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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자리 신앙 (눅 1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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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잔치만큼 신나는 자리도 없습니다.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신나는 가락이 있고 춤이 있습니다.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이 있습니다. 그저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축하한다고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함께 기뻐하고 즐겨주면 됩니다. 한 마디로 부담이 없는 자리입니다. 정성껏 축하 선물 하나 준비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담이 있습니다. 어디에 앉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기를 쓰고 윗자리를 골라잡는지를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주신 비유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초대를 받았을 때 먼저 끝자리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들 가운데서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너와 그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 때에 너는 부끄러워하면서 맨 끝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왜 맨 끝자리로 가야 하는가 하면 혹시 나보다 더 귀한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데 누가 더 귀한 사람인지는 초청한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맨 끝자리로 가서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내가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 있는데 주인이 와서 윗자리로 올라앉으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았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귀한 사람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자리라면 더 그렇습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 앉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자리가 어디가 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이왕이면 더 좋은 자리 이왕이면 더 높은 자리에 앉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속마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존경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하고 은근히 뻐기고도 싶습니다. 남들의 부러워하는 눈초리가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일종의 자기 과시입니다. 내가 이만큼 높은 사람이다. 내가 이만큼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자랑하고 싶습니다. 내세우고 싶습니다. 더더욱 현대는 자기 자랑의 시대가 아닙니까? 누가 특별히 알아주기보다는 나를 이렇게 알아달라고 내세우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저 조용히 있으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들로부터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 그 자체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고 부러움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닙니다. 어울려 사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나보다 더 귀하고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나 잘난 맛에 남들 앞에 나대다가는 망신사기 꼭 알맞습니다. 그래서 맨 끝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맨 끝자리가 창피합니까? 아닙니다. 맨 끝자리는 겸손의 자리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장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앞자리는 사람들 앞에서 칭찬과 부러움을 받게 될 수는 있지만 자칫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상급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세워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그 영광을 내가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을 때 처음에는 “제가 뭘” 하다가도 그 칭찬이 계속되다 보면 어느 틈엔가 그럼 내가 그런 말 들을만하지 하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부터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사라지고 그저 내 잘난 것만 생각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소위 인기가 사라지게 되면 그것 때문에 좌절합니다. 거기다가 비난이라도 퍼부어진다면 이젠 아주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이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만 싶습니다. 다 내려놓고 싶습니다. 한 마디로 사망입니다. 그것 때문에 방황합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기를 낮추는 자는 다른 사람들이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높여주시게 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이라고 제게 이런 존귀를 더해 주십니까? 나는 감당할 길 없습니다. 그러니 주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고 오직 주께서 모든 영광 받으십시오.”

이렇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은 어느 자리에 있든지 실망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니 하나님께서 더욱 나를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남들보다 앞서 있을 때 더 조심하시고 더 겸손하십시오. 앞서서 수고할 때 더욱 나를 낮추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며 그 마음을 헤아리도록 하십시오. 혹시 나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은 없는가? 나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사람은 없는가 살피십시오. 그러면서 말 한 마디라도 더 조심하십시오. 더 부드럽게 더 상냥하게 말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격려하도록 하십시오.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칭찬이 따르거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책망이 따르거든 감사히 받아들이며 더욱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나를 낮추시며 나를 바로 세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나를 도와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이는 결국 나 자신을 바로 알라는 뜻도 됩니다.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어디인지 내가 앉아 있을 자리가 어디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끝자리라고 하니까 그럼 내가 제일 못난 사람이냐 그렇게 말하며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끝자리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자리입니다. 거기서부터는 위로 올라갈지언정 내려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끝자리에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앞자리를 그리고 위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앞서 가는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을 본받으며 위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도우심을 바라며 살게 되면,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나를 바로 세우고 바르게 처신하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연약하면 연약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를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도와주시는 가운데 내가 성장하게 되고 바로 서게 되니까 자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언제든지 먼저 끝자리를 생각하시고 자신을 낮추시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대접받기보다는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접하는 사람과 대접받는 사람 둘 중에 과연 누가 더 부담스러울까요? 물론 사람 나름이기는 하지만 대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엇으로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하는 부담이 있을 것이고 대접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내가 대접을 받았기에 무언가 갚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받은 것만큼은 갚아야 한다는 것이 상당한 부담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접받는 사람과 대접하는 사람 둘 중에 누가 더 기분이 좋을까요? 그것 역시 사람 나름이기는 하겠지만 대접하는 것을 부담으로 느끼는 사람은 대접하면서도 마음이 썩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고, 대접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것을 부담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역시 즐거운 마음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으로 대접하고 대접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대접하기는 싫어하고 대접하는데는 아주 인색하면서도 대접받기는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대접받기도 싫어하고 대접하기도 싫어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얼마나 잘 대접하느냐고 하는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대접하고 대접받는 것이 서로간에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생각을 해 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도록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라도 대접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나는 누가 나를 대접해주는 것도 싫어” 이렇게 말을 하지만 그 속마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대접해 주겠다는데 싫다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주 성격적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대접받는 것 자체도 큰 부담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속마음은 누가 대접해 주는 것이 싫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나도 그만큼 해야된다는 부담 그리고 다시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뜻이겠죠. 어쨌든 누가 나를 대접해 준다면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가 나를 좀 초청해주지 않나 하고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다 대접한다고 초청을 하면서 나만 빠졌다 싶으면 그게 그렇게 서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렇게 대접받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먼저 대접하는 자가 되어라” 말씀하십니다.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먼저 주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먼저냐 하면 내가 섬기고 대접하고 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주님께로부터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나는 받는 자입니다. 그것도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생명을 받았고 은혜를 받았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넉넉하게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이젠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하고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먼저 섬겨 주셨으니 나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나눔입니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눌수록 더욱 깊어지고 더욱 풍성해집니다. 대접하는 자의 받는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접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게 되면 대접해서 기쁘고 즐겁고 대접받는 사람이 또한 기뻐하는 그것으로 인해 더욱 내 마음이 즐겁고 기쁘고, 그러다 보니 내 마음의 기쁨이 내 육신의 평안으로 다가와 몸도 건강해지고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게 되면 모든 일이 더욱 힘이 나고 신이 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하는 일도 더욱 신명나게 하게 되고 신이 나서 일을 하다보니 결과도 더욱 아름다워지고 좋아지고 이렇게 연속적으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사람을 기뻐하시며 그와 함께 하시니 요셉처럼 더욱 형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쁨으로 섬기고 기쁨으로 대접하기를 먼저 하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대접해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자기를 초대한 사람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네가 그러한 사람들을 초대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 갚아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 장애자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번 두 번 대접을 받아보면 나도 한번쯤은 대접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래도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나도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오히려 당연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내가 대접을 받았으니 나도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하면서 상대방을 초청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지금까지 대접받은 것을 갚는다는 차원에서 대접을 하게 되니 결국 지금까지 대접한 사람의 공이 사라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접을 받기는 하지만 도무지 갚은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그렇습니다. 몸에 장애를 지니고 있는 분들이 그렇습니다. 그만큼 살기가 힘들다 보니 마음은 간절해도 되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를 청해서 대접을 했다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워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고마운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머리를 조아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수도 없이 말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고마운 마음을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자기도 무언가 보답을 하고는 싶은데 자기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안타까운 마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습니까? 하지만 저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복되게 해 주세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기를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갚을 길이 없으니 마음으로라도 자기들을 섬겨주고 대접해주는 그 사람을 고맙게 여기고 그 사람이 잘 되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바로 그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대신해서 갚아 주십니다.

그러니까 마땅히 내게 되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보다는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더 복된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인지상정이야 서로 대접하기도 하고 대접받기도 하고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정을 더 깊이 쌓아나가기도 하겠지만, 그리고 그것도 마땅히 해야 될 일이지만, 그보다 이처럼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 대접하기를 더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계산적인 세상이야 어찌 그렇겠습니까? 말이야 조건 없는 섬김이요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고 그래서 자원 봉사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는 내가 섬긴 것만큼 나도 받고 싶다는 마음들이 왜 없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와 가까운 사람, 나와 친한 사람, 내게 무언가 도움이 될 사람들을 대접하기를 더 즐겨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사람으로부터 주어지는 상급과 보답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칭찬과 상급이 더 크고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 형편도 어렵고 힘이 든데 우리 쓸 것도 부족한데 그것을 뒤로 미루어가면서까지 선교비와 구제비를 지출합니까? 왜 장학금을 지출하고 교육비를 지원합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로부터도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들이 고맙다고 안 한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주고 베풀고 나누는 것으로 기뻐할 수 있으면 됩니다. 아니 그것을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주님은 또한 가르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나눔과 섬김을 기뻐해야 합니다. 사람의 칭찬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며 하나님이 100배 60배 30배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수록 그래서 도움의 손길이 더욱 줄어드는 때일수록 더욱 대접하고 섬기며 흩어 구제하는 일에 힘을 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은 길가는 나그네를 기쁨으로 영접하여 정성껏 대접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상급을 받습니다. 이 귀한 은혜의 자리에 우리가 다 나아가야 합니다. 그를 위해 누구로부터 대접을 받는다고 할 때, 먼저 맨 끝자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맨 끝자리의 신앙이 그래서 귀한 것이요 바로 그런 자가 자기보다 못한 자들, 그런 자리에 초대받지 조차 못하는 자들을 대접하고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것도 하나님이 사랑해 주시는데 그 은혜가 얼마나 고마운지” 감격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을 돌볼 수 있고 대접할 수 있고 섬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섬김의 손길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도 펼칠 수가 있는 것이요 그것이 사실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십시오. 항상 머리를 숙이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오히려 기쁘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할 수 있는 그런 성도가 되기를 힘쓰십시오.
여기에 더하여 앞에서 이끌고 지도하는 분들의 가르침을 받고 따르며 섬길 수 있기를 또한 바랍니다. 이는 목회자로서 지도자로서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주의 종 역시 여러분들에게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만 하나님의 복 주심을 바라고 여러분을 축복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이 받아 주십니다.

민수기 6장 22절로 27절에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라.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빌 때에는 다음과 같이 빌라고 하여라.
‘주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켜 주시며, 주께서 너를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너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께서 너를 고이 보시어서, 너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그들이 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축복하면, 내가 친히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주겠다.”
그러니까 주의 사자가 이렇게 성도들을 축복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 축복한대로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의지해서 주의 사자는 성도들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고 복을 내려주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요한복음 13장 20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여러분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고 또 주님이 보내주신 주의 사자들을 섬기고 대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 되었던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함께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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