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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의 생명력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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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자신의 집에서 기르던 개에게 물려 9살짜리 소년이 죽은 사건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죽어서도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아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다가 14일 재가한 생모가 검사가 지휘한 사체인도서를 가지고 시신을 인도해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신을 먹이고 키워주던 주인을 물어 죽인 개를 보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사랑을 베풀고 생명을 보존해주는 주인은 분명히 감사의 대상이지 복수나 해코지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을 모르는 이 개는 아무리 동물이라 할지라도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동물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 은혜를 알지 못하는<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한 하나의 사건입니다.
감사해야할 이유도 감사의 방법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면 이런 동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행복을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무의미한 인생이며 곧 불행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라고 하는 신학자가 정리해 놓은 역사의 한 정리에 따르면 고대인의 불행은 숙명과 죽음의 문제에서 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어떤 고난도 팔자요, 숙명이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하거나 운명을 개척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대로 주어진 대로 많은 고생을 치르며 살다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불행입니다. 그런가하면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은 죄와 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고난을 죄에 내리시는 신의 저주로 보았습니다. 그 무서운 심판 앞에서 벌벌 떨면서 흑사병이 돌아도 저주다. 전염병이 돌아도 저주다. 홍수가 나도 저주다. 이렇게 몰아치는 무서운 저주 속에서 저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을 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그러면 현대인은 그 불행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생의 무의미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배고픈 것도 아닙니다. 집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고독해 하는 것입니까? 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왜 감사가 없고 왜 감격이 없습니까? 이만하면 감사하고 감격할 만도 한데 뭐 때문이냐 말입니다. 그것은 끝없는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더 가지려는 마음이 저 앞서 가기 때문에 그 마음을 좇아가기 바쁜 겁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교만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어느 사이에 인간의 생각과 철학이 세속화되면서 불행으로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린 고로 고마운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그 고마움에 따르는 행복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란 더 이상 인생이 아닙니다. 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은혜를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행복의 밑거름이 되는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삭개오는 특별한 감사를 드린 사람입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은 우리가 잘 압니다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당시에는 로마 권력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때였고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대세를 잘 이용한 사람으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속적으로는 그는 세리의 장이요, 권력자요, 요새 말로 실세입니다. 그리고 부자였습니다. 누구라도 이 사람 앞에 잘 보여야만 출세할 수도 있는 막강한 권력이 있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고민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은 그런 고민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로마 밑에 붙어서 자기 권력과 자기 부를 취하고 있으니까 민족적 배신이라는 생각에 갈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 나름의 독특한 의식대로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어서 속히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평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던 차에 오늘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큰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만나러 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누구처럼 병 고치려고 예수를 만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려하는 생각은 좀 특별합니다. 소문에 듣기를 예수님은 좋지 못한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가진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중에 마태라는 제자가 있는데 세관에 앉아 세금을 받다가 현장에서 불러서 제자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다 천대하고 온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죄인의 대명사 세리를 불러서 제자를 삼았단 말인가를 생각하며 그 분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고 많은 사람이 밀어닥치는데 도저히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체면이고 뭐고 불구하고 뽕나무로 기어 올라간 것입니다. 그는 이 은총적 기회,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이 중요한 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나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뽕나무 위의 삭개오를“우러러보시고”그랬습니다. 상황이 참 이상하게 됐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우러러 본 게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게 됐습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보셨다고 하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 보아주신 겁니다. 얼굴과 얼굴, 눈과 눈이 마주치는 아주 소중한 순간입니다. 많은 사람을 둘러보듯이 그렇게 보신 것이 아니라 지명하여 한 사람 삭개오를 집중적으로 보셨단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리의 집입니다. 누구도 상종하지 않고 거지도 세리의 돈은 받았다가도 도로 던져 버릴 정도로 더럽게 취급하는 세리의 집에 예수님이 오늘 밤 주무시겠다고 하시니 세상에 이런 고마움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가장 큰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게 물질을 주시는 분입니까? 내게 지식을 주는 분입니까? 아닙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죄인이 의인 되도록 그 신분을 바꾸어 놓는 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이것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왜 감사합니까? 나에게 많은 물질과 풍성한 삶의 조건들을 주신 것이 추수감사절을 드리는 우리의 감사조건입니까? 그렇다면 가진 것이 없어서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일수도 있습니다. 아니 풍성함은 마땅히 감사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나 정말 내가 먼저 감사해야할 조건은 이것이 아닙니다. 이 풍성한 삶 이전에 나로 의인되게 하셔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심이 먼저입니다. 즉 원초적 감사의 조건이란 나로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고백 속에 풍성함의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도 부족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풍성하다 여기는 사람이 있는 것은 이 고백의 차이입니다.

이제 보십시다. 삭개오의 감사가 어떤 감사입니까? 먼저, 삭개오는 바로 이 은혜의 시간 가운데“즐거워했다”고 그랬습니다. 그 갈등, 그 고민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그의 마음에는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감사는 기뻐하는데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감사란 감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쁜 얼굴로 고맙다고 해야지요. 억지로 고맙다는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또 하나는 마음이 열리는 감사입니다. 삭개오의 마음이 열리면서“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만남의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마음을 읽었고 삭개오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재산 절반을 내서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는 마음이 열립니다. 또 하나“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습니다.”는 말은 율법이 그렇게 명하고 있기에‘이제부터 나는 율법을 지키는 자로 살겠습니다.’라는 고백까지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이 있다면 가진 것으로 기뻐하며 감사할 것이 아니라 나누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인 줄 알아야합니다.

“인생이 무상하다.”하는 것을 알면 불교인입니다.“인간의 삶에 마땅한 도리”를 알면 유교인 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은혜를 압니다. 오직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면 바로 된 그리스도인이요, 신앙인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입에 감사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감격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또한 그 감격이 간증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 삭개오처럼“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남에게 빼앗은 것은 사배로 갚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이제는 그 말씀대로 은혜 받은 바대로 살겠습니다.”하는 결단과 실천이 곧<감사의 생명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지내면서 감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무엇을 감사합니까? 또한 어떻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감사는 생명력이 있는 감사입니까? 내게 있는 상황을 기뻐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즐거움이 곧 감사입니다. 마음을 열어 예수님의 마음이 되는 것이 감사입니다. 올 해의 추수감사절은<감사의 생명력>이 넘치는 감사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철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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