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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감사는 상황을 넘어서 이루어집니다 (단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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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은 구약의 수장절에서 기원하여 우리의 일년 가을걷이를 한 후에 드리는 감사의 절기입니다. 유대 달력으로는 가을철인 7월 15일부터 22일까지의 일주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양력으로 따지자면 11월 중간 7일 정도를 계속해서 나뭇가지로 만든 초막 속에 거주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분의 높낮이 없이 모두가 한곳에 모여서 잔치를 벌이면서 즐거워합니다. 이 수장절은 본래 타작마당과 열매 소출 즉 과일, 올리브 열매 그리고 포도 등을 저장하는 것을 감사하고 기념하여 드리는 절기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농산물을 소출한 후에 그것을 창고에 저장한 후에 기념하여 드리는 감사의 절기입니다.

이 장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복절이라고 할 수 있는 유월절, 맥추절이나 성령 강림절이라고 할 수 있는 칠칠절과 더불어 그들이 지켜온 3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신명기 16장 14절처럼 온 백성이 한자리에 모이되 본인과 자녀와 남녀와 노비, 성 중의 레위사람, 객, 고아 과부 등 모든 신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를 그 순간에는 다 잊고 함께 모여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동안 결석으로 교회에 자주 나오지 못했던 성도들까지도 같이 마음에 청빙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라 말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날은 신분이 자유롭지 못하는 종들도 이 감사의 잔치에는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 당시 소외 계층이요, 가난한 사람이었던 사람, 기업을 갖지 않았던 레위사람, 그리고 과부, 나그네, 객 모든 사람이 참여하여 다함께 즐거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높낮이 없는 모두가 동일한 값지고 귀한 백성으로서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의 발안입니다. 더욱이 이 잔치는 일주일 동안이나 지속적으로 이어짐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참예하며 하나님께 대한 이들의 은혜를 나름대로 표현하며 지냅니다. 오늘 우리가 저녁에 찬양을 준비한 것과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의 찬송을 드리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삶의 길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되새겨보며 삶의 여유를 찾고 진정한 감사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여러분에게 15가지 이상 감사한 일을 적어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숙제 다 하셨습니까? 여러분 15가지 적어보고 그래도 모자라면 다른 종이에 100까지 적어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저는 적다보니까 26가지 적다가 봉투에 흰 난이 부족해서 그만 접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이에 적도록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잠시 돌이켜보고 내가 얼마나 감사한가 하나님의 은혜에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는 그 감사가 한이 없고 내 어려웠던 마음의 일들이 또 서서히 물러가고 기쁜 마음이 감도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한 주간 동안을 감사의 절기로 지내며 그들의 삶을 다시 재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말로만 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16장 16-17절을 보면 공수 즉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않고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서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감사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직임과 사물을 맡은 투철한 청지기로서의 자각과 더불어서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활의 실제로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말씀드린바 대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드림과 더불어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나누어줄 선물을 가지고 옴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즉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께 최선을 드리고 수평적으로는 이웃에 나눌 수 있는 사랑을 나눔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준비한 과실이나 또 여러 가지 준비한 내용들을 나누는 사랑의 사항과도 같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추수감사절을 보내며 우리는 이 시대 속에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감사절을 지키며 감사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감사의 사람이 되려면 진심어린 감사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진정한 감사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다니엘서 6장에 나오는 다니엘을 보면 고통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어려운 상황 중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기대하고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진정한 감사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전후의 사정을 우리 성도들께서 잘 알고 계시겠지만 또 다시 한번 설명을 드립니다. 다니엘이 이국의 포로로 잡혀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출중하게 되어서 다리오 왕의 총리로서 전국을 치리하는 높은 권좌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변사람들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습니다. 일국의 노예로 팔려온 신분으로 그 나라의 수석총리가 되었다는 것은 자기들이 볼 때 도무지 맞지 않은 일이고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볼썽사나운 처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간교한 계책을 꾸밉니다. “다리오 왕이 직위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니 그의 왕권이 연약함을 시비하여서 왕권을 강화해야하니 앞으로 30일간은 어떤 누구도 왕 외에는 절하거나 구하지 않게 하소서. 왕 외에 다른 것에 힘을 구하는 것은 바로 왕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니 그러한 자는 왕께서 사자 굴에 던지소서.” 이와 같은 말을 들은 다리오는 귀가 솔깃했습니다. 간신배의 말을 듣고 그럴듯하게 여겨서 그 조서에 어인을 찍고 금령을 내려서 전국에 반포합니다. 이 소식이 다니엘에게 들려집니다. 다니엘은 그 계책의 정확한 목적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날마다 세 번씩 감사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다니엘 자신을 목표한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이제까지 드려온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멈출 수 없었고 감사를 멈출 수 없었고 예배를 멈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고통 가운데 아픔 가운데 거한들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과 감사를 잊을 수 없고 뜨거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잊을 수 없다 생각하여 그는 하나님께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기를 지속했던 것입니다. 즉 다니엘의 감사라는 것은 그를 노리고 있는 성령의 위협의 칼날이 그의 목을 조이고 달려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의치 않고 하나님을 선택하여 그의 삶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진정한 감사하고 하는 것은 주어진 형편 때문이 아니라 믿음과 기대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따라합시다. “상황에 종속되지 않는 믿음.” 상황에 종속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상황과 형편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형편을 넘어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기대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형편이 이러니 감사합니다.”라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거기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여건이 내 마음에 감사하지 못할 만큼 가슴 아픈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변하여 이루어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기대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는 것이 진정한 감사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다니엘은 지금 일어나는 일말의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의 삶에 상황은 최악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앞에는 죽음의 사자가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벌리고 달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하루에 세 번씩 무릎 꿇고 일정대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때 진정한 감사를 드리게 됩니까?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감사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도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한 여러 번 면모를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11절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싶은데 예수님의 손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리고 축사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너무나 작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하며 그것을 가지고 기적의 씨앗을 삼으신 것을 봅니다.
마태복음 11장 21절을 보면 벳새다와 고라신에 대하여 그들을 한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주의 선지자를 통해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그들은 귓전을 스쳐 듣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한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귓전을 스치고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탄식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은 또 다시 감사합니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본인이 스스로 지혜롭다 슬기롭다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쳐 지나갔지만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와 같이 순진한 자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여 구원의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소수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주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부했어도 소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작은 것을 축복하시는 것을 알고 예수님은 그 작은 일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망해가도 그 가운데 흥하고 있는 작은 씨앗을 보고 우리 주님은 감사하신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 감사하는 요한복음 11장 41절의 장면을 우리는 또한 보게 됩니다. 그의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어 시체가 되어 베로 동이고 썩은 냄새가 나지만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감사합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 오히려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17-19절을 보면 또한 감사의 진정한 모습이 나옵니다. 최후의 만찬석상입니다.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 또 떡을 가져 가라사대”라고 감사의 기도를 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 밤이 지나면 나는 저들에게 잡히게 되고 십자가의 고난을 지게 되고 이제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 고통의 장면에 이르게 될 텐데 그 순간에도 제자들을 앞에 놓고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들고 기도하시는 장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진정한 감사라는 것을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믿음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대한 기대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이 형편을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실 것을 믿기에 그것을 가지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니엘 6장 23절을 보니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을 의뢰하였다는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다니엘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하였기 때문에 감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기에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출애굽의 장면을 아시지요? 열 고비를 넘어서 그들은 애굽을 출애굽하게 됩니다. 광야의 여정을 아시지요? 40년 걸려서 광야를 건넜습니다. 가나안 정복의 전쟁을 아시지요? 그들은 여러 해 걸려서 고통을 겪으며 가나안을 마지막까지 정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결국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었는데 그와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보니까 결국 현재에 놓인 것은 상황일 뿐이고 상황을 극복해서 해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봅니다. 믿음은 그와 같은 것을 알기에 내게 주어진 형편과 여건을 보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하나님의 은혜와 앞으로 이루어질 섭리와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며 소망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 안에서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감사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이루어진 기대는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이루실 그의 약속과 백성에 대한 사랑을 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니 이미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그들의 사자의 입을 봉하여서 바로 다니엘을 해치지 못하였다고 다니엘이 말씀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나는 사자 굴에 던져져도 사자의 입이 봉해져서 내가 살겠다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뜻이 내가 죽는 것인데 나는 그 하나님에 뜻에 따라서 죽는데 내게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니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감사하니 나는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하지 않습니까?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의 기대와 소망과 감사의 여건, 내가 어떤 형편이 되어서가 아니라 형편이 안 되어도 그 가운데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운전을 하다가 신호등이 깜박 바뀌더니 빨간불이 되서 자동차를 세웠습니다. 시간은 급박했지만 신호등이 바뀌니까 서있었습니다. 마음은 급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신호등 조금 있으면 곧 색깔이 바뀌어 내가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신호등이 10분 지나 바뀔 수도 있고 20분 지나 바뀔 수도 있다고 한다면 아마 거기서 기다리는데 그렇게 편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상황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게 한다고 합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섭리한다면 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실 것을 우리는 알기에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기대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대하는 것입니다. 확신하는 것입니다. 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와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기대와 믿음과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형편 가운데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사람,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대하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는 사람은 어떠한 형편과 여건 속에 있어도 그 형편 때문에 괴로워하고 형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형편 때문에 마음 상심해하는 것은 아니라 그러한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기쁨의 사람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결과나 대가에 연연해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감사를 이룰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니엘의 감사는 어떠한 좋은 결과를 바랄 처지가 아닙니다. 가슴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그는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지경입니다. 하나님 이런 어려운 지경에도 내 마음에 감사가 일어나니 참 감사합니다. 저도 어차피 15년간 이 교회에 바로 이 강단에서 이 교회에 섬김의 사역을 이루어 왔습니다. 참으로 여러 성도님들을 만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15년 동안 느낀 것은 15년 내내 어려운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15년 내내 어려운 분들이 많이 계세요. 삶이라는 것은 한편이 양지이면 한편은 음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햇빛 드는 곳이면 빛의 이면에는 그늘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좋은 시기에도 어려운 사람은 반드시 있습니다. 목사를 찾아온 사람은 좋은 일이 있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려운 일이 있어서 간절한 기도를 부탁하러 오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의 삶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을 내 삶의 최종적인 사람의 결과로 보면 우리는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픈 것입니다. 우리의 주어지는 어떤 대가와 결과에 연연하다 보면 우리의 삶은 편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 심정이 가장 편안할 때가 언제죠? 너무나 감격스럽고 감사할 마음이 있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좋은 일이 있어서만 감사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가 있든지 그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쁨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결과만 보고 감사하다면 우리 삶은 감사하지 못하는 결과와 여건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누구든지 근원적인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바를 지키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깨뜨림으로 우리는 낙원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근원적으로 버림받은 고독감과 버림받은 소외감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됐다는 마음의 죄책감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은 늘 슬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슬픔을 믿음으로 극복하게 되면 내 삶에 대한 현재 상황이나 결과나 대가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로운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현상적인 형통만이 기쁨이라면 우리 삶에는 근본적인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현상은 늘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캐리라고 하는 인도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요즘도 윌리엄 캐리회는 선교에 있어서 성경을 번역하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을 하게 됩니다. 주로 성경을 번역하게 되고 그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성경을 번역할 만한 좋은 사전이나 여러 가지 도구들이 많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어렵게 말을 배워서 사전도 만들고 또 문법책도 만들고 자료도 만들어서 후배 선교사들까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는 열심히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법 어느 정도의 결과를 이루었는데 어느 날 먼 곳을 출타해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영국에서 그에게 인도 선교를 위해서 좋은 인쇄기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느 정도의 결과가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성경을 조각조각 만들어서 가고 있는데 그만 돌아와서 보니까 그 사무실이 불이 나서 몽땅 타버렸어요. 얼마나 가슴이 무너지는 일이겠습니까? 그 오랜 기간 동안에 정말 어렵사리 성경을 번역할 수 있는 모든 기초를 마련해 놓고 또 성경을 번역하고 그것을 조각조각 만들어내고 있는 중인데 그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그 순간 펄썩 주저앉아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를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다시 그 일을 진행합니다. 그는 어떠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기에 그는 죽기 전에 이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더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가변적인 삶의 상황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갈 수도 있고 우리의 삶의 상황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바라던 대가나 결과가 내게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최악의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 최선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내가 최선을 다한다는 자체가 감사함이며 그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축복일 것입니다. 제가 어쩔 수 없이 여러 성도들을 보니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죠? 많이 가지고 넓은 범위 속에서 여러 가지를 관리하고 또 소유하고 있는 분들이 반드시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진 분은 많은 것을 관리해야 되고 그만큼 또 많은 수고를 해야 되고 많은 고통도 있고 많은 어려움의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많이 가졌다고 해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고 많이 가졌건 적게 가졌건 제가 행복해하는 사람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자기 삶에 감사하는 사람,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삶에 감사한 사람이 가장 행복한 성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물은 포장된 선물이라고 늘 말씀드렸습니다. 좋은 선물일수록 상자에 담고 상자를 포장지로 포장하고 포장지 더렵혀질까 봐 신문지로 싸고 또 봉투에다 넣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신문지에다 뭘 싸서 주니까 ‘신문지 쪼가리를 주네’ 그러고 버리면 그 선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신문지를 잘 뜯어서 깨끗하게 쌓여져 있는 포장지를 또 풀어서 또 상자 안에 있는 그와 같은 선물을 꺼내서 결국은 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선물은 최소한 포장지 푸는 수고는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게 어떤 결과나 대가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어 이게 뭐야?’ 이렇게 생각하서는 안되고 고통의 껍질을 벗겨내고 아픔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어떤 대가나 결과가 당장 내 눈앞에 있어진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회심하고 나서 기쁜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회심하고 좋은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바구니 타고 성벽을 타고 내려 도망가야 했습니다. 안디옥에서는 핍박을 받아 추방되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로 맞아서 죽었는지 알고 쓰레기처럼 내다 버렸습니다. 빌립보에서는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 하였으니’라고 그의 고난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었더니 감사한 일이 생겼다기보다 인간적으로 고통스런 일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고통 속에 외친 내용이 무엇입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수많은 고통을 겪고 나니 그의 마음속에 외쳐지는 소리는 예수 믿었더니 이렇게 고통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대가를 받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대가를 받지 못해도 섬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대가를 받지 못해도 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대가를 받지 못해도 정말 내 마음속에 기쁨으로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한 것입니다. 결국 최후적인 결과나 대가에 초연한 마음이 하나님의 사람을 믿음의 인물이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감사의 고삐를 놓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감사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감사의 최고의 수준은 ‘하나님 내가 어떠한 여건 가운데도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할 수 있는 마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인간의 물질적 만족의 수준이 끝이 있겠습니까? 결과나 대가 연연하다면 우리는 날마다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웃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여건을 초월하는 그 이상의 순간에 서면 우리는 의연한 사람이 되어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인격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와 같이 인정한 감사한 축복을 위해서 어떠한 여건 속에서도 상황을 넘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대가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진정한 감사는 최악의 정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오늘 다니엘은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 누구하나 도와줄 수 없고 누구하나 그 문제를 대체해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절망 속의 감사가 왜 최고의 감사입니까? 감사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절망 속에서 감사하며 믿음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그 상태 속에서 기대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고백하겠습니까? 절망 속에 감사라는 것은 최고 수준의 믿음입니다.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수준입니다. ‘절망 속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하는 여호사밧의 기대처럼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오직 주께 있나이다’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실 것임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기자의 고백처럼 우리는 최악의 고통의 순간에서 주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실 기쁨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망 속에 감사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고통 속에 우리의 손을 내뻗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탕자가 재산을 반분하여 아버지로부터 집을 나옵니다. 다 탕진하고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려고 돼지우리에 가지만 그것조차 먹지 못할 때 그는 배가 고파 이전의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 여러 종이 잇는데 아들은 못돼도 종중의 하나만 써주시면 나는 그래도 매는 채울 수 있을텐데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그것으로 그의 인생은 다시 바뀌는 것을 봅니다.

절망 속에 감사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손을 뻗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한줄기 서광이 비취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괴로울 때 있죠? 괴로울 때 있습니다. 정말 왠지 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절망 속에 빠지는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여러분 내게 왜 괴롭게 절망하는가? 내가 정말 왜 이 세상 살고 싶지 않은가? 하는 이유들을 한번 쭉 써보세요. 왜 살고 싶지 않은가 이유를 써보시라고요. 그 절반 딱 나눠서 내가 소망을 가져야 될 이유, 내가 절망하지 않아야 될 이유, 내가 살아야 될 이유를 쭉 써보세요 그러면 어느 것이 더 길게 나가겠는가? 그 길이를 비교하셔서 결정해 보세요. 여러분 짜증날 때 있어요. 짜증날 때 있습니다. 짜증나는 이유에 대해서 쭉 써보세요. 그리고 내가 짜증나지 않아야 될 이유에 대하서 한번 써보세요. 어느 쪽이 더 긴가 한번 재봐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뻐도 그 이면에는 슬픔이 있습니다. 아무리 웃어도 그 이면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날씨 맑으면 흐릴 때도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은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인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지 우리를 달아보는 마지막 관문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 우리를 놓아두시고 그 가운데 감사하며 우리의 믿음을 발휘하는가 아니면 절망 속에서 우리는 한탄하며 우리가 저 깊은 계곡 속으로 떨어지는가? 하는 마지막 관문을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범사에 감사하시는 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시편의 많은 글들이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절망의 상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주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의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 만찬을 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감사하셔야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진정한 빛을 누리는 은혜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내 상황과 주어진 여건 때문에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대가나 결과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대하며 감사하는 것,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대하고 감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감사의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교회 목사님이 날마다 예배를 드리는데 개회기도에 꼭 날씨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 맑은 날씨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촉촉한 비가 내려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이와 같이 구름이 껴서 또 이렇게 땡볕 가운데 덥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눈이 펄펄 내려서 감사합니다. 바람이 불어서 시원해 감사합니다. 하나님 더워서 곡식 익어서 감사합니다, 추워서 추위 가운데도 또 우리가 마음 웅크리지 않고 지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겨울에 너무 너무 추워서 아주 지독하게 춥고 눈보라도 치고 날씨가 너무 나쁘고 길이 다 얼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절반 정도도 교회 못 나와서 예배당에 성도들이 절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때는 이때다, 오늘 우리 목사님은 절대 날씨에 대한 감사를 안 할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마음이 합치된 것처럼 목사님이 무슨 기도를 하시나 다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나쁜 날씨가 1년에 한두 번밖에 없음을 감사합니다.

우리 삶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왜 어려워하는가? 이제까지 잘 지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어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잘 지냈기 때문에 내가 어려워하는 거예요. 전체적인 구도에서 보면 어려운 순간보다 기뻤던 순간이 훨씬 많은 것입니다. 계속 살아가면서 어려웠으면 지금 어려운 것 어려움으로 느끼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까지도 은혜를 주셨는데 지금 고통을 주셨다면 또 고통을 해결해서 기쁨으로 변해 주시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주님께 감사할 때 우리에게 은총의 빛이 비취게 되며 우리의 형편 때문에 아니라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결과나 대가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감사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우리 삶이 기쁨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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