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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부요한 감사 (고후 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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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의 유명한 작품 중에 ‘이삭 줍는 여인들’이라는 그림이 있지요.  전에 한 번 성도님들께 화면으로 보여드렸습니다. 두 여인은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고, 한 여인은 자신이 모은 이삭들을 간수하고 있습니다. 시선은 오른쪽 끝 여인에게서 왼쪽의 두 여인에게로 부드럽게 흘러가서 세 사람을 한 무리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엷은 구름이 낀 하늘 아래 높이 쌓인 수확물들이 길게 늘어져 고전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밀레는 퐁텐블로 숲 근처의 샤이이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이런 광경이 성경의 룻 이야기를 상상케 합니다. 마치 룻기의 주인공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늘 드는 그런 그림입니다.  한 번은 삼인의 교회 제자반 모임을 갖는데 ‘충성된 추수꾼’이라는 잠언25장13절 말씀을 나눌 때였습니다.  문득 그 그림과 삼인의 교회의 추수 모습이 연상되었습니다.  합성되어서 나타나는 그림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허리를 숙인 삼인의 제자들이 그 그림 속에 있는듯이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왠지 그 밭, 보아스의 추수밭은 정말 부요한 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성의 여인에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밭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셨는데 그 추수의 밭이 얼마나 부요한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 밭의 부요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요는 영혼이다,라는 생각, 부요는 인생이다, 라는 생각과 아울러 우리가 주님의 큰 추수밭에 있기 때문에 한 영혼 한 영혼이 얼마나 많은 부요한 환경을 누리는가, 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요의 바탕은 바로 모든 부요함을 선물로 받아서 갖고 있는 영혼들이요 인생이요 서로의 관계이며 그 관계의 중심에는 부요하신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데 이르렀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가 얼마나 부요한 사람들인지, 우리 속에 담아 두신 축복과 가능성이 얼마나 큰 지를 다시 깨달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큰 감사가 들어왔습니다.  그렇다 참으로 감사하다, 나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는가, 그들은 다 나의 부요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요의 중심에 주님, 주님과 함께하는 삼인의 교회들, 사랑의 나라 왕십리교회, 이 모든 곳에 주님의 놀라운 부요가 있는데 내가 과연 이 부요함을 아는가, 누리는가, 우리 교우들은 과연 이 모든 일에 부요한 감사를 느끼는가,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요한 감사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1. 심는 자의 부요한 감사

우리는 심는 자가 된 것을 감사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심은 것들을 인해 감사하고 이왕 감사할 때 풍성한 감사를 드려야합니다. 정말 적은 양의 씨를 갖고도 크게 감사하면서 심을 수 있어야합니다.  그 심는 것에 큰 믿음과 감사가 겸하면 그 결과는 매우 크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거둔 것이 적어도 감사해야합니다. 반드시 큰 감사의 제목으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물질만이 아니고 복음을 심고 영혼을 추수하는 일에 넘치는 감사를 드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특히 복음을 많이 심기를 바랍니다.

먼저, 복음을 많이 심고 기도를 많이 심고 감사를 많이 심어야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까지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더 많이 풍성히 전하여 사람들 속에 풍성히 심는 일을 위해 삼인의 교회 전도와 양육의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심는 자에게’ 라는 말씀에서 우리를 주님을 위해 복음을 심고 비전을 심는 자, 영혼구원의 일에 풍성하게 심는 자로 부르신 것을 감사해야합니다.  일단 심는 자가 되어야 주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씨와 먹을 양식입니다.  일할 것과 먹을 것이 다 공급되는 것은 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의 일을 심고 복음을 심는 자가 되면 우리에게 거두는 자의 기쁨이 있고 함께 서로 나누는 즐거움이 더하는 은혜가 옵니다.

여기서 추수감사의 감사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요.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추수감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창세기 4:3∼4)입니다.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지요.  그러나 그 제물은 농사의 제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예언과 그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기에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양이든지 곡식이든지 보다 속죄의 은혜를 믿음으로 감사의 제물을 드리면 되는 것인데 아벨이 그렇게 했습니다.  곡식이 아니라도 어떤 수확을 얻은 일에 대한 감사인 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미국으로 건너온 영국의 청교도들의 감사입니다.  영국에서 경건한 삶을 추구하던 청교도 102명은 영국에서의 박해를 피해 1620년 메이플라워호에 올라 60여일의 항해 끝에 동년 11월20일 신대륙 플리머스항에 상륙했습니다.그 해 겨울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질병으로 죽었지만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생존자들은 이듬해 가을 곡식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이에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을 초대해 추수한 곡식과 채소,과일 등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음식을 나눠먹었습니다.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미국의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1789년 헌법 제정을 축하하면서 그해 11월26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했습니다.하지만 3대 대통령인 제퍼슨은 추수감사절이 영국의 관습이라는 이유로 폐지했다가 추수감사절이 다시 지켜지게 된 것은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입니다.링컨은 남북전쟁의 조기 종결과 국민의 단결을 위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감사일로 공식 발표했습니다.그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9년 감사절을 11월 셋째주 목요일로 변경했습니다.

한편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은 1904년 제4회 장로회 공의회에서 11월10일을 감사일로 선포한 뒤부터입니다.1914년에는 각 교파 선교부 회의에서 미국 선교사의 최초 입국일인 11월 셋째주 수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언했고 이후 수요일에서 주일로 바뀌게 됐습니다. 

이렇게 시작되었던 추수감사절의 현대의 시작에서 영국의 순례자들, 필그림 1백 2명의 경험이추수감사의 역사적 간증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감사를 드릴 조건은 사실 아니었습니다.  4개월간의 항해 끝에 오늘날의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착한 것이 1620년 12월11일, 그해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수백 명의 인디언을 사망케 한 전염병과 괴혈병, 폐렴으로 인하여 1621년 가을까지 46명의 필그림이 사망했습니다.  56명이 남은 그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해의 풍성한 수확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생존 여성이라곤 부인 네 명과 틴에이저 소녀 두 명뿐이었습니다.  정말 좌절하고 낙심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풍성한 마음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여섯 명의 여인들은 변변찮은 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축제 음식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음식을 만들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감사할 수 있을 일이 아닌 환경이었지요.  그러나 감사했습니다.  이런 감사를 하나님께서 옳다고 보십니다.  그렇습니다.우리는 주님이 이런 역경 속에서도 감사하는 그 감사, 많은 것을 잃어도 그래도 감사하는 그 감사의 부요함을 기뻐하심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이 미국의 부요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래, 그렇게 감사해야한다,라고 하시며 옳다하는 주님의 인정을 풍성히 거둠을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심는 자로서 심는 일에 풍성한 감사를 심어야합니다. 그것을 주님은 옳다고 보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풍성한 것을 거두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를 부요케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인정, 옳았다는 인정을 풍성히 거두는  것이 복음의 심고 추수하는 것입니다.  그 감사의 일에 하나가 주님께 옳게 물질을 드려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정말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잘 담아 감사하는 것을 옳다 보시고 더 풍요한 복음의 전도자가 되게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면 놀랍게도 사업, 일터에서도 주님의 부요한 책임져 주심을 체험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부요한 감사를 드리는 비결은 복음을 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신자 전도요 작정이기도 합니다.  추수감사의 일은 이 태신자를 작정하고 주께 드리는 일과 관련된 감사여야합니다. 물질을 드리는 것도 그런 감사가 원인이어야합니다. 재산이 늘고 수입이 늘고 한 것을 감사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통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요하게 되는 것을 감사해야합니다. 이 감사, 전도감사에 부요하시기를 바랍니다.

9: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의의 열매가 더하고 또 더하기를 기원합니다.

2. 베푸는 자의 부요한 감사
우리는 베푸는 일에 감사가 넘쳐야합니다.  지난 주간 수요일에 우리 교회가 사랑의 초청잔치를 했지요.  본당에 약 700명 가까이 모인 가운데 장애인들을 비롯한 29개단체의 소외자 사역을 하는 분들이 모였고 함께 서로 위로와 기쁨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니엘 복지원에서 장애자들이 풍물놀이를 하는데 놀랐습니다. 그렇게 잘 하더군요.  또는 서태지와 아이들, 이란 주제로 노래를 하는데도 그 표현력에 놀랐습니다.  지난 번 바자를 하고 남은 수익금과 성도님들이 한끼 금식하면서 드리신 구호금을 모아서 전달하고 우리 교우들 가운데 어려운 분들에게도 전하는 이 사랑의 베풂 속에서 왠지 모르는 부요한 감사를 느껴 보았습니다.  사랑의 일에 부요하고 그 일로 인해서 영혼들이 주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볼 때 사랑만이 전도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영혼을 향한 성도님들의 열정이 바자를 하게 했고 금식을 하게 했고 그리고 부요한 헌금을 하게 했습니다.  전도가 되는 감사이지요.  전도의 부요가 있는 감사는 우리의 삶에 반드시 부요한 갚음을 가져올 것입니다.  기쁨으로 갚으시고 그리고 옳다하시는 주님의 인정을 감사하게 할 것입니다.  전도감사에 부요하여 물질에 대해서 영혼구원의 일을 더 잘 할 수 있게 하시는구나, 라고 감사하면 주님은 우리를 진정 모든 일에 부요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감격이 계속 되면서 더욱 더 부요한 연보를 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나라, 영혼의 가치를 알면 무엇이 아까울까요. 우리는 인재를 키우고 그 영혼을 주님께로 온전히 올려드리는 일에 무엇이 아깝지 않습니다. 이 마음,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사업, 영혼구원의 일에 그리고 그 영혼이 즐거울 육신의 구원, 도움에 부요하면 주님은 모든 일에 놀라운 부요를 주십니다. 

9:11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른바 감사할 일이 넘치면서 감사조건이 주님으로부터 넘칩니다.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우리 교회가 큰 물질을 드려 주님을 봉사하는 힘이 더해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각 부서 기관에 세우실 때 우리를 이왕이면 주를 위해 물질을 크게 쓸 수 있고 그리고 그 동기가 영혼에 있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전도의 부요를 경험하면서 모든 일에 부요하고 너그럽게 큰 연보를 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우리는 이제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3.키우는 자의 부요한 감사

사람을 키우는 자가 된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을 키우자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말씀을 생각하면서 복음을 심을 기회를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나눔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시 그 시작의 일. 즉 심는 일에 감사함으로 동참해야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심고 사람을 키우는 일입니다. 

9: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심는 자에게…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지난 수요일에 청계천을 처음으로 거닐었던 일을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웃을 위해 긍휼을 베푸는 사람을 양육하여 심었더니 교회의 모든 사역에서 이웃을 위해 베푸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키우는 감사가 부요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장애인들과 함께 청계천을 거닐 때 날씨가 좀 추웠었습니다.  장애인 중에서 한 분은 걷기가 힘드니까 전도사님 한 분이 업어서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자장애인 한 분은 손이 시려워하니까 함께 동행하며 돕던 여집사님 두 분이 자기 가죽 장갑을 꺼내 손에 끼워주는데 그 분 손은 크고 여자용 장갑은 작으니까 그 손에 들어가면서 장갑이 벌어집니다.  장갑을 버리게 생겼더군요. 
그런데 그냥 그 장갑을 그대로 두면서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희생하는 모습들.  청계천의 물이 흐르는 그 곳을 거닐면서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최대한 사용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작은 장갑과 우리 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장애인의 손은 크고 여자 집사님의 장갑은 작고…… 우리 교회의 지금의 모습도 그렇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주님의 일을 위한 필요는 크고 우리의 현재 가진 것은 아직도 작고….마치 작은 손장갑 같은 우리 교회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이제 우리도 큰 꿈을 갖고 주님 주시는 큰 장갑을 마련해야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한가지 성도님들의 마음을 모으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대로 우리 교회가 늘 장소의 부족함을 겪어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교회의 시설을 확장하기 위해 가건물들을 짓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몇몇 건축물들이 불법건축물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벌금이 나오고 철거를 하든지 아니면 철거할 때까지 이행강제금이란 명목의 사용
료를 내든지 해야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불법을 행한 부분에 대해서는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제가 대표이니 제가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벌금이 약 5천만원 정도 나올 것으로 예상했었습니다. 저는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모든 일의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내게 책임을 물어 주십시요.  교우들은 이것이 불법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이 건축물이 허가를 제대로 취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어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니 한 사람의 교우에게도 이 책임을 묻지 말아 주십시요, 라고 했습니다.  검사가 나를 보면서 그러더군요.  목사님 그렇게 하시면 목사님이 사법처리 되실 수도 있습니다, 라고 하더군요.  순간적으로 내게 오는 불이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강한 감동이 왔습니다.  네 십자가를 져라,고요. 그래서 다시 강조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래도 내가 책임을 집니다.  건설 과정의 어떤 분에게도 책임을 묻지 마시고 나에게 물어주십시요, 라고 했습니다. 검사가 난감한 표정을 짓더군요.  저는 재판을 받을 각오를 했습니다. 당시 저는 누가 이 일에 대해서 고발하여 이런 결과까지 갖고 왔는가, 라는 생각에 화도 났었지만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연락이 왔습니다.  재판을 가서 받지 않아도 되는 법원의 약식명령으로 1200만원의 벌금이 나왔습니다. 제직들과 의논하였고 생각보다 현저히 적게 나온 벌금임으로 모든 제직이 기쁘게 합의하여 지불을 하였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불법을 했다는 일에 대해서는 갚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남은 일은 이 건물들을 어떻게 하느냐, 의 문제였습니다.  그 중에 어떤 부분이라도 철거해야하지 않는가,라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부분을 헐어야하는가, 생각하니 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화장실을 헐 수도 없고요.  그 위의 방은 학습 세례교육, 등 교우들의 교육공간, 외국인예배등에 쓰이고 있습니다.  노인분들을 위한 방을 헐 수도 없고요.  교육관 앞에 있는 유리휴게실을 헐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추운날이 다가오는 성도들을 한데서 떨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노인분들이 자녀들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는 곳인데 전에는 허허벌판이었기에 유리로 막은 것입니다. 그게 불법이 된 것입니다.  불법이긴 하나 지금 쓰지 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이웃봉사관 위층의 건물이 중등부실로 쓰이고 있습니다. 주간동안에는 총회평신도선교사훈련장소로도 쓰이고 청년들도 쓰고 있습니다.  특히 그곳이 중등부실로 쓰이는데  그 곳을 지목하여 허는 일에는 제가 정말 동의가 되지를 않더군요.  차라리 사용료를 내더라도 증등부실을 없에고 다른 곳으로 위축시키는 일에 제가 동의를 하지 못한 것은 과거에 중등부는 장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네번씩 옮기는 부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육관 안에서 옛 영아부실로 옮겼을 때 아기들이 아닌 학생들이 의자도 없이 앉아서 있고 성가대도 의자도 없어서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결심을 했습니다.  중등부에게 정말 좋은 환경을 주어야겠다고요.  그런 가운데 저 가건물이 생겨서  그곳을 중등부 예배실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필이면 중등부학생들이 또 예배실을 헐리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을 한다고 할 때 중등부 학생들은 왜 하필이면 또 우리냐, 할 일을 생각할 때 저들이 교회에 대해서 어릴 때에 갖는 부정적 감정이 후에 교회에 대해서 성장해서도 부정적인 사람들이 될 우려가 있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정말 우리가 이제 뉴타운이 되어서 이곳을 다 헐어야하는 날이 멀지 않아 다가올 텐데 그 때까지 장소를 쓸수 있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한 곳도 헐지 않고 한 푼도 이행강제금으로는 내지 않게 하옵소서, 차라리 이 지역을 위한 청소년의 교육을 위해서 우리가 기부할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새벽에 기도할 때 이런 기도가 나오더군요.  한 사람이 최소한 3,4천만원이다, 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니 사람이 돈인가, 라고 생각하는데 생각하는 가운데 한 사람의 학생이 그 곳에서 더 모일 수 있게 된다면 그 학생이 나중에 교회를 위해서 드리고 바칠 헌신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3,4천만원이다, 라는 것입니다. 아,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마음으로 우리 인재들을 위해서 우리가 힘써 투자를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장로님들과 의논하여 전권을 맡긴 위원회에서 많은 숙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 즉 계단에 관계된 부분을 헐어서 1,2천만원의 강제금을 낮추고 중등부실은 헐지 않는 노력을 최대한 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주무기관인 성동구청에 탄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이 건물을 헐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겨울을 지나게 해 주십시요.  그리고 가급적 요구되는 비용을 줄여 주십시요.  교회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또 공익적인 목적으로 쓰는 곳들이니 이 점을 깊이 참작해서 모든 것을 재고해 달라고 하는 탄원서를 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차라리 다른 기회를 주어서 이 지역과 인재양성을 위해 투자하는 일에 그 비용을 쓸 수 있게 협조해 주십시요, 라고 말입니다.  어차피 뉴타운이 건설되면서 다 헐어야할 것이니까 좀더 유예를 얻는 신청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장소들을 정말 이왕 만들어진 곳이니 교육과 복지를 위해 이웃을 위해 최대한 사용하여 사랑의 빚을 최대한 갚는 노력을 하는 쪽에 힘을 기울임으로써 장소를 없에고 지불금액을 낮추는 일보다 장소를 사용하면서 낮추어진 비용을 교육투자로 삼고 미래를 위해 씨 처럼 심는 것이 낫다, 는 판단으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번에 탄원을 하는 일에 여러 성도님들이 힘을 모으셔서 이 겨울에 추위에 떨며 노인분들이 가족을 이 앞에서 기다리게 하지 않게 하기를 바랍니다.  증등부 청소년들이 이리 저리 방황하지 않게 하기를 바랍니다.  이 것을 계기로 법을 잘 지키는 결심도 해야하면서 동시에 미래의 인재를 위해 투자하는 결심도 새롭게 해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속죄의 용서와 그 피로 씻음 받아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와 용서에 감사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은 죄를 생각하면 마땅히 벌을 받기만 하고 있어야겠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면서 그러나 용서도 하십니다.  거두기도 하시지만 그러나 풍성히 주시기도 하십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을 하였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징계를 받고 죽었습니다.  징계가 왔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을 다시 주셨고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징계하시나 주님은 또한 씻겨주십니다. 그리고 회개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제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기회를 감사하면서 그 기회를 향해 마음을 모아야겠습니다.  주님 건축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지금 주어진 이 환경을 지키시옵고 이 환경 속에서 최선의 주의 일을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의 일에 충분히 쓰고 그
후에 다 헐지라도 주님의 그 가치가 높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시다.  저는 이 돌 예배당도 새로운 건축을 할 때 그 모양을 살리고 싶습니다.  충분히 버리지 않고 쓰고 싶습니다.  정말 30층 예배당을 짓게 하시면 그 중간 어디엔가 이 돌들을 사용하여 지금 예배당의 모습을 표현하는 그런 예배당을 짓고 싶습니다.  그 때까지 지금 이 모든 시설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최대한 교회에게 주어지는 부담금을 줄일 수 있도록 탄원하는 일은 우리가 지금 해야할 기도의 과제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감사의 추수를 맞게 될 것입니다.  정말 큰 스케일의 축복을 받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우리 교회의 모든 환경을 주를 위해 이웃을 위해 교육을 위해 최대한 쓸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이번 탄원에 참여하시면 주님은 교회를 위해서 큰 마음을 모은 성도님들에게 반드시 교회의 미래와 함께 큰 출애굽스케일의 후원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탄원서에 이름을 적으시면서 풍성한 꿈을 갖고 기도하십시다.  주님, 이제 우리에게도 정말 큰 예배당을 주시고 최고의 교육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속히 주옵소서,  주실 줄 믿습니다.  반드시 모두가 바라보고 칭찬할 그런 훌륭한 성전을 짓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꿈을 심는 여러분에게 주님은 반드시 풍성한 결실과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고후9: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키우는 감사는 의의 열매를 거두는 추수군의 감사이기도 합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들을 키우는 감사이지요.  이 일을 위해 인재를 키우는 공간을 이왕 주신 것을 확보하는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  용서도 받으면서요.  주님의 교회를 위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옳은지를 생각하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 모든 기도와 탄원의 마음을 모아서 교회가 최대한의 새힘을 얻고 많은 것을 거둘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믿음으로 씨를 심기를 바랍니다.  크게 주시리라고 믿고 지금 주어진 여건의 최대의 활용을 위해 힘을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허물많은 모든 우리와 가정과 교회라도 주여, 더 풍성히 사용하여 주옵소서, 출애굽 때의 후원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제 죄인까지 끌어안고 불법을 했던 가족까지 용서하면서 끌어안고 새출발할 수 있는 큰 스케일의 사랑과 용서의 교회로 거듭나면서 민족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자녀들을 만들어 그들 속에 출애굽스케일로 신앙을 키우고 출애굽 스케일
의 은혜를 받게 하고 큰 감사를 드리는 일을 배우게 해야합니다.  온 교회가 부요한 감사를드리며 이 일에 옳다,는 주님의 인정을 받는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오치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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