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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은 용서를 요구하신다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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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3일 요르단 강 서안도시인 예닌에서 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던 칼립이라는 14세 소년이 이스라엘 군인의 총에 맞아 큰 부상을 당한 후 이틀 후인 5일 의식을 찾지 못하고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 소년은 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병사가 팔레스타인 게릴라로 착각하고 총격을 가한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 이 소년은 세계 메스컴이 이 소년의 죽음을 큰 뉴스로 다루었습니다. 놀랍게도 세계 뉴스의 초점은 팔레스타인 어린 소년이 이스랴엘 군인에게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계 메스컴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이 소년의 죽음을 통해 자신을 죽인 원수 나라 이스라엘의 소녀 3명의 목숨을 죽음에서 구했다는 것입니다. 카립이라는 소년의 심장은 그가 죽기 직전 동갑내기 이스라엘 소녀 사마흐 가드번에게 전해졌고, 허파는 또 다른 14세 소녀에게, 간은 태어난 지 일곱 달 된 아이에게 각각 이식되었습니다.

팔레스틴 소년이 보여준 이스라엘 소녀를 향한 헌신과 사랑 그리고 자신을 향해 총을 쏜 사람에 대한 용서를 우리는 참으로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이런 미움과 오해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형제와 자매가, 아내와 남편이, 사회에서는 직장 안에서, 그리고 국가에서는 정치 세력이 그리고 나라에서 인종과 영통 분쟁이 끊임없이 진행되면서 미움이 싸여져 가고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기 힘든 아픈 상처가 마음에 쌓여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란 참으로 어려운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복을 받는다는 소리를 듣는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는 참으로 내 자신의 한계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제 자신도 용서를 돌아가신 아버지를 용서하기 위해 참으로 오랜 고통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술을 좋아 하셨고, 술을 드시면 가끔 폭력을 행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려서의 좋지 않은 기억들은 내 자신을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했습니다. 가정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했고, 믿음의 사람으로 용서에 대해 말씀을 통해 배운 저로서는 참으로 용서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를 하고 그를 받아들이려고 하면 할수록 제 자신을 억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용서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회개하지도 않고,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 질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가끔 제가 어린 시절에 제 자신에게 물었던 질문들을 하곤 합니다. “목사님, 그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도 않고 전혀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지 못하는 데 어떻게 내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먼저 나에게 사과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들 중에 이 질문에 많은 분들이 동의합니다.  제 자신도 이 질문에 동의를 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상대를 7번 용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해 일곱 번을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히 큰 용기가 필요하고,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대단한 인내와 관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용서라는 것은 숫자적인 제한에 있지 않고 무한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말씀대로 살자면 용서해야 하는데, 내 자신은 무한 용서라는 그런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아직도 온전히 거듭나지 못하고 갈등하는 말씀을 통해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용서에 대해 가장 많은 설교와 간증을 한 사람이 있다면 세계 2차 대전 때에 유대인들의 수용소에 있다가 그곳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코리 텐 붐이라는 분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언니의 죽음을 보아야 했고, 자신을 학대하던 나치들의 고문과 성적 희롱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가 전쟁이 마치고 유럽을 순회하면서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독일 뮌헨의 어느 교회에선 자신에게 고문을 가하고 언니를 죽게 한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그 마음에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설교 하는 도중에 만난 것입니다. 그를 보는 순간 그녀의 몸은 얼음이 얼듯 얼었고,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잠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못합니다. 저는 그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참으로 아이러니한 기도였습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는 나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기도할 때 "내가 용서한 사람을 네가 용서한 사람이다”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녀는 “주님께서 용서한 사람이라면 나도 용서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그에게 다가 서서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누가 생각해도 용서는 아주 어려운 시험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역시 인종차별을 받고 27년간 감옥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채석장에서 강제 노동으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강한 불빛에서 일하느라고 눈이 아주 나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는 백인 경찰들의 괴롭힘을 끊임없이 받아야 했습니다. 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백인 간수들을 모두 취임식에 초청했고 나는 그들을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용서가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은 그 인생에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은 진 사람입니다.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16년을 일해야 겨우 1달란트를 모을 수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결국 평생을 노예의 삶을 살아도 그 빚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돈입니다. 그 빚을 값을 수 없다는 것을 안 주인은 그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주인은 그가 빚을 갚을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그에게 이러한 용서와 자비를 베풀게 한 원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선하고 착한 주인이었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27절에서 우리는 왜 주인이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인이 그를 긍휼히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비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카드 빚을 지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필요한 것을 구입하느라고 몇 가지 물건을 단순히 샀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는 신용불량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자는 계속해서 눈덩이처럼 늘어났고, 이제 파산 선고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카드 회사에서는 계속해서 독촉전화가 왔습니다. 빚을 갚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하겠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그는 사채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그를 더 큰 문제에 빠지게 했습니다. 사채업자들은 그에게 더 큰 이자를 요구했고, 그는 이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채무자가 되었습니다. 협박 전화만 오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낮이고 밤이고 집에 들어 와서 협박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채 업자가의 그의 집에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는 큰 두려움과 고통으로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사채업자는 서류를 내밀면서 도장을 찍으라고 했습니다. 무슨 서류냐고 했더니 너의 빚이 모두 탕감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더 이상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사채업자가 내민 서류를 보고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2:13~15). 성경은 우리를 자유하게 했다는 증서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정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증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고 탕감해 주었다는 증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용서의 일이 탕감의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인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과 무한한 사랑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용서는 그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하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또 하나의 은혜입니다. 용서는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무조건적인 긍휼과 그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잠언서 19:11절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1:25절에서 주님은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32절에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보복하려고 할 것입니다.

  지난 11월 4일에 일본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16살의 고등학교 1학년인 여학생이 어머니를 대상으로 독살 실험을 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학생은 동네 약국에서 두 차례에 걸쳐 50명을 살해 할 수 있는 탈륨 50그램을 구입하여 어머니가 마시는 물 컵에 죽지 않도록 매일 조금씩 발라 서서히 어머니를 죽이는 시험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 소녀는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인 블로그에 독극물을 주입한 어머니의 증상을 매일같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고 심전도 기록을 촬영한 사진을 올려 어머니가 어떻게 죽어 가는지 관찰 기록을 올렸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인은 빚진 사람을 긍휼이 여겼고, 그를 불쌍히 여겼지만 그 용서를 받은 사람은 불과 3개월이면 값을 수 있는 백 데나리온의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용서 받은 사람에게는 주인과 같은 긍휼과 자비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동관은 그 자신이 주인 앞에서 했던 것보다 더욱 간절히 간구하였고, 그의 자비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사실 무조건적인 용서에는 엄청난 손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용서받은 사람은 주인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루었는지를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이 용서 받았다는 것만을 생각했고, 자신에게 더 이상 채무의 의무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용서 받는 것은 좋아 했지만 용서하는 훈련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인간적이고 율법적인 용서가 아니라 더 차원이 높은 긍휼함과 사랑을 통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우리에게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원수조차 사랑하여 용서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알아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 서로가 긍휼함가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를 용서하기를 좋아 하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타인에 대한 용서는 나 자신에 대한 용서와 같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구절인 35절 말씀을 우리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봐야할 것 같습니다. 35절을 보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놓치기 쉬운 말씀이 “이와 같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가 강조하고 있는 말씀의 의미는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긍휼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이”해야 합니다. 만일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엄청난 주인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용서받은 그 종이 범했던 죄악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말씀드린다면 용서했다고 해서 화해가 바로 이뤄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용서와 화해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이루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용서했다고 하지만 그와 화해하는 시간은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으로 판 형제들을 애굽의 노에서 총리가 되는 과정 중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미 오래 전에 용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용서한 후에 그들과 형제로 다시 화해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용서와 함께 화해가 된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의 죄의 고백의 시간이 있었고, 회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용서는 일방적인 것이지만, 화해는 상호적인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이 죽고 장례가 마치자 그들은 자신들이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큰 두려움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요셉에게 자신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요청했습니다. 이 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50:19~21).

요셉이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과 형제들에게 일어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을 깨닫는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인생은 아버지의 편애, 그의 고잘하는 성품 그로 인해 발생한 형제들의 거절감과 그에 대한 증오심으로 인해 큰 상처와 아픔의 굴레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총리라는 높은 위치에 올려 놓으신 그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서야 용서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와 화해의 과정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용서만이 인생의 과거의 짐에서 그를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함으로 요셉을 짓누르고 있었던 원망과 미움이 사라졌고, 형제들을 짖누르고 있었던 과거의 죄의식과 보복 당할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공포의 짐에서 놓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신 것처럼 긍휼과 자비함으로 형제와 자매들을 그 마음에서 진정으로 용서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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