 인간의 죄를 위해 구속의 모든 것을 성취시키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듣고 싶은 응답은 무엇입니까?
바로 감사의 찬사입니다.

감사란 무엇입니까?
“당신 때문에 만족합니다.”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라는 고백의 외적 표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무엇입니까?
언제나 감사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1절에서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으로 인해 충복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최고의 감사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주를 위하여 엄청난 고난을 감수해야 할 사도의 직분을 맡은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이 말 속에 담긴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고난 받고 그것보다 더 한 목숨을 바칠 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있으면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감사의 고백입니다.

히브리서기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예배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최고의 영화로운 행위,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3. 진정한 감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납니다.

세계적인 잡지인 가이드 포스트에 ‘이주민들이 드린 감사(Pay a Pilgrim's Thank)'라는 제목의 미국 청교도들로 시작된 추수감사절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이 기사에서 기자는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라는 역설적 질문을 던지며 기사를 엮어갑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사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어떤 선배 목사님께서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자신은 일생 밥투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자식들이 밥투정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입니까?
음식의 소중함, 귀중함을 너무나 절절히 체험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의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가 시작된 그해 정월이었다고 합니다.
가족들과 헤어져 혼자가 되어서 대전까지 왔다고 합니다.
너무 어렵고 춥고 괴로운데 허기까지 겹쳐 도저히 살 것 같지 않은 상황에 처했답니다.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데서 고구마 굽는 냄새가 풍기더랍니다.
가까스로 몸을 끌고 가보니 거기에 누군가 고구마를 굽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습니다.
돈은 뭐 통하지 않는 때니까요.
이거 주고 고구마를 달라고 했더니 고구마 네 개를 주더랍니다.
요새 손목시계는 흔하지만 그 때는 온 동리에 자신 밖에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었답니다.

아버지가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소중히 간직하라고 가보처럼  주신 것인데 고구마 네 개와 바꾼 것입니다.
이 귀중한 시게를 풀어주고 고구마 네 개를 손에 들었는데 서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때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랍니다.
먹을 수 있고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 귀한 것이구나!
그 때에 감사했던 마음은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었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어도 그 때의 그 감사에 비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잡지 기사의 질문의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저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 견디지 못했던가?
그들은 먼저 건강을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1620년 12월, 추운 때입니다
긴 긴 항해 중에 함께 출발한 사람이 배 안에서 병들어 죽어갔고, 그해 겨울 굶주림과 괴혈병과 각종 바이러스 병으로 48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절반이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
그리고 그만큼 건강을 지킨데 대한 감사.
이것이 첫째 감사였습니다.

또한 의복과 거처가 문제였습니다.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여기서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오두막, 통나무 집 오두막을 일곱 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저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또한 음식은 어땠습니까?
플리머스(Plymouth)라고 하는 곳에 도착했으나 낯선 땅에 아무것도 없는데 저들이 가지고 온 종자 몇 가지, 그, 중에서 보리와 밀을 심어 보았지만 토양이 달라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의 덕분으로 옥수수를 얼마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옥수수를 갖다 놓고 그리고 들에 뛰어다니는 칠면조를 잡아서 그걸 구워놓고 감사절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Thanksgiving)이 되면 어느 식당 어느 가정이든지 온통 칠면조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칠면조는 맛없는 조류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미국 학생들한테 “닭하고 칠면조, 어느 쪽이 맛있냐?”고 물으면 열이면 열 모두가 “아, 닭이 맛있지”하고 대답합니다.
그럼 왜 칠면조를 먹느냐.
우리 조상들이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통을 따라서 그렇게 먹으며 감사를 기억하는 거라고 합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어렵고 절박한 바로 거기에서 눈물로 고난 중에 진실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정한 감사 속에서 미국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상황을 넘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뛰어 넘는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 그리고 내일을 향한 소망을 누리게 됩니다.
감사 속에 체험한 기쁨과 평화, 소망이 청교도들로 하여금 이국땅의 고단함과 두려움을 넘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힘을 제공하게 됩니다.
진정한 감사와 그 감사 속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한계와 환경의 한계를 뛰어 넘어 구원의 역사를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감격과 기쁨, 그 행복의 열매를 맺으며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까?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분이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감사의 마음을 가진 인격자가 되십시오.
구원의 놀라운 영광, 그 한없는 풍성한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박영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