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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몬 1:1-3,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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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05년의 마흔일곱 번 째 주일입니다.
대강 계산해 보면 올해의 10분의 9가 흘러갔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이 교회력으로는 첫 절기인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여러분, 올해도 무척 바쁘게 살아오셨지요?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바쁘게 사셨습니까?
많은 분들이 ‘글쎄, 바쁘게 산 것은 사실인데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바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남들이 바쁘게 사니까, 세상이 바쁘니까 나도 덩달아서 바쁘게 사는 척 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분도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 시절에 디오게네스(Diogenes ho Sinopeus BC 404?~323?)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철학자는 세상의 가치들을 부정하고 통속에서 살았다고 해서 ‘통속의 디오게네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줄 테니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디오게네스가 비켜달라고, 그래서 햇볕이 드는 것을 막지 말아달라고, 그것이 내 소원이라고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그리스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준비하느라고 사람들이 모두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디오게네스는 그것을 보고 자기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통을 가지고 높은데 올라와서 밑으로 굴렸습니다.
그리고 또 그 통을 가지고 부지런히 올라가서 다시 굴렸습니다.
굴리고 올라가고, 같은 일을 반복했습니다.
사람들이 ‘아니 왜 그러느냐?’고 묻자 디오게네스는 ‘아,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바쁘게 움직이는데 나라고 한가하게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나도 바쁜 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의 에피소드입니다만, 현대인들의 생활에는 이와 같은 모습도 있습니다.

우리는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사는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합니다.

그 다음, 우리는 헛된 것을 위하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레위기 19장 4절에는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참 헛되게 산 것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난 참 바보같이 살았군요.’라는 노래가 그래서 나온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가치 있는 것을 위하여 우리의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바른 것을 위해 우리의 수고를 바쳐야 합니다.
보람 있는 것을 위하여 한 번 뿐인 나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빌레몬서는 일반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성경이라고 인식되어 있습니다.
분량이 짧습니다.
바울 서신 열세 권 가운데 유일하게 한 장으로 되어 있는 미니 성경입니다.
중요한 교리가 담겨있지도 않습니다.
개인적인 용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일 때문에 쓴 편지입니다.

빌레몬서는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 이런 뜻인데 빌레몬은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입니다.
바울과 잘 아는 사이입니다.
빌레몬서를 읽어보면 바울은 빌레몬과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빌레몬의 집에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이 오네시모가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더 피할 곳이 없으니까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받아들여 같이 있도록 했습니다.
바울은 그 때 재판을 기다리면서 자기를 지키는 군인과 함께 따로 있었습니다(행28: 16).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또는 로마로 호송되어 오는 도중에 배가 난파당해 다 죽게 되었는데 바울이 앞장서서 그 위기를 넘기도록 했기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과 같이 지나면서 바울의 사랑과 인격과 신앙에 감화를 받아 변화가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잘 받아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빌레몬서입니다.
사회제도개선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노예에서 해방시켜야 합니다.’ 하지 않았다고 바울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빌레몬서, 대단히 중요한 성경입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사랑의 실천자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성경입니다.

바울은 불성실한 노예인 오네시모를 받아들였습니다.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면 자기의 유력한 동지 가운데 한 사람인 빌레몬과의 사이에 거북한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오네시모를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활로써 오네시모를 감복시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이거, 쉬운 일 아닙니다.

빌레몬서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기록이 남아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평양에서 제일 유명한 사회주의 운동가가 같은 감방에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이 감방생활을 하면서 얼마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어느 날, 그 유명한 사회주의운동가가 주기철 목사님의 손을 잡고  ‘형님, 내가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먼저 만나지 않고 형님을 먼저 만났더라면 나는 지금 평양에서 제일 유명한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을 것인데 형님을 늦게 만난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빌레몬서는 바울 서신의 ‘제품 보증서’라고 할 수 있는 성경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말하고 쓴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성경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여러 은사들 가운데 사랑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찬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네시모를 사랑했습니다.
자기가 말한 것을 자기가 모범을 보였습니다. 
어떤 일, 그리고 우리의 삶은 마침표를 잘 찍어야합니다.
빌레몬서가 어떻게 해서 바울 서신의 제일 끝에 놓이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저는 잘 알 수 없지만  바울은 자기의 서신에, 그리고 자기의 삶에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성경인 빌레몬서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헬라말로 ‘데스미오스 크리스토우 예수(δέσμιοξ Χριστού Ίησού),’  바울은 자기가 왜 갇혔는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리고 9절에서 다시 한 번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라고 이 사실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이 말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이 빌레몬서는 바울의 생애 거의 종반부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그의 만년에 로마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 성경이 이와 같은 말로 시작된다는 것은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선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서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호송되어 온 바울은 유대인들 중 지도자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라고 하였습니다(행 28: 20).
이것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와 같은 뜻입니다.
에베소서 3장 1절에서는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에서는 ‘내가 매인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이다.’ 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이것은 바울의 일관된 표어였습니다.
바울의 삶에 있어서 에너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자기가 갇힌 것을 미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합리화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변명도 아닙니다.
바울은 죄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기 전, 가이사랴에 갇혀 있을 때 로마 총독 베스도, 아그립바 왕, 그의 아내 버니게의 합동신문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결론은 ‘바울은 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30절에서 32절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와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나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바울은 로마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싶어서 로마시민권을 이용하여 황제재판을 요청했습니다.
자청해서 구금생활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이 일을 한다.’ 할 수 있어야합니다.

직장생활, 그리스도 예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기업주를 위해서 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직장은 그리스도께서 보낸 자리입니다.
영어로 직업이라는 말, ‘보케이션(Vocation)은 ’소명‘이라는 말과 뜻이 같습니다.

축구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일진일퇴를 합니다.
때로는 공을 뒤로 길게 패스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위기를 면하기 위해 공을 라인 밖으로 쳐 내기도 합니다.
그 마지막 목표는 무엇입니까?
골인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이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골문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모두 축구선수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축구공입니다.
우리의 골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입니다.
여러분, 전심전력 그 골문을 향해 골을 몰고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축구경기는 월드컵보다 더 중요합니다.

회식 자리에서 건배를 할 때 ‘위하여!’ 외칩니다.
선창하는 사람이 ‘위하여!’ 하니까 따라서 ‘위하여!’ 외치고 나서 옆에 앉은 사람에게 ‘지금 우리가 무엇을 위한다고 했지?’ 묻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 성도 여러분은 속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하세요.

이번 주 수요일에 수능고사가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오늘 2부 예배 후에는 수험생들을 위한 안수기도가 있습니다.
수능고사 당일에는 종일기도회가 있습니다.
수험생들,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이 수능고사를 칩니다.’ 하시기 바랍니다.
‘남들이 치니까 나도 칩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 교육제도가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따를 뿐입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절차 가운데 하나이니까 밟을 뿐입니다.’ 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매우 피동적인 삶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행하기 위해 나는 대학에 가고, 대학에 가기 위해 이 수능고사를 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추상적인 것 같지만, 한 점이 더 급한데 너무 한가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수험생들,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지난 금요일 심야합심기도회에서 저는 갈라디아서 6장 8절의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라는 말씀을 들어, 세속적인 목표를 위해서 수능고사를 치는 것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이 시험을 칩니다.’ 하는 것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많이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2005년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올해 나는 무척 바빴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그렇게 바빴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바로 지금부터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라는 깃발을 높이 들고 그것을 보면서 행진해 나가면 우리의 2005년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나는 2006년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살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에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살았다.’ 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0절 뒷부분과 21절에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자기는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는 순수한 것이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하면서 속으로는 ‘헤헤, 나를 위하여’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변화산의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외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그들 앞에서 변형되시어서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주 황홀한 광경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위하여”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여기 “주님을 위하여” 했으니 베드로는 제대로 말한 것 같아 보입니다.
이 말의 속셈은 ‘나를 위하여’입니다.
‘나는 산 밑의 저 복잡한 일들을 떠나서 이 황홀한 상태 속에서 살고 싶습니다.’ 것입니다.
‘저 푸른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그대와 단 둘이 살고 싶다.’는 내용의 대중가요가 있는데 일맥상통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것, 그리스도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에 제사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출32: 6). 
그것은 철저하게 자기들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통회 기도를 하면서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드리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예배드리는 것, 큰 잘못입니다.
이런 예배가 바로 우상숭배로 연결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사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살 때,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것, 행복입니다.
행복 가운데 행복입니다.

목표가 없는 삶, 목표가 불분명한 삶, 헛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삶, 이런 삶을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9장 26절에서 이런 삶을 ‘향방 없는 달음질, 허공을 치는 싸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나는 썩지 않을 승리자의 관을 위하여 살았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살 때 우리의 삶은 활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무기력, 우울, 권태 같은 것들은 나와 관계없는 것들이 됩니다.
꿀벌은 꿀을 많이 딴다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부지런히 일합니다.
바쁜 꿀벌은 어떻다고 했습니까?
‘슬퍼할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이십 년을 보냈습니다.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습니다(창31: 40).
그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14년의 세월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어떤 목표였지요? ‘사랑하는 여인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서’라는 목표입니다.
처음에는 칠 년을 일하면 라헬을 주기로 했으나 외삼촌이 속이고 라헬의 언니 레아를 먼저 주었습니다.
야곱이 항의를 하니까 우리 지방에서는 아우를 먼저 시집보내는 법이 없다고 다시 칠 년을 나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목표가 분명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다고 창세기 29장 20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제3 공화국에 대해서 지금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하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3 공화국 시절에 우리나라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잘 살아보세!’ 이었습니다.
인권문제라든가, 환경문제를 소홀히 했다든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선명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것을 향해 달려갔던 때라는 점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살 때 우리는 환경과 처지가 어떠하더라도 변함없이 일 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의 한 손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여기에서 “갇힌 자”라는 말의 원어는 ‘데스미오스’인데 ‘묶인 자’와 같은 뜻입니다.
얼마나 불편합니까?
그러나 바울은 변함없이 자기의 일을 합니다.
여러 권의 편지 성경을 썼습니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모두 감옥에서 기록한 성경들입니다.
디모데후서도 감옥에서 썼습니다.
오네시모를 새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오네시모는 나중에 감독, 목사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이사랴에 갇혀 있을 때는 누가가 같이 있었습니다.
이 때 바울은 누가에게 자기가 걸어온 길, 자기가 한 일을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누가가 그것에 기초를 두고 기록한 것이 초대교회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사도행전입니다.

바울은 옥중에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더 깊이 묵상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주남선(朱南善)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일제 때 신사참배를 반대해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이 분은 감옥에서 고문을 유난히 많이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분은 목사가 되기 이전에는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삼일만세운동에 앞장섰고,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보내는 일을 했고, 청년들을 선발해서 독립군으로 보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이미 한 차례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 뒤에는 신사참배 반대 때문에 경찰서를 제 집 드나들듯 드나들며 고생을 하였습니다.
1940년 7월부터 감옥생활을 시작해서  해방이 되어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때  감옥에서 나온 분들을 출옥성도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주 목사님에게 감옥에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느냐고 치사를 했겠지요.
이 때 주남선 목사님은 아주 유명한 인사말을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이 사람은 형무소 안에서 바깥 세상을 모르고 주님만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어떻게 세월이 지나갔는 줄도 모르게 살아왔습니다만 여러분은 직접 일본 사람들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지니 참으로 수고가 많았습니다.

주남선 목사님은  ‘나는 형무소 안에서 바깥 세상을 모르고 주님만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더욱 집중적으로 묵상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영성은 아마 감옥 안에서 완성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있는 곳은 달랐습니다. 그러나 하는 일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환경과 처지에 자기를 맞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삶에 환경과 처지를 따르게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살면, 여러분, 큰 소망을 갖게 됩니다.
빌레몬서에 이어 바울이 마지막으로 기록한 마지막 성경은 디모데후서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에서 8절까지에서 바울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서를 기록할 때만 하더라도 바울은 ‘이제 곧 석방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8절에서는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당신에게 손해를 끼친 것은 내가 갚아주겠소.’ 했습니다.
22절에서는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형편이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재판을 받았는데 사형이 언도된 것 같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에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했는데 전제는 부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너는 참수형이다.’ 이런 언도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피를 부어드리는 제사에 비교한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소망의 시선, 소망의 차원을 바꾸었습니다.
땅위에서 하늘로 바꾸었습니다.
“의의 면류관”이라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의의 면류관”은 아까 말한 ‘썩지 않을 승리자의 관’과 같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이 의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 주어지는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일설교를 하는데 한 가지 원칙을 정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될 수 있으면 본문을 성경 66권에서 골고루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은 모두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이름 일람표를 만들어놓고 지금까지 어느 성경에서 본문을 택했는지 적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 본문을 정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본문을 택하지 않은 성경들을 살피는데 빌레몬서가 있습니다.
빌레몬서를 열어 읽는데 시작부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이 말에서 강한 압도감을 느꼈습니다.
바울, 용모로는 보잘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키가 작았다고 합니다.  몸에는 질병이 있습니다.  이제 나이가 많아졌습니다. 감옥에 있습니다.  더할 수 없이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디모데는” 하는 것을 읽으면서 거인처럼 느껴졌습니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살아왔나?’ 이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이 말을 기준으로 2005년을 평가할 때 나는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 앞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이것을 더욱 선명하게 인식하고 살아야하겠다.’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 본문, 이 제목으로 성도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게 된 동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가장 행복한 삶, 가장 보람 있는 삶, 가장 아름다운 소망을 품는 삶, 주님께 가장 큰 칭찬을 받는 삶, 가장 큰 상급이 마련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살아 이와 같이 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우리들이 위해서 살아야 할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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