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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황폐한 신앙 (눅 13:3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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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길을 가만히 돌아보다 보면 왜 그렇게 힘들게 살수밖에 없는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같이 마주보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이 같지를 않습니다. 그 차이를 좁혀 보려고 애를 쓰지만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내가 이해를 잘못했을 때는 이해가 되면 아하 그랬구나 하지만 어떤 신념에 관해서는 아무리 설명을 해 봐도 그럴 수 있다고 인정은 해도 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결국 서로 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한 자리가 오히려 더 큰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반대로 예전에는 나를 잡아먹지 못해서 닦달을 하던 사람이 어느 날엔가 갑자기 선한 모습으로 나오게 되면 오히려 그런 상대방을 받아들이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바리새인이 나아와서 예수님께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계획하고 있으니 빨리 여기를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알려줍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이 소식을 전해 주는 바리새인의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하면 정통파 신앙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말씀을 철저히 지키기로 작정을 한 사람들이고 속으로야 어쩔지 몰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는 정말 자기의 작정한 대로 철저하게 말씀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너무 파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하는데는 열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할 수만 있다면 예수를 죽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헤롯이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하니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먼저는 악한 의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가 이곳에서 너무도 많은 이적을 베풀고 또 주옥과 같은 말씀들을 주시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께로 쏠려 버렸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가 다 예수를 좇게 될 것이요 그렇다면 더 이상 바리새인들이 설자리가 없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에서 이 사람이 예수께 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예수는 이단입니다. 그러니 바른 신앙에서 떠나 이단에 빠져드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선한 뜻으로 이렇게 했을 수 있습니다. 비록 자기가 바리새인이라고는 하나 예수의 하는 일을 보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아니면 도무지 할 수 없는 그런 역사들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들입니다. 거기다가 주시는 말씀들이 하나도 틀린 말이 없습니다. 그래 예수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를 귀하게 여기게 됐습니다. 그러던 차에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들으니까 이대로 두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예수를 아끼는 마음으로 찾아와서 이런 말을 전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바리새인은 예수가 더 이상의 이적을 행하지 말고 빨리 이곳을 떠났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살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의 말은 결국 예수가 더 이상의 이곳에서 일하지 말고 떠났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선한 뜻으로이든 악한 의도이든 결국 예수의 하는 일을 멈추게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지금 하는 일을 마치기까지 사흘을 더 머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어떤 일을 하는 가운데 문제점을 발견합니다. 아니 문제점을 찾아낸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접근을 해 갑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를 시험하려고 오는 악한 마귀를 어떻게 물리칠 수가 있습니까?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게 조심해야지, 조심해라 아무리 말하고 또 가르쳐도 그것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심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그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귀는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의지하여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공격적인 자세입니다. 우리의 전신갑주를 보아도 아무리 갑옷을 입고 방패를 손에 들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적을 물리치지는 못합니다. 골리앗이 아주 단단히 갑옷을 입고 나왔지만 그러나 다윗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을 이기는 방법은 바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단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능력이 되어 역사하실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외에는 사단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우리는 긍정적인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면서 나아가게 되면 결국 잘못된 길로 빠져들기 십상입니다.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바라고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스러운 점이 있습니까?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십시오.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나를 의지하고 내 뜻으로 내 마음을 굳게 다잡아 결심하고 나간다고 하여도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나의 결심과 더불어 주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셔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지켜 주셔야 합니다.

바리새인 그는 결국 주님의 일을 훼방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적인 염려와 걱정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나의 욕정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한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매사에 잘못될까 두려워하고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시험에 들까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느 길이든 우리가 주님을 훼방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하고 서로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다소 부딪침이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기보다는 그렇기에 더 큰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고백하며 주님과 함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살펴볼 것은 우리는 자녀를 모으는 자가 되어야지 흩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모으는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한 영혼 한 영혼을 모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찬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넘어지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헤롯을 향해서도 저 여우에게 가서 이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헤롯이 아주 지능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또 어떻습니까?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를 돌로 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자녀를 모으려고 하시지만 너희는 마치 이를 원치 아니하는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뜻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았다면 저들은 전폭적으로 주님을 지지하고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지켜드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많은 이적과 역사를 베풀고 보여주셨건만 결국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댔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을 보고서는 환호했지만 그 속마음으로 주님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들 자신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열심히 수고도 하고 섬기기도 하는데 그 속에는 아직도 내가 살아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진정 교회를 사랑하고 다른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쉽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생각 없이 말을 해서도 그렇고 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다보니 자기는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런다고 하는데 오히려 듣는 이들에게 부담과 상처를 남기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가르침과 삶이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치기는 하는데 내가 그렇게 살지를 못하고 배우기는 하는데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따르지를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은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흩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대로 깨달아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자기 생각대로 살려고 하지말고 주님의 뜻을 항상 먼저 생각하십시오. 자신을 지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시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먼저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시오”

끊임없이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렸던 말씀입니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상 성도 여러분들에게 이를 가르치면서 나 자신이 그렇지를 못했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성도 여러분이 저를 염려하며 기도하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읽으라고 하면서도 정작 저 자신은 설교를 하기 위해서 말씀을 읽었지 제 자신의 양식으로 말씀을 읽지 못했습니다. 기도하라고 하면서도 저 스스로는 마음을 쏟아 기도하지를 못했습니다. 사무엘이 사무엘 상 12:23-24에서 이르기를 “나는 너희가 잘 되도록 기도할 것이다. 내가 기도하는 일을 그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너희가 가장 선하고 가장 바른길로 가도록 가르치겠다. 너희는 주님만을 두려워하며, 마음을 다 바쳐서 진실하게 그분만을 섬겨라. 주께서 너희를 생각하시고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하셨는가를 기억하여라.”라고 했는데 저는 사무엘의 말과는 달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니 그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제대로 된 것이었겠습니까? 그저 말씀이 좋다고 하니 내가 잘 가르치는 자라고 은근히 교만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저의 모습이 무슨 본이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많은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고 나 스스로도 온전치 못한 것은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제가 바로 주님이 모으려고 하는 것을 흩어버리는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주께서 맡겨주신 양무리의 본이 되고 양무리를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할 저 자신이 깨어있지를 못했으니 큰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중에도 우리 가운데 염려함이 있고 하나되지 못하고 잘못될까 두려워하는 마음들이 가득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들 가운데 있는 모든 상처는 바로 종이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종이 패역해서입니다. 제 마음이 썩어 있었습니다. 제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했습니다. 제가 바로 실패자요 실패의 앞잡이였습니다. 여러분을 바로 다스리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안겨주지는 않았는지요? 오히려 여러분을 시험 들게 만들지는 않았는지요?

하지만 이제 그 모든 연약함을 바로 보았기에 바로 깨달았기에 다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말씀도 여러분들과 함께 아니 여러분들 보다 앞서서 읽어나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처럼 뜨겁게 기도할 것입니다. 그 기도의 시간을 단지 많은 시간을 기도한다고 엎드리는 가식적인 모습이 아니라 같은 시간을 기도해도 진정 여러분들을 위해서 중보하며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읍은 의인 한 사람의 축원으로 인하여 진흥한다고 했는데 여러분들에게 있는 어려움이 바로 제가 축원하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물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말씀에 깊이 들어갈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더 뜨겁게 기도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지금까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기도하는 자가 되데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우리 자신들을 사로잡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우리 안에 넘쳐 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모으고 주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황폐한 신앙의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배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인 바에는 나는 그렇지를 못한데 다른 사람이 잘 될 때 부러운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부러워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러다 보니 앞서 가는 사람이 괜히 싫어지고 미워진다면 이건 심각한 일입니다. 잘 되는 사람 부러워하는 것을 넘어서 그 사람을 내 일처럼 기뻐해 주고 더 큰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천방지축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볼 때 염려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염려하고 경계하기보다는 그 사람을 따뜻하게 붙들어줄 수 있고 함께 격려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실상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이런 격려의 사람이 되기보다는 경계하고 외면하지는 않았는지요? 그것이 바로 황폐한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가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가 요한의 집은 주님이 마지막 저녁을 잡수셨던 집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또한 사랑하셨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흔히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부르는 그 집이 바로 마가 요한의 집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초대 교회 성령 강림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지켜보았던 사람입니다. 그 집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의 삼촌입니다. 바나바가 먼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솔선 수범하여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교회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아주 헌신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데 앞장을 섰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되었을 때 모두가 두려워하며 경계할 때 오히려 그런 사울을 붙들어줍니다. 그 사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함께 와서 제자들에게 소개도 시키고 다시 안디옥으로 함께 가서 그곳에서 자기와 함께 교회를 섬기게 하며 말씀을 가르쳐 좋은 일군이요 선교사로 키워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파송을 받아 사울과 함께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그때 마가 요한이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선교 여행을 하면서 너무도 힘들고 지친 나머지 말도 없이 도망쳐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마가를 찾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는 일입니까? 세상에 힘들면 차라리 내가 힘들어서 더는 같이 못하겠다고 했다면 이렇게 화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니 이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 다시 여행을 떠나면서 바나바가 마가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하였지만 사울이 적극적으로 말립니다. 도무지 그런 사람과 같이 동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 그만 둘이 크게 다투고 각각 다른 길로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바나바와 같은 사람도 없습니다. 사울을 좋은 전도자로 키워낸 것도 그렇지만 조카이기에 앞서서 한 사람의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마가를 세워보고자 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던 지요? 그 결과 나중에 디모데 후서에서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디모데에게 속히 내게로 오라고 하면서 올 때 마가도 데리고 오너라 그가 우리에게 유익한 자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렇게 사람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정말 일만 만들고 혼란스럽게만 하는 자 같아도 저를 끝까지 믿어주고 붙들어주고 가르치며 동행하다보면 그가 이렇게 귀한 일꾼이 될 수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 그건 다 주님의 일이 아닙니까? 바로 그런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외면하고 돌아서 버린다면, 위험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경계하고 따돌린다면 그는 언제 온전하게 설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앞에서 고백한대로 나 자신도 문득 돌아보니까 이건 도무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더란 말입니다. 아니 그런 나를 지금까지 주님이 붙들어 주시고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어찌 이 자리에까지 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믿고 따라주지 않았다면 어찌 제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니 실은 제대로 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하는 척 한 것이지만요. 하지만 그런 저를 여러분이 믿고 따라 주셨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에 이만큼이라도 깨닫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굉장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 나도 감히 말하지만 사도들 중 하나라 그렇게 큰 소리를 쳤는데 은혜 아래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낮아지더니 나중에 마지막 편지에서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참 신앙이 무엇입니까? 나를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너무도 부족하고 연약한 나를 그래도 주님이 아껴주시는데 주님이 아껴주시는 자를 우리 역시 아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린아이 하나만 실족케 하여도 연자맷돌을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져짐만 못하다고 했는데 어린아이가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있습니까? 그저 말썽만 부리지를 않습니까? 그래도 때로 야단도 치지만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고 키워나가다 보니 어엿한 성인으로까지 자라는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어머니의 마음으로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돌아보아야 하고 붙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황폐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이런 살아있는 아름다운 사랑을 품은 믿음의 사람들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황폐한 믿음이 사람으로 그저 남아 있다면 주님의 은혜를 더 이상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실패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며 옆에서 넘어지는 자가 있을 때 너 때문에 나도 넘어질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고 붙들어주는 아름다운 사랑이 우리 안에 넘쳐야 할 것입니다. 처음 의도야 어디에 있든 결국 하나님의 일을 망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주님이 마음껏 역사하시도록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귀한 믿음이 우리 안에 넘쳐나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끝까지 믿어주고 끝까지 격려해주고 끝까지 붙들어주고 이끌어주는 참 사랑의 사람 좋은 믿음의 사람들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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