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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로 이끄신 하나님 (신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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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로 불교에서 사용하는 말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도 널리 쓰이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이 주로 사용되는 경우는 인간이 고난에 직면할 때입니다. 인간에게 고통과 어려움이 오는 이유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일반 종교에서는 그 기원을 전 세대나 한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합니다. 힌두교에서는 ‘갈마리’라는 교리를 통해 이것을 말하고, 불교에서도 소위 전생의 죄 값으로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기독교에서도 인과응보를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꼭 죄 때문은 아닙니다. 욥의 경우가 그렇고, 주님께서 나면서 소경된 사람에 대해서도 그것이 부모나 자기의 죄 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는 어떤 원인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인과응보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과응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아주 좋은 말입니다. 원인이 있는 결과보다 우리 인생에 명쾌한 것이 없습니다. 출발이 있는 열매가 필요하고, 과정이 있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땀을 흘려야 얻고, 심어야 거두는 것입니다. 결국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결과는 그것에 따르는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우연한 결과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그의 뜻을 펼쳐나가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는 분명한 원인과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즉흥적이지 않고,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그의 계획을 만드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확실하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왜 그렇게 하시는가에 대한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그의 강권적인 역사로 출애굽을 시키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광야로 이끄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하신 이 일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은 가나안이 목적이었습니다. 광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나안이 아니라 광야로 길을 트셨습니다. 직선 길로 약 2주면 가는 거리를 뱅뱅 돌아서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신 일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변덕이 심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가지신 힘과 능력으로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못살게 만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광야로 모신 것에는 분명한 원인과 이유가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을 유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우선, 사건을 바로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출애굽은 일종의 사건입니다. 개인과 이스라엘 공동체에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경에, 특히 구약에 나타난 사건 중에 이것보다 큰 사건이 없습니다. 시편에서 부르는 감사의 내용에는 출애굽의 역사가 빠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출애굽은 당대와 후대에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이 엄청난 사건을 계획하시고 그의 주권적인 힘과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출애굽을 한 것이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것을 통해 이제 그들의 생애에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것을 의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안되기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도움을 구하면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고통 속에서 끝난다는 것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바로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의심하고, 원망하고, 믿지 못하고, 자꾸 현실을 보며 대응하려 했고, 그리고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사건이 가나안 정탐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민수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바란 광야에 머물 때에 모세는 각 지파의 대표를 세워 가나안을 정탐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으로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한마디로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원주민들이 자리를 잡고 살고, 자기보다 힘센 사람들이 지키고 있어서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들은 출애굽과 홍해의 사건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힘으로 하신 일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인데, 앞으로도 하나님이 하실 것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며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고, 그의 도움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단정코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출애굽사건을 바로 판단하지 못한 이들에게 임한 결과가 광야요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광야2세대의 사람들에게 사건을 바로 알라고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여러분, 우리 인생은 수많은 사건의 연속입니다. 오래 살면 살수록 그만큼 많은 사건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멀리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가 지내온 지난 일년간도 우리 삶에는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많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물론 어렵고 힘든 사건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평안하고 좋은 일이 많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보는 우리의 안목과 판단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사건의 주역이 누구였습니까? 누가 이루었고, 누가 도와주셨고, 누가 해결하셨습니까?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인간의 마음은 돌같이 굳어지고 여리고처럼 닫혀지는 것입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바로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잘되고 좋은 것도 그의 도우심이었고, 아프고 힘들었던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아는 순간부터 믿음은 깊어집니다.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순간부터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에 깊이 개입하시어 나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시고,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사는 것이 믿는 자이고, 그런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제 내 삶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모든 사건을 바로 파악하고 판단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도움을 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물을 바로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출애굽과 광야의 삶에는 사건과 함께 사물도 많이 보이는 것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사건과 함께 사물을 보여주심으로 그들을 깨우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보았던 광야생활의 많은 사물가운데 대표적이 것이 바로 ‘만나’입니다. 만나는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입니다. 만나는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히브리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누구든지 보면서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는 신기한 만나를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만나는 꿀 섞은 과자와 같은 것입니다. 사실 주식으로 매일 먹기에는 충분하지 않는 음식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푸짐한 한국음식이나, 다양한 이탈리아음식을 주지 않고 이런 특이한 양식을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맛이 있겠지만 자꾸 먹으면 지겨운 것이 만나인데, 그들은 매일 이것을 먹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먹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40년 광야생활을 대변하는 것이 만나입니다. 광야는 곧 만나를 연상할 만큼 그들에게 만나는 광야를 기억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사물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들이 초막절과 같은 절기를 지킬 때 만나와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그때를 회상했던 것을 봅니다.

  왜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을까요? 광야에서 만나라는 대표적인 사물을 주시면서 그들을 깨우치려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3절에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두 번이나 인용하신 귀한 말씀입니다.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신 뒤에 사탄이 시험할 때,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뒤 사람들에게 이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가르쳐준 똑같은 의미를 전하셨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만나를 주신 이유는 육신의 양식보다 더 중요한 영혼의 양식, 육신의 쾌락보다 더 중요한 영혼의 기쁨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분명 광야에서 만나가 중요했지만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생은 먹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삶이라면 동물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생각하고, 또 그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보면, 우리는 먹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하고 삽니다. 우리는 인사를 해도 ‘진지 잡수셨습니까, 많이 먹어라’ 라고 합니다. 먹는 것에 마치 한이 맺힌 민족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상을 푸짐하게 차리는 민족이 없습니다. 우리처럼 소화제를 먹어가면서 배를 채우는 민족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물론 먹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이것이 인생에 핵심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본질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광야로 그들을 이끄신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껍데기가 있고 알맹이가 있습니다. 본질이 있고 주변 것이 있습니다.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의 형식 때문에 예배의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와 걱정 때문에 기도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사람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인생에는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면서,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 이제 사물을 바로 판단하면서 사십시오.

  셋째, 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시면서 ‘이는...’ 이라는 말로서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너를 낮추시며’입니다. 이 말이 3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처음으로 이유를 말하고,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을 보면 광야의 길로 이끄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의도가 그들을 낮추시기 위함이었음을 알게됩니다. 여기 낮추는 것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겸손을 영어로 'Humility'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흙을 말하는 라틴어 'Humus'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Humus'는 곧 사람을 의미하는 'Human'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흙에서 사람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낮추는 것은 곧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됨의 참된 모습은 결국 겸손에서 찾습니다. 겸손이 사람됨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참 사람으로 만드시려 했습니다. 광야는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훈련장이었습니다.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목사나 대통령을 만들지 않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사람됨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성경은 그 원인을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는 교만입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니까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믿지 않습니다. 자기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우쭐됩니다. 그리고 그 교만함으로 사람을 무시합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교만하기에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늘 이용합니다. 교만하기에 자기보다 더 높아지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끌어내고, 긁어야 시원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서야 할 자리에 자기가 서야 직성이 풀립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면 잠잠했던 기질이 튀어 오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인간, 교만한 사람의 현주소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인생을 보시며 사람다운 사람을 찾으려고 했지만 하나도 없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하나님보시기에 참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참 사람의 모델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을 가리켜 가장 많이 사용한 용어중의 하나가 바로 ‘인자’입니다. 인자가 무엇입니까? 곧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인데 나는 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참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참 사람임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광야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광야는 우리의 인생길입니다. 참 사람으로서 회복되어야 할 곳입니다. 출애굽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시작이라면, 광야는 우리를 사람되게 만드는 구원의 과정입니다. 출애굽이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신 해방이라면, 광야는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훈련의 현장입니다. 출애굽이 우리의 신분을 바꾸어 주셨다면, 광야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다듬어져야 하는 곳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람으로서 회복되는 우선적인 길은 바로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참 사람이셨던 주님이 겸손했던 것처럼,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교만 끼가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신앙인이 아니고, 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곧 겸손한 사람입니다.

  결국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겸손한 사람과 교만한 사람입니다. 겸손하여 은혜를 받은 사람과 교만하다가 망한 사람입니다. 교만하다가 혼난 사람의 예가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서 베드로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주님의 수제자로서 가장 가까이 따라갔던 베드로는 인생에 뼈저린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의 실패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한마디로 교만이 큰 원인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이 사실을 깨닫고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여러분, 하나님이 하신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왜 광야로 이끄셨고, 왜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까? 사건을 바로 판단하라고, 사물을 바로 파악하라고, 그리고 참 사람이 되라고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참 사람의 길을 걸어가시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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