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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입술이 감사하면 삶이 풍요로운 춤을 춥니다 (요 1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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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밋빛 인생" 인생이라는 드라마가 종영되었다고 합니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핏빛인생이었는지 말 그래도 장밋빛 인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40%의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저는 보지 않아서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최진실 씨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이 시청했을까 궁금해 얼마 전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장밋빛 인생으로 제 2의 전성기 맞은 최진실씨가 기자와 인터뷰한 것이 나와 있었습니다.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가 이혼하고 광고출연 회사로부터 기업 이미지에 상처를 주었다고 30억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답니다. 신데릴라처럼 환호를 받던 그녀가 순식간에 무너졌답니다. 기자가 "지금 이 순간 인생은 살 만한가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에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선 최진실씨는 이런 대답을 하였습니다.“ 30대 인생은 너무 힘들었어요. 결혼했고, 이혼했고, 다시 연기자로 복귀했죠. 개인적으로 이렇게 굴곡이 심했던 적은 없었죠.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 같았어요. 그렇지만 절망 뒤에 바로 희망이 있어요. 하나님께 원망의 기도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자꾸 원망의 기도를 하다 보니까 나중엔 감사의 기도로 바뀌더라고요.‘차라리 이 고통을 남편을 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통해 주셨다면 저는 정말 죽었을 겁니다’라고요. 그래서 절망으로 시작했던 기도가 나중엔 ‘하나님, 다시 손 잡아주시고 저에게 희망을 주실 거죠’라는 내용으로 바뀌었어요. ‘장밋빛 인생’의 시청률이 40% 넘는다기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어요. 하나님이 정말 제 손을 옆에서 잡아주는 것 같아요.”라고 쓰여있었습니다. 환난의 과정을 통해 인생의 진정한 감사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한 연예인의 진솔한 고백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밋빛 인생을 꿈꿉니다. 그러나 원치 않게 어느날 절망의 나락으로, 아픔의 터널로, 근심과 걱정의 수렁으로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 평화스럽게 사는 세 식구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 입니다. 이들 가족과 예수님은 각별한 사이었습니다. 11:5절에 보면 "예수님은 본래 이들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3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라고 합니다. 36절을 보면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나사로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간관계에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가까운 사이를 표현하는 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가정에 갑자기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가장인 나사로가 심각한 병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도 때로 병에 들 수 있습니다(2). 심각한 실패의 현장에 고통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부탁했는데도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고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6, 17) 마리아는 주님께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틀을 오시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주님만 여기 계셨더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으로 확신했습니다(32) 그러나 오빠 나사로는 병은 낫기는커녕 죽었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도 죽습니다(32).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1. 이미 일어난 사건, 모든 과거는 감사로 해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41,42)

이런 일을 당하니까 마리아 가정 식구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마리아는 원망하였습니다(32). 예수님이 요구할 때 오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험한 꼴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2)마르다는 절망하였습니다(39)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자 마르다가 말하기를 죽은지가 벌써 4일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3)유대인들을 빈정거리며 조롱했습니다(36,37). 사랑했다면 죽지 않게 해야지 말짱 말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소경을 눈뜨게 했다며 그런데 병들었을 때 넉넉히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죽게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 왜 모세같이 온유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욥과 같이 인정받는 사람이 자식이 죽고 그 많은 재산을 한꺼번에 날려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다니엘 같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가고 왜 의로운 선지자들이 감옥에 갇히고 그런 고난을 당하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41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감사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감사하는 때는 어느 때입니까? 39절을 보십시오. 나사로가 죽은지 3일이나 지난 때입니다. 사람들은 불평하고 조롱하고 눈물 흘리며 절망합니다. 예수님도 역시 일어난 슬픈 사건으로 말미암아 감정이 동하여 웁니다(35). 통분히 여겼습니다(33,38). 애처로운 생각을 가지고 매우 침통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정서적 반응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는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고 아무말이나 내뱉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고통스러워하는데 목회자도 심각하게 고통스러워합니다. 예수님 바라보고 억지로라도 감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스러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 오히려 감사하였습니다. 이미 전개된 상황,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상황을 감사로 해석하였습니다.

일이 잘 되었을 때, 성공할 때, 형통할 때 감사로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절박한 순간에 감사로 해석하는 것은 보통사람은 힘이 듭니다. 우리는 보통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비록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받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다 끝나 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실패한 순간, 자신의 힘이 지극히 미약하다고 한계 상황을 만나는 순간, 마음이 뒤틀리고 괴로운 순간, 마지막 생을 정리하는 순간에도 감사로 해석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여 축복의 씨앗을 심는 기회입니다. 미래를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꾸는 축복의 씨앗을 심을 때입니다. 감사하면 미래가 바꾸어집니다. 지나온 것을 감사하면 인간관계가 춤을 춥니다. 감사하면 세포가 흥겨워합니다. 감사하면 인생이 춤을 춥니다. 지나온 추억을 감사하면 인생이 풍요로워집니다. 현재를 상황과 관계없이 행복하게 만드는 축복의 씨앗이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로 해석하면 과거는 아름다운 그림이 되고 지나온 세월을 통해 감사의 열매를 음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 하나님의 가장 큰 복을 받는 기회가 될 수 있는 비결은 절망적인 순간에 과거를 감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감사한 사건이 다섯 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 모든 것이 잘 될 때가 아닙니다. 최악의 순간, 절망적인 순간, 뜻대로 되지 않은 순간입니다. 첫째는 회개치 않은 마을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을 보면서 감사로 해석했고(마 11:25) 두번째는 굶주린 백성 오천명이나 되는대 먹은 것은 아이 도시락 한 개 있을 때 감사로 해석했고(마 14:19) 세 번째는 사천명을 먹여야 하는데 물고기 7마리와 보리 떡 두 개 밖에 없을 때 감사로 해석했고(마 15:36) 네 번째는 오는 본문 죽은 나사가 죽었을 때(요 11:41) 다섯 번째는 죽음을 앞두고 최후의 만찬 때 감사로 해석했습니다(눅 24:30). 뜻대로 되지 않은 순간입니다. 굶주림으로 아우성 치는 순간입니다. 이미 사람인 죽어 있는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감사로 해석했습니다. 감사는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해석입니다.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사할 수도 있고 불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때든 어느 곳에서든 감사를 캐어내면 감사가 되고 불평을 캐어내면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족하여도 감사를 잉태하는 자는 감사를 낳고 풍족하여도 불평을 잉태하는 자는 불평을 낳습니다. 감사는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크기이고 믿음의 크기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아는 자의 마음의 열매입니다. 섭리를 수용하는 자의 사유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기에 이 땅의 삶의 과정에 어떤 사건이 우리 앞에 다가 와도 모든 과거는 감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2. 어떤 상황을 만나든 모든 현재는 감사로 표현하는 것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41,42)

감사를 표현하는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감사 불감증에 걸린 시대에서는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밥먹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감사도 습관 중의 하나입니다. 늘 감사하는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감사부터 하지만 늘 불평하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을 만나든 불평부터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마르다와 마리아는 불평하고 절망합니다. 울며 통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41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을 우러러 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속으로만 했겠습니까? 그러면 요한이 이것을 어떻게 기록했겠습니까? 아마 큰 소리로 감사를 했을 것입니다. 속으로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영으로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공개적으로 표현하여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돌았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감사 생활은 이것이 중요합니다.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 와도 불평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도 수많은 사람이 아우성을 치고 있고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했습니다. 성찬식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인신매매하는 유다도 들을 수 있도록 감사했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바램대로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공개적으로 감사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어려움이 있어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감사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제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잘 해결되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기도해 주신 것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말을 듣는 저도 기뻐한데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춤추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은 절박한 순간에도 자신 있게 공개적으로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42절에서 그 비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나사로 가정에 주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유를 모르니까 불평하지 이유를 알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유를 발견하기까지는 고통의 긴 터널을 통과하며 원망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득 그 고난의 이유를 깨닫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활기를 찾고 소망가운데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4,40).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4). 병이 들 때 그 병드는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병은 자신의 부주의에 의하여 생기는 병입니다. 나쁜 습관으로 병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죄로 인하여, 부모의 죄로 인하여 생기는 병도 있습니다. 나이 많아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병도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으로 귀신들려 오는 병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생기는 병도 있습니다. 바로 나사로가 당한 고난, 나사로의 질병,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한 고난. 질병,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데 무슨 불평과 원망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지요.

둘째는 이 사건을 본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42)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에서 살리시는 예수님을 메시아, 구주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죽음과 삶을 주장하시는 예수님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빠가 죽었다고 말하지만(32) 예수님은 잠들었다고 합니다(11절). 주님의 시각은 죽음은 잠에 불과합니다. 잠은 우리에게 아무런 해가 없습니다. 잠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잠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잠은 오히려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잠은 하루의 슬픔과 수고가 다 끝난 후 찾아오는 고마운 휴식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기 위하여 잠을 자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믿으면 보리라는 것입니다.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유대인들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나사로가 죽자 유대인들은 빈정거립니다.(36,37) 그러나 그 빈정거림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끝이 납니다. 45절에 보면은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요12:11).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죽은 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사로는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요12:11). 간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없는 천국 백성의 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3. 불확실한 미래는 감사로 기대하는 것입니다(41).

어떤 처지에 있든지 불확실한 미래 앞에 공포로 떨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로 기대하면 기대한 만큼 풍성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에 처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근거로 미래를 추측합니다. 어떤 질병이 다가오면, 어떤 난관이 다가오면, 어떤 극한 상황이 몰려오면 그것으로 다가올 미래의 부정적인 모습을 생각하면 근심과 염려, 걱정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미래는 우리의 추론이나 논리, 생각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의 과학적 법칙에 따라 미래가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교만해지면 과학의 법칙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 논리적 사고의 순서대로 미래가 전개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미래는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최대의 후원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41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절을 보십시오. "항상 내 말을 들으신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왜 예수님이 감사로 해석하고 감사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과거 늘 기도를 들어 주셨던 하나님이 앞으로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하실 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있어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41). 시간의 주인이시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외로울 때 전적으로 신뢰하고 부르짖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항상 내 말을 들으신다"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렇다고 지금 나사로가 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도한 것을 들어 주실 것 내다보며 미리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보증 수표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현금이 없다고 해도 감사하면 감사의 선물이 미래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감사하면 풍성한 열매가 삶의 현장에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43, 44절을 보십시오.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감사는 미래를 감사의 조건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작은 감사는 큰 감사를 불러 옵니다. 있는 것 감사하면 있어야 할 것 주십니다. 광야에 장정만 5000명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겨우 있는 것은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 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입니다. 그 때 그 위기 상황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합니까?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아직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5000명 먹을 것이 이미 있는 것처럼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미래의 주실 것을 미리 내다 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고 믿고 나가면 그 감사의 조건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감사는 삶의 풍성을 가져오며 불평은 빈곤을 가져옵니다. 다니엘도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제까지 쌓아 놓은 국무 총리의 지위와 명예를 다 잃어버릴 순간이었습니다. 지위와 명예만 잃은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잃어버릴 순간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합니까?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 6:10)"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입술을 열어 공개적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기도한 내용이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자가 입을 다물고 더 왕의 신뢰를 받게 됩니다. 원수들이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과정의 고난이 있더라도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벳새다와 고라신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감사했습니다.
벳새다와 고라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는데도 왜 예수님은 감사하였습니까?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1)"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불쾌해도, 나는 자존심이 상해도, 나는 고생해도, 나는 힘겨워도, 나는 고난의 과정을 겪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자신을 판 배신자가 시치미를 떼고 한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역겨웠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인 구원사역이 성취될 것을 내다보면서 감사하며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을 아시는 분이십니다.(4) 현재 당하는 고난이 무엇입니까? 그 고난을 주님이 다 아시고 계십니다. 고난의 순간에 우리 홀로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보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33. 35)
예수님은 죽음과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25,26)
죽음과 삶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41절 말씀처럼 돌을 옮길 수는 있습니다. 44절 말씀처럼 베로 동인 수건을 풀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문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4일이나 되어 이미 상황이 끝나버렸다고 생각하는 나사로(39)를 말씀 한마디로 살리셨습니다. 마리아의 고백처럼(32) 꼭 주님이 문제의 현장에 확연하게 계셔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멀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은 것 같지만 우리의 문제를 다 아시고 해결의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라는 한마디로 죽은 나사로를 살아나게 했습니다. 손과 발이 동여매인채 그대로 살아났습니다. 말씀 한마디입니다. 성도님들이 당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질병의 문제입니까? 죽음의 문제입니까? 사업의 문제입니까? 신앙의 문제입니까? 자녀문제입니까? 우리 주님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살리시는 이 주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어떤 상황이든지 감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리아처럼 원망하지 말고, 마르다처럼 절망하지 말아야 하며(39) 유대인들처럼 빈정거리며 조롱하지 말아야 합니다(36,37). 과거의 은총은 인정하고 현재의 은혜를 고백하며 미래의 은총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1. 모든 과거는 감사로 해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41,42) 2. 어떤 상황을 만나든 모든 현재는 감사로 표현하는 것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3. 불확실한 미래는 감사로 기대하는 것입니다(41).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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