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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요 1: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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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스웰의 ‘생각의 법칙’이란 책에 나오는 흥미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만일 어떤 사람이 여름에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고 하는 하지에 오래된 깊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데 우물물 위에 반사되는 태양을 볼 수 있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실 것입니까?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에 이집트의 알랙산드리아 도서관장으로 있었던 ‘에라토스테네스’라는 사람은 그 말을 전해 듣고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이 우주에는 중대한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집트의 현재 아스완 으로 알려진 ‘시에네’라는 곳에는 하지만 되면 태양이 깊은 우물에 반사된다고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런 소문을 듣고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깊은 우물에 태양이 반사된다고 하면 태양이 직각으로 우물의 머리 위에 떠 있어야 한다고 유추하였습니다. 태양과 수직으로 서 있어야만, 우물 기둥과 벽의 그림자가 우물 위에 비쳐지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알랙산드리아에서는 하지에 우물을 들여다보아도 우물 기둥의 그림자가 우물물 위에 비치는 것이었습니다.    뛰어난 과학자요 사상가였던 그는 그가 들은 말을 확인하기 위하여 800km나 되는 시에네를 달려가서 어느 하지에 태양이 반사된다는 우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날 정오가 되자 전해오는 말대로 그 우물물에 태양이 반사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물의 벽의 그림자가 전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태양이 우물 위에 수직으로 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당시에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하는 때였는데, 지구가 평평하다고 하면 어디서나 똑 같은 현상이 일어나야 하는데, 지구는 둥근 공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곳에서는 그림자가 생기는데, 하지에 그곳에만 태양 빛이 반사된다는 것은 단 한 가지 사실은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연구하기를 그가 살고 있는 알랙산드리아에서는 같은 날 태양이 만들어주는 그림자가 원의 50분의 1, 즉 7.12도라는 것을 측정하였습니다.  이집트 알랙산드리아에서 시에네까지의 길이가 800km라고 하니 50×800km을 계산하여 4만 km 지구의 원주 즉 극에서 극까지 길이가 4만km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분의 계산은 크게 틀리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지구는 둥글었고, 지구의 원주는 4만8km였습니다. 

시에네에서 알랙산드리아까지의 길이가 오늘과 같이 정확하였으면 그의 계산도 정확하였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학문적 열망이 과학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누구나 믿어주지 않고 미쳤다고 하는데 진리를 탐구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과학자가 탐구정신을 가지고 진리를 찾아 헤매고, 노력할 때에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진리를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찾아만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선지자 세례요한과 그의 두 제자들입니다.  두 제자 중의 한 분은 안드레이며 다른 한 분의 이름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제자는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동생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베드로가 등장하며, 가장 중요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다섯 분으로 예수님, 세례요한, 그리고 안드레와 다른 제자, 그리고 베드로가 전부입니다.

먼저 여러분의 성경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오늘 본문의 사건을 정리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실 때에 예수님보다 먼저 나와서 선지자로 활동한 사람이 있으니, 그분이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유대광야에서 지내면서 옷은 낙타의 가죽옷을 입었고, 주로 먹는 음식은 메뚜기를 잡아먹고 석청(石淸)이라는 야생 꿀을 먹고 지냈습니다.  석청이라고 하면 나무나 돌 사이에 석벌이 모아둔 꿀인데 사실 알고 보면 꿀 가운데는 제일 좋은 성분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 세례요한이 살아간 생활을 보면 힘들고 어려웠으며, 매우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광야의 동굴에서 집단 생활하면서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신앙을 지켰던 엣세네파에 속하였다고 봅니다.

세례요한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동안 한 400년 동안 하나님의 사자인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세례요한은 칭찬받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요 민족을 사랑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외친 선지자였습니다. 

세례요한은 항상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아를 소개하고 증언하였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요한은 예수님을 잘 소개하고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에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오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주목하여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은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짊어지시고, 마치 제단 위에 드려지는 어린 양과 같은 제물이 되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요한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도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이지만 그가 고민하는 것은 누가 메시아인지를 어떻게 알아보고, 그의 오시는 길을 곧게 하며 준비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수없이 고민하였고 또 기도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은 메시아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아를 소개하고 메시아를 증언하고 메시아의 길을 잘 닦고 준비하는 사명을 감당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세례요한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애를 태우고 있을 때에 자기를 선지자로 세우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내려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 예수님의 머리 위에 성령이 마치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늘에서 음성이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라는 분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되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도 한 사람의 구도자요, 메시아를 사모하고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이 땅을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가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자기 눈앞에 예수님이 서 있을 때에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야 영안이 열려지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바로 알려면 성령의 밝은 조명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조명,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그 분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성령님에 충만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증언이 있었던 다음 날, 세례요한이 자기의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었는데, 그들 앞에 예수님이 지나가시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니심을 보고 세례요한이 다시 증언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어린 양이라고 하면 유대인들은 그 양이 어떤 양인지, 무엇에 쓰이는지, 또 양을 제물로 바칠 때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럽고 추한 범죄자, 이 죄인이 죽어야 마땅하지만 어린 양이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에서 사함을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요, 하나님이 친히 제물로 삼으신 당신의 아들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안드레요,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을 기록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제자 중의 요한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세례요한의 증언만 가지고는 예수라는 분이 과연 메시아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여부는 직접 만나서 물어보고, 그 분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있어보면 판단이 설 것이었습니다. 

두 제자는 사람을 미행하듯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두 사람이 당신을 따라오는 것을 아시고 몸을 돌이키시며 “무엇을 구하느냐?” 고 하셨습니다.  두 제자는 “랍비여 어디 계시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짧은 대화,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물음이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말에서 묻고 싶은 것을 다 물으셨고, 대답할 것을 한 마디로 대답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싶으냐”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 이 말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당신은 과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며, 과연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인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랍비’라는 말은 선생이란 뜻인데,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배운 말로, 유대인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의 근대화된 언어였습니다. 

예수님은 친절하게 응해주시고 있습니다.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머물고 계신 곳을 확인하고 그 날 온 종일 함께 있었는데 헤어질 때에 시간을 확인하고 보니 열시 쯤 되었습니다.  열 시라는 시간은 오늘의 오후 4시를 말합니다.  적어도 6시간 정도는 말씀을 나눈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따르다가 이 날 예수님을 따르게 된 한 사람은 갈릴리 벳세대 출신인 안드레라는 사람인데, 그에게는 손위로 형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말씀을 듣고 나서 형제 시몬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하면서 그 즉시 형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안드레가 데려온 시몬을 보신 예수님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게바라는 말은 아람어인데, 바위, 반석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헬라어로는 베드로라고 하여 역시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통하여 한 사람, 정말 성도다운 사람을 만나봅니다.  예수님의 가장 처음 제자가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어떤 사람을 데려오는데 은사가 있었습니다.  형 베드로를 데려오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한 아이를 데려오고 , 예수님을 만나보기를 원하는 헬라 사람들을 데려왔습니다.  데려오는 것을 잘하는 은사를 받아야겠습니다.  데려오는 은사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내가 다 감당하는 것만이 은사가 아니라, 데려오고 누구를 추천하고 추대해주고, 섬기는 은사도 아주 귀한 은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생략된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마치 입체낭독을 하는 것처럼 읽고, 그림을 들여다보듯이 연상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안드레와 그의 동료 그리고 시몬이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고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를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는 그 마음은 이런 사건일지 속에 묻히고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이라고 하면 대단한 인기가 있고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그보다 위대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로 만족할 수 없고, 반드시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메시아를 만나야 하고 그래야 영적인 숙제가 풀려지고 영혼의 갈증을 해갈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종교와 만남이요, 예수님을 만나야 됩니다.  세상의 어떤 유명인사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만나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나도 되고 안 만나도 무방한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찾아 만나면 생명이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으면 곧 멸망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란 사도를 보면 그는 세상의 내로라고 하는 유명인사는 다 만났고, 그는 율법을 만났고, 학문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고로 위대한 사도로 변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자기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체험하고는 전 세계를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다가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절대로 우리를 싫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선지자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 메시아에 관한 말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거나 머물러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 만나야 하고, 그 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만나보고 알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호세아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오늘 주님 예수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아갈 때에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을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에 관하여 알고 상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여 알고 깊이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만나는데, 주님을 만나고 우리 안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이만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인생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요, 인도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저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은 “조금만 더 가자”고 힘을 두셨습니다.  “조금만 더 큰 일을 감당하라”고 용기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너는 저의 역량보다 큰 일을 감당하였고, 제가 올 수 있는 길보다는 더 멀리 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가십시오.  “주여, 나는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거나 예수님의 축복보다는 예수님 당신을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사도베드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라”(벧후1:8)고 하셨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벧후3:18)

작가 나폴레옹 힐은 이런 말을 합니다.  “황금은 땅 속에서보다 인간의 생각 속에서 더 많이 채굴되었다”라고 합니다.  깊이 묵상하면서, 생각 속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을 위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만나야 합니다.  우리들이 은을 구하는 것처럼, 지혜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처럼 온 세상과 바꿀 수 없는 보화 중에 보화가 되시는 예수님을 찾아야겠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구하고 찾겠다고 나설 때에 이미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와 주셔서 당신을 알게 하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마19:30)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으로 우리 안에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시면 엄청난 능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어떠한 역경이나 고난도 밀어내고 우리를 덮치려는 위험한 파도가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님은 그의 레이크 우드 교회의 한 성도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필리스라는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필리스는 16살 때에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이었는데, 임신하는 바람에 고등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꿈은 산산 조각나고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그래도 그는 아이를 키우면서 살기 위하여 조그만 방을 하나 마련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린 그녀에게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가까스로 구호품에 의지해야만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사회복지시설에 몸을 의탁해야만 했습니다. 가난과 절망감에 찌든 필리스는 미래가 없는 하루살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의 일찍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필리스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는 하류인생을 거부하였습니다.  “이제는 그만 이런 삶을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겠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을 온전히 누리고야 말겠어.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거야”  그는 과거의 망령을 훌훌 털어버리고, 더 크고 놀라운 일을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용할 수 없는 복을 기대하는 마음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의 패배감을 사라지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다가와도 필리스에게는 포기란 없었습니다.  끝없이 노력하고 노력하였습니다.  필리스는 하나님의 은혜로 학교 식당에서 식권 받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최소 임금밖에 받지 못하였으나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러나 필리스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더 좋은 선물을 예비해놓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필리스는 더 멋진 인생을 꿈꾸었습니다.  그녀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학교에 들어갔으며, 마침내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녀가 이제 는 대학교 가고 싶었습니다.  필리스는 낮에는 학교 식당에서 종일 일하였고, 밤에는 대학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4년 만에 영예로운 대학 졸업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필리스의 꿈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내친 김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 마침내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이제 필리스는 더 이상 복지 시설의 신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식권을 걷던 학교와 같은 학군에 있는 다른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복지시설에 의탁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시설에 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 여성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멋진 인생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생명의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요,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 앞에 나오시기를 잘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만나주십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에서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성공적인 인생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성홍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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