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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사는 그리스도 (빌 1: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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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예배를 드리는데 제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너의 좌우명은 무엇으로 삼고 싶으냐?” 저는 들리는 소리를 향해 “외치는 만큼(설교하는 만큼) 살자 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설교자로 세워주셔서 수많은 설교를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영주교회에 와서도 150번 이상의 설교를 한 것 같습니다. 그 대답이후에 저는 아무 말 없이 저를 되돌아보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많이 설교하면서도 과연 몇 번이나 외친 말씀처럼 살았을까? 성도들을 향해서는 그 말씀처럼 살지 않으면 큰 일 날 것처럼 설교해놓고 나는 과연 얼마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았는가?’ 어떤 사람은 말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설교자에게 지워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를 금방 눈치 챕니다. 그것이 인간의 얄팍한 생각에서 나온 설교인지, 아니면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씨름한 설교인지.... 참을 수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수없이 떠도는 말로만 채워진 설교인지, 삶의 흔적과 영적 싸움이 묻어있는 설교인지....

  “외치는 만큼만 살자”라는 좌우명을 정한 이후로 저는 이번 주에 설교를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때는 보통 하루 동안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씀처럼 다 살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을 붙잡고 묵상하고, 내 마음과 걸음걸음을 말씀의 흐름에 따르게 하고, 말씀으로 변화되기 위해 이번 주에는 한 번에 묵상과 원고를 끝내지 않고, 책상에 앉을 때마다,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늘 그 말씀을 묵상하려고 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저는 사도바울의 이 말씀을 외우고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저의 눈은 항상 이 말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었을까? 바울과 함께 살고 계셨던 그리스도는 어떤 모습이셨을까?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내 주었다는 말인가? 사도 바울이 주님과 함께 살기 원할 때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을까?’

  저는 어줍지 않은 실력이지만 내 자신도 그 말씀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그래서 저는 언제나 제 마음 가운데 주님을 모셔 들이기로 했습니다. 주님을 언제나 생각하고 내 마음을 그 분으로 채우기를 원하며, 일상의 모든 삶에서 주님과 대면하듯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번 다시 저의 옛 모습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내게 사는 것은 오직 나일뿐, 주님은 집을 잃고 방황하는 고아처럼, 거리에 버려진 나뭇잎처럼 내가 드린 거처에 거하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로버트 멍어가 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짧은 책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자도 역시 자기 마음에 주님이 거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문을 열고 주님을 자기 마음에 들어오시게 했지요. 주님이 들어오셨을 때 주님에게 집의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면서 집을 소개합니다. 서재에 들어왔을 때는  책상과 책꽂이, 벽에 걸린 그림들이 보였습니다. 그 서재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차마 볼 수 없었던 책들과 부끄러운 그림들이 보였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읽고 보는 것 중에서 유익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하며 참되지 않은 것들 (지저분한 생각과 마음의 상상들)을 버리기 원하셨습니다.

  다음에는 주방으로 안내 했습니다. 거기에서는 자신이 평상시에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주님께 보여 드렸습니다. 로버트 멍어는 돈, 학위, 증권이 주식이고, 반찬으로는 명성과 행운에 관한 세상의 음식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를 만족시켜줄 참된 양식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전혀 새로운 음식을 요리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거실에서는 주님과 언제나 함께 교제하며 만나야 하는데 그는 주님을 혼자 그 거실에 둘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지하 작업실에는 이런 저런 작업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지만 자신의 능력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오락실을 지나 벽장에 갔을 때가 가장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곳에서는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벽장은 열쇠로 꼭꼭 잠가 놓았는데 자신은 그 곳에서 왜 그렇게 고약하고 썩은 냄새가 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오랫동안 버려둔 썩고 죽은 자기 생활의 잡동사니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로버트 멍어는 이 책의 제목과 같이 “내 마음이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집”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집은 어떻습니까? 내 서재에는 어떤 책들이 꽂혀 있나요? 내 주방에서 내가 만들어 먹는 음식은 어떤 음식이 있습니까? 나는 어떤 음식을 좋아합니까? 거실에서 나는 주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나는 오락실에서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침실은 정결합니까? 오직 나의 아내와 남편 한 사람에게서만 성적인 욕구를 가집니까? 나의 벽장은 어떻습니까? 내가 꼭꼭 걸어 잠근 그 곳에 무엇이 있습니까? 혹시 죽고 썩어버린 그것에서 냄새가 진동하지는 않습니까?

  저는 주님을 내 마음 가운데 모셔 들이고, 나도 사도 바울과 같이 내 마음의 집에 주님이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 마음의 집에 들어오신 이후에도 왜 잘 정착하지 못하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 마음의 집에는 너무나 많은 쓰레기와 잡다한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많은 것들을 어지럽게 널려 놓고도 주님께 그 곳에 계셔 달라고 졸랐습니다. 주님은 저를 버리실 수 없어서 저의 마음에 거하시고 계셨지만 그 분의 얼굴에는 근심의 빛이 역력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빌립보서 전체에 걸쳐서 계속 기쁨을 말합니다. “나에게는 기쁨의 이유가 있다. 너희들도 기뻐하기를 원한다. 내가 기뻐하는 것처럼 너희들도 기뻐하기를 원한다. 너희들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우리는 이처럼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형편을 매우 좋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 감옥에서 기록했습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보기에 기뻐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늘 이렇게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 기쁨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그는 예수님과 함께 살았기에, 그리고 주님이 언제나 바울과 함께 거하셨기에 그는 기뻐할 이유가 없는 곳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에게 돈이 기쁨의 이유였다면 그는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평상시에 명예가 기쁨의 이유가 되었다면 그는 지금 기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아무런 명예도 없이 다만 죄수의 몸으로 갇혀 있을 뿐입니다. 오직 한 가지, 감옥에서도, 돈이 없어도, 명예가 없어도, 자유가 없어도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기쁨의 이유였고, 그의 마음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이 고백을 나와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고백해야 할지 모릅니다. “내게 사는 것이 돈이니, 내게 사는 것이 명예니, 내게 사는 것이 욕심이니, 내게 사는 것이 쾌락이니, 내게 사는 것이 사람의 칭찬이니, 내게 사는 것이, 내게 사는 것이......”

  사도 바울은 더욱 더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죽는 것도 좋답니다. 죽는 것이 더 유익이라고 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죽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삶과 죽음)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23절)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을 살면서 주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며 복음을 전했고,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했기에 이 시련들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내 안에 계셨던 주님은 내 안에 여전히 계실 줄 확신했습니다. 나의 육신은 사라진다고 해도 영원하신 그 분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을 확신했습니다. 오히려 내가 죽는다면 나는 그렇게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함께 하기를 원했던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기에 오히려 기쁘고 그것이 내게는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려면 내게 사는 분이 그리스도여야만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게 사는 것이 돈이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내게 사는 것이 명예와 욕심이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내게 사는 것이 출세와 성공이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말이 안 됩니다.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해지기 위해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장밋빛 인생>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맹순이가 살기를 바랬습니다. 위암말기였던 맹순이가 훌훌 털어버리고 기적처럼 살아나기를 바랬습니다. 그것이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작가는 맹순이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 드라마를 보는 동안 저는 ‘어쩌면 삶보다 죽음이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암이라는 소식과 고통의 과정, 죽음을 준비하는 동안 사람들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밉던 시댁 식구들과 화해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모질게 대했던 시어머니도 며느리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합니다. 그 늙은 몸으로 며느리를 살려보려고 식당에 나가서 일을 합니다. 죽음은 그렇게 정신 차리지 못하던 바람둥이 남편을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헌신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코흘리개 아이들도 버리고 잘 살겠다고 집을 나간 그 피맺힌 한의 덩어리인 어머니와도 화해하게 합니다. 어렸을 때 먹었던 시원한 무국을 다시 어머니와 마주 앉아 먹을 수 있게 한 것은 그들의 삶에 불쑥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가 잠깐 동안 선사한 햇빛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고집쟁이 아버지와 동생을 변화시킨 것은 죽음을 통해 찾아올 이별을 아쉬워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있었던 고백과 용서, 화해와 눈물, 추억과 아쉬움, 감사들은 죽음을 유익하게 만드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용서와 화해가 저에게는 그리스도처럼 느껴졌습니다. 비록 그 드라마는 대놓고 얘기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여러분은 죽음이 두렵습니까? 사도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도 유익한 친구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과도 같은 친근한 것이었습니다. 왜였을까요? 그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2:20)에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 죽음이 심정적 죽음이든, 실존적 죽음이든, 신앙적 죽음이든 그는 왜 기꺼이 주님과 같이 죽을 수 있었을까요? 왜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을까요? 그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는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그 분을 바라보았습니다. 늘 바라보았던 그 분은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셨다면 나도 죽지만 부활한다는 소망과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그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활의 확신”을....

  그래서 바울은 (빌3:10-11)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을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의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리에 낙엽들이 떨어져 있어서 걸어 보았습니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은 소리를 내며 제게 말했습니다. “너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음을 기억해라.”

  낙엽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보이는 죽음의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건강도, 보약도, 많은 물질도, 단순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과 같은 신앙으로는 우리를 죽음의 두려움에서 건져내지 못합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그 분 만이 우리를 죽음의 두려움과 위협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 때,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의 집에 거하실 때에, 내 마음의 집의 모든 부분을 그리스도에게 명의 이전할 때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죽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문제 속에서도 함께 하십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그분은 지금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어떤 부자가 화가 세 사람에게 평화를 화폭에 담아오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화가는 아름다운 산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산은 울창한 푸른 나무들과 봄에 핀 꽃들로 덮여 있었고, 아직 눈이 덮인 산꼭대기는 그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솟아올라 있었습니다. 부자는 만족했습니다.

  두 번째 화가는 멋진 바다의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모래는 수정같이 투명하게 반짝이고, 바다는 푸르고 고요했고, 태양은 잔잔한 바다위로 석양빛을 드리우고 천천히 지고 있었습니다. 그림 한 가운데는 두 사람이 해변에 앉아 바닷물에 발을 담근 채 평온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만족해하면서 “평화롭다”고 감탄했습니다.

  세 번째 화가가 그림을 펼쳤을 때는 부자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그 화폭에는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경험을 말했습니다. “이게 어떻게 평화로운 그림인가? 나도 폭포에 가 보았지만 전혀 평화롭지 않았어. 오히려 물소리에 귀가 먹을 지경이었지. 내가 본 것은 어지러운 물줄기뿐이었다네. 여기에 평화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화가는 말했습니다. “그림 밑을 잘 보십시오.”  부자는 그림 앞으로 바짝 다가가 아래쪽을 보았습니다. 폭포가 떨어지는 밑에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 바위 틈 사이로 한 마리 새가 앉아 있었습니다. 천둥처럼 요란한 그 속에서 한 마리 새는 바위틈에서 너무나 평화롭게 앉아있었습니다.

  우리는 폭포 밑에서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스트레스와 소음, 끊임없는 요구와 소란, 혼돈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할 바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반석 되신 예수님께 피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폭풍가운데 쉴만한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내 삶에 기쁨이 넘치는 이유, 내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도 유익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 폭풍 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도 고요할 수 있는 이유, 천둥과 같은 소리를 내며 우리를 위협하며 쏟아지는 폭포 같은 환난, 비난, 염려, 삶의 짐 속에서도 잠잠할 수 있는 이유.... 이 모든 것은 오직 한 가지 때문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게 사는 분이 그리스도니, 내가 사는 이유가 그리스도니.....” 그리스도는 내가 사는 모든 것의 이유입니다. (이영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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