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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주받은 도시들 (마 11: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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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도시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태 11:20-24)

도시 문화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인구 집중 문제, 교통 문제, 주택 문제, 대기오염 문제, 환경 파괴 문제, 범죄 문제 등이 그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나 도시가 크면 클수록 그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도 큰 것입니다.
고대 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도시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곳도 있고, 그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들로 말미암아 없어져 버린 곳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돔과 고모라 라든지, 폼페이 같은 도시는 없어졌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도시도 없어졌습니다. 그 세 도시는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 입니다. 그 세 도시는 서울처럼 큰 도시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러나 그 당시에 그 지역에서는 큰 도시 구실을 했습니다.
그 도시들이 왜 없어졌는가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현대 도시의 성격 규명과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불신앙 때문입니다.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라고 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신의 결과입니다. 믿음은 회개를 동반합니다만 안 믿으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 도시를 사람으로 의인화하여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인간의 도리이며 구원의 과정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가 없으면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첫째, 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참 회개는 불 신앙의 죄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불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곧 원수 마귀에게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참된 회개는 악령 마귀로부터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둘째,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던 마귀의 길을 멈추고 방향을 돌이켜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딴 데로 가면 안됩니다.

회개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안목이 열립니다.
첫째, 죄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기의 죄를 보고, 깨닫고 느끼게 됩니다.
둘째,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와 허물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변명하거나 핑계를 대지 안습니다.
셋째, 죄를 고백합니다.
믿음이 자기 입으로 시인하는 것인 것처럼 죄와 허물도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술서를 쓰는 것처럼 지은 죄를 숨김없이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이신직고하는 것입니다.
넷째, 죄 용서를 구합니다.
고백만으로 끝나 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내가 고백한 죄를 용서해 주실 줄 믿고 구해야 합니다.
다섯째, 사죄 하심를 믿어야 합니다.
내가 고백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눈보다 더 희게 양털보다 더 희게 사하신다고 약속하셨고(사 1:18), 우리의 죄를 도말 하신다고 했습니다(사 44:22). 그리고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시겠다고 했습니다(시 103:12).
그 외에도 등뒤에 던지셨다고, 기억도 안 하신다고, 지워 버리셨다고, 씻으셨다고, 덮으셨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자백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섯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되돌아 보는 근성이 있습니다. 회개했노라고 하지만 옛날 그때 거기로 되돌아 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른다면 죄의 길로 되돌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고라신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도 목격했습니다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현대 도시들은 어떻습니까? 서울 장안에 사는 사람 중에 교회를 모르는 사람과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극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니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내 친구들 가운데 고라신 처럼 사는 사람은 없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가 없으면 그 다음은 멸망밖에 없는 것입니다.

2. 교만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에 올라가겠다고 설쳤던 천사가 있었습니다. 그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시날 평원에 모여 성을 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벽돌을 만들고 역청을 만들어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성의 높이는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이었고 그 목적은 하나님보다 자기네 이름을 더 떨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탑은 무너졌습니다. 인간이 최초로 쌓으려 했던 교만의 탑은 지금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역시 교만과 패륜과 부도덕과 불신 때문에 유황불에 녹아 없어졌습니다.
개인도, 도시도, 역사도, 왕조도 교만하면 안 됩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의 교만은 금물입니다.
바벨론 왕조의 느브갓네살 왕은 교만 때문에 쫓겨났고, 이스라엘의 사울 왕도 교만 때문에 쫓겨났고, 페르시아의 국무총리 하만도 교만 때문에 죽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 산정현 교회의 청빙을 빋게 되었습니다. 교회 대표로 조만식 장로님이 주기철 목사님을 찾아가 교회의 청빙 결정을 전하고 모시기로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을 찾아온 조만식 장로님은 젊은 주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저희 교회에 부임하실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학교를 다닐 때 조만식 장로님은 교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해서 산정현 교회에 부임한 후 어느 주일 낮 조만식 장로님이 바쁜 일로 예배에 늦었습니다. 황급히 들어와서 신을 벗어 신을 들고 신장에 넣으려는 순간 조만식 장로님을 본 주기철 목사님이 소리쳤습니다. "조장로님 거기 서 계십시요 장로님이 예배에 늦으면 어떻게 본이 되겠습니까?" 그날 조장로님은 문간에 신발을 손에 든 채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 다시는 예배에 늦지 않겠다고 사과를 했다는 것입니다.
초대 한국 교회를 빛냈던 두 거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다던 가버나움 도시는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버나움만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만이라는 히브리 말 가운데 '가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베풀다"라는 것입니다. 자기 실체나 가진 것은 손톱 만한 것인데 그것을 부풀려서 마치 세상 것을 다 알고, 다 가졌고, 다 통달한 것처럼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 것이 교만 즉 [가온]인 것입니다.
'주드'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그 뜻은 우쭐대다, 거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한 헬라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투포'라는 단어입니다. 그 뜻은 "천천히 타 버리다", "꺼져 가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일어섭니다. 그렇지만 교만한 사람은 천천히 마치 촛불이 꺼져 가는 것처럼 천천히 타 버리고 맙니다.
그뿐입니까? 교만은 언젠가는 명성도, 성공도, 소유도, 인기도 꺼져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편 119:21을 보면 "교만은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6을 보면 "주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만을 멀리 해야 합니다.

3.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 이 도시들이 왜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졌습니까?
20절을 보면 "책망을 받았고", 21절을 보면 "화가 있을찐저"라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23을 보면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는 책망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땅도, 사람도, 국가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면 설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9장을 보면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저주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본 함이 밖으로 뛰쳐나가 그 사실을 떠들며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얼굴을 돌리고 뒷걸음질로 들어가 옷을 덮어 드렸습니다. 결국 함에게 "너는 저주을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는 저주가 내려졌고 바로 그 함의 자손들이 훗날 시돈, 그랄, 소돔, 고모라에 흩어져 살았으며 흑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저주의 반대는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축복입니다. 나와 내 가족과 내 친척과 내 이웃과 내 친구와 그리고 우리나라가 축복 받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복도 여러 가지 입니다. 재물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 명예의 복, 부부의 복 등 그 종류가 가지가지 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복을 다 받거나 소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서 한 가지 복을 선택해야 된다면 여러분은 어떤 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예수 믿는 복을 선택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복의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제대로 먹고, 입고, 쓰는 것이 한스러

울 만큼 부러웠던 동네에서 제가 제일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서중학교 1학년때 교지 '무등'에 게제된 강봉우 교장님의 '자수성가'라는 글이 제 마음을 사로잡아 무너진 집안을 재건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일찍이 사회생활과 사업에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 갈 길이 그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으며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무엇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눈앞이 아찔합니다.
박사깃군이 됐을까? 아니면 벌써 죽었을까?

♬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는 찬송이 감격으로 다가섭니다.

여러분, 불신앙은 저주의 원인입니다. 교만은 저주의 패망의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버립시다. 믿음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저주받아 죽어 가는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내 친구들을 건져냅시다.
저들에게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만난 예수,  내가 사랑하는 예수,
      내가 받은 구원을 증거합시다.
저들을 저주의 구덩이 속에 방치해 둘 수가 없습니다.
건져내야 합니다.  살려내야 합니다.
함께 축복 받고 영생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박광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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