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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슴에 담겨진 보배 성경 (고후 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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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담겨진 보배 성경 : 고린도후서 4장 7-10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동창과 고향사람과 종친회원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물론 요즈음은 그 반대물결이 일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너무 미미하다.
이런 사회의 분위기에 우리들도 편승을 하여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름 있는 대학에 다니면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리고 누가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고 물으면 다니고 있는 학교를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러나 이름이 별로 나지 않은 지방의 학교를 다니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기가 죽어 있다. 누가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고 물을까봐 지레 겁을 낸다. 누가 물으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자신 없게 대답한다.
자기가 사는 지역과 출신과도 무관하지는 않다. 어느 곳이 고향인지 그 고향 출신은 누가 있고 ... 성도 한몫을 챙겨간다 . 아는 것의 시작은 여기서 되어진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용보다 조건이나 겉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 사회는 사람을 평가할 때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어떤 능력과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학벌이나 출신 지역, 가문과 같은 외부적인 것들을 보고 평가하는 경향이 많다. 이런 사회 경향에 편승하여 우리 학생들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오직 다니는 학교만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쯤 이런 성향이 바뀌게 될지 모르겠지만 빨리 바뀌는 것이 우리 사회의 발전과 우리 후손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하여서 유익하다고 할 것이다.

1. 어떤 그릇입니까?

사도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질그릇이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여기 질그릇이라 함은 진흙으로 빚어서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막 그릇'을 말한다.

우리도 사람들을 흔히 그릇에다 비유한다.
그 속에 무엇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도둑의 생각과 행동을 담고 있으면 아무리 겉모습을 요란하게 치장을 하여도 우리는 그를 '도둑놈'이라고 말한다.
서울대학교를 나오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대법관의 옷으로 치장을 하였다 할지라도 어떻게 하면 뇌물을 많이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도둑놈'이라고 말한다.
이런 그릇을 가리켜 겉만 멀쩡한 금그릇이라고 한다.
그러나 비록 초등학교를 나오지 못하고 많은 재물은 없을지라도 인품이 인자하고 자비로우며, 남의 어려움을 자신의 어려움으로 생각하고 돌보는 사람이면 그를 [동네 어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의 도움 을 청한다. 이런 그릇은 속이 꽉 찬 질그릇이라고 한다.

바울의 외모는 어떤가?(행22:3)
가장 엄격한 도덕생활을 하던 바리새파 사람이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다.
당시 유명한 법학자 가말리엘의 수제자로서 엄하게 교육을 받았다. 이런 정도라면 여러분,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바울의 외모는 어떤 그릇에 해당할까? 아마 금그릇에 해당할 것 같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자신을 질그릇이라고 하였다. 여러분, 바울의 생각이 왜 보통 사람들과 이렇게 다를까?
그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사람의 외모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0:12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 축에 스스로를 끼어 넣거나 그들과 견주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가 만든 척도로 자기네 스스로를 재고, 자기네가 세운 표준에다가 자기네 스스로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세운 기준은 전부 자기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다. 남들보다 자신이 조금 뛰어난 것이 있으면 자신의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왜 이렇게 기준을 세울까? 그래야 스스로 우월감을 가질 수 있으며,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기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런 세상의 가치관이 허무함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자랑해 보지만 그것은 결국 썩어 없어질 것들이며, 또한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과 어리석은 것을 자랑하겠다'고 말했다.(고후12:10) 바울은 스스로 예수님 앞에서 질그릇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바울을 더욱 극찬한다. 겸손한 사람,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골라서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그릇이냐 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그 속에 어떤 내용물을 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욱 소중함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어떤 그릇같이 생각되는가?
어떤 그릇인가 하는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기를 바란다.

2.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작 신경을 쓰고 유념해야 할 것은 그릇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그 그릇 속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하는 것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2세가 왔을 때 한 여성 도예공을 특별히 만났다고 한다. 영국 박물관에 전시된 도자기에 감복하다가 이번에 한국 방문 길에 제작자를 만난 것이다. 그 여성이 만든 도자기를 본 즉 과히 탄성이 절로 나올 만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영국 박물관에 전시되어서 여왕의 마음을 감탄하게 할 도자기에 어린아이가 볼일을 보면 그렇게 아름다운 도자기도 요강단지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릇으로 비유되는 우리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하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보배가 담겨 있다고 한다. 사도 바울 속에 담겨 있는 [보배]는 무엇일까?
"보배를 질그릇에 담았다"고 말한 바울은 10절에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보배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죽으신 것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을 살리시려고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 하나님으로 가만히 계셔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건만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생로병사를 겪어야 하는 사람이 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귀신의 노예가 되어서 거짓을 말하고 파벌을 지으며, 미워하고 시기하며 사는 우리를 보시고 탄식을 하였다. 그만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자기를 위한 생애를 포기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사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대신 죽으셨다. 그것도 저주받은 자들이 죽는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셨다.


3, 가슴에 예수를 담은 자의 행복

이런 예수님을 본받아 헌신적인 삶을 살겠다는 것이 바울이 생각하는 보배이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돕는 것이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것이 바울이 생각하는 보배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이자 행복인가? 우리 인생들에게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보배가 있을까? 예수 안에 해답이 있고 예수 안에 은혜가 있고, 예수 안에 사랑이 있고 , 예수 안에 평강이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외형이 어떤 그릇이어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학력으로 치장이 된 그릇이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그릇을 보고 실망을 하는가? 자신의 출신이나 고향을 보고 실망하던 사람들!! 아니면 긍지를 가지는가? 그릇 때문에 울고 웃지 말고 그릇에 담긴 내용물을 보고 울고 웃는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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