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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신앙의 길, 참된 신자 (눅 14: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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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헌에 대해서 심심찮게 이야기되고 있는데 개헌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얼른 ‘왜 또?’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마디로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짧은 헌정사 가운데 진정한 필요에 의해서 개헌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는가를 생각하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개헌을 거론하는 사람들은 그 때마다 나름대로 변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필요하기만 하다면 헌법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다 바꾸어야합니다. 그러나 다소 부정적인 견해이긴 하겠지만 실제 과거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정말 그들이 개헌해야하겠다고 내세운 이유들이 진정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 강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까지 모든 개헌 논의는 그것에 어떤 논리를 내세웠든지 간에 다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고 그때마다 특정한 누구를 위해서 또는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개헌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며칠 전 어느 신문의 사설에서 ‘이 판에 개헌 논란까지’ 라는 제목을 보았습니다. 그 제목의 한 단어 한 단어가 정말로 공감이 갔습니다. 그 중 몇 군데를 인용해보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력을 잃어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더 나은 정치, 더 나은 나라를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수십 번이라도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러나 당면의 위기와 난제만으로도 견디기 버거운 이 판에 또 개헌론이란 그 누구를 위해서라도 득될 것이 없다. 더구나 변론이 주로 특별한 정치적 의도를 가진 인사들에 의해 제창된다는 것도 그것이 일종의 정치의 수단임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개운치가 않다. 그것을 이런 시점에서 부각시키는 것은 헌법 문제이전에 정치투쟁이며 따라서 피곤하고 의아스럽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그 사설의 논지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이 땅을 떠나가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은 이 땅을 떠나면서 자녀교육이나 구직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어쩌면 그 속에 또 다른 더 큰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개미들이 도망가는 이유처럼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주 민감하게 감각적으로 느끼는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작금의 이 나라의 혼란과 불안은 매우 안타까운 지경이고 더구나 세상과는 정연히 달라야할 교회와 그 주변 인사들에게까지 이러한 일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슬프게 합니다. 더욱 답답한 것은 오랜 과거에 그리고 더 가까운 과거에 있었던 똑 같은 그 모습이 오늘날에도 정말로 그대로 또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부분들을 잘 알 수 있는 오늘 누가복음 14장에서는  두 가지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안식일에 바리새인 중의 두령이 예수님을 초청하여 예수님이 그 집에 갔더니 고창병자가 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그를 고치신 후 여러 가지를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고창병이란 몸 부분 부분에 물집이 생기는 병으로 특별히 배에 복수가 가득 차서 배가 불러오는 병인데  옛날에는 불치병으로 알려졌습니다. 얼마나 딱한 환자입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과 또 다른 많은 무리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참된 신자와 참된 신앙의 길에 대해서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당시는 앉아서 배우고 서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면서 가르치는 것이 선생님들의 교사방법이었습니다.

먼저 안식일에 바리새인 그 중에서도 두령이 예수님을 초청한 사실을 볼 때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고 회당에서도 더 이상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아 예수님은 그 곳에서 말씀전하는 일도 하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준비까지 하였고 심지어 살해음모까지 세우고 있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미 거부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면서도 바리새인 중에 두령이 왜 예수님을 초청하였을까요? 그 이유로 우리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려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1-2절) 라는 말에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고창병은 배가 불러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불치병 환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안식일날 바리새인의 두령 집에 와서 있을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일부로 데려다 놓았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어떤 행위를 할 때 목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목적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고 바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하나의 비극일 수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는 아예 말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당초의 목적이 나쁜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당초 그 목적은 좋았지만 중간에 나쁘게 변질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과 관계되는 사람뿐만 아니라 당사자 역시 불행입니다. 정치인이라면 그 정치에 영향받는 사람들, 종교인 특별히 종교지도자라면 그와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이며 자기 자신도 불행입니다. 우선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을지 몰라도 반드시 그 사람에게 불행으로 귀착되도록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나라이든 하나님의 나라이든 악하게 변질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지 않으십니다. 세 번째는 겉으로 보기에 그 목적이 참으로 좋지만 겉과 달리 속에 나쁜 목적이 있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아주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며 이것을 가리켜서 위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구나 이런 일이 세상 나라나 세상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거룩해야할 신자들, 교회, 그리고 성직자들에게 있을 때 이것은 정말로 나쁜 일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있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일은 그리고 세상은 어둠의 곳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런 세상을 볼 때마다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합니다. 정말로 세상과 달라야할 교회마저 위선이 있고 그 목적에 겉과 속이 다르다면 그 사회와 그 나라는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이미 언론에서 수없이 외국이민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이 이 땅에 희망이 없음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감지되었기 때문에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의 신자들이나 성직자들까지 그러하다면 이 땅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그리고 알지 못하게 느껴진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주어야하는 임금을 착취하는 일들, 교회 이름을 이용하여 자기 명예를 추구하고 이기주의적으로 살아가는 일들, 교회를 하나의 멋진 장식품으로 여기는 일들, 이런 일들이 바로 위선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이 땅을 떠나게 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또한 죄송하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성직자들이 성직을 이용하여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일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불러일으키기 마땅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우리 주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1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이 말씀을 하신 곳이 어디이며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고 하니 교회로 말한다면 초대형 교회인데 하필이면 주님께서 왜 이렇게 수만 명이 모인 곳에서 말씀하셨을까요? 인기 있을 때 즉 잘 될 때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갈 때부터 생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즉 율법사들은 정말로 오랫동안 많은 것을 누렸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지도할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이요 서기관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세월이 400년 이상 되다보니 처음에 거룩했던 것과는 달리 대접받고 존경받으면서 누리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었고 부와 명예도 주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없어졌으며 그 중에서 특별히 불쌍한 사람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다 없어졌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눅6:1-2)...예수님의 제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이삭을 잘라먹었는데 그들처럼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할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한다하여 비판하는 일들만 하였습니다. 그들은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았다고(눅6:6-7) 증거하고 있습니다. 손 마른 사람이라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정말로 이런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예수께서 이 사람을 고쳐주셨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이들은 송사할 꼬투리를 잡으려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18년 동안 등이 굽은 사람을 고치시는 것을 엿보았습니다. 회당장이라면 이 불쌍한 사람을 마땅히 사랑하여야합니다. 설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예수께서 고치셨다면 기뻐 반겨야할 일인데 안식일날 이 일을 행하였음을 책망한 것이었습니다(13:10-13). 여러분이 보신 것처럼 그 시대 종교지도자들의 관심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단 하나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인 부와 명예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누리는 것과 그들이 가진 부와 명예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옛날이나 조금 덜 오래 전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을 미워하면서도 초청한 이유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참된 신앙의 길이란 어떤 것이고 참된 신자들이란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가르치셨는데 먼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신자들, 즉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여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28-32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이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것을 알고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신앙의 길, 참된 신자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이 길은 세상 사람들 즉 보통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벌이고 손님을 청하였는데 잔치할 시간에 사람들이 오지 않아 종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 모두 온갖 이유를 대면서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16-20절). 예수 믿겠다고 나선 사람들까지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밟으려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6-27절)..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 함은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 십자가 즉 자기가 해야할 몫이 있다는 말씀으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길이 바로 신앙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법이나 제도 심지어 교리 이전에 사람을 중요시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란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서는 황당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안식일은 특별히 병들고 외롭고 가난하고 서러운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12-13절).. 제도나 법이 아니라 사람을 중요시 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말씀하시는 것은 참된 신자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0-11절).. 하나님께 대하여 스스로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람들에 대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참된 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번째는 자기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참된 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절).. 정리하여 나누어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쓰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쓰지 아니하고 쓰기 싫어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 즉 자기 소유를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라고 다 온전한 신자들이 아닙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즉 Church member일 뿐 Christian이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 본문에서는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다 연유가 있어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하니 주인이 노하여 빨리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 하였습니다(21절). 누구든지 다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연유로 교회에 나왔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온 이후 어떤 신앙을 가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전히 받는 것, 남에게 주장하는 것을 좋아하면서 신자인척 하는 Church member에 불과한가? 아니면 이제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며 받은 것이 작든 크든 간에 또는 많든 적든 간에 받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극히 주의해야할 것은 누구든지 잠시 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차 하는 순간 그렇게 잘하던 모습이 추한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도 그러하고 교회도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교회 역시 이를 명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소원하시는 바 가장 아름다운 신앙,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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