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수감사] 서로 돌아보고 격려합시다 (히 10:23~25)

  • 잡초 잡초
  • 416
  • 0

첨부 1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다음주일은 한국교회 추수감사주일이자 울산교회 전교인출석주일로 지키려고 합니다.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서 풍성히 베풀어주신 오곡백과로 인해서 감사하는 잔치 날입니다. 우리나라 전통에는 잔치 날에는 물론 손님도 청하지만 친인척은 함께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잔치를 앞두고 서로를 돌아보고 한 자리에 만나서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너무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집들은 떨어져 있지 않지만 삶은 서로 관여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인의 기본 윤리인 것처럼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관여하기에는 너나없이 너무 바쁜 삶을 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해 이맘 때 목적 40일을 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다 살고 나면 남는 것은 관계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 우리는 우리가 이루었던 업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에서 소중했던 사람들을 한 번 더 마지막으로 보고 눈을 감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처음 부르는 순간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들과 형제자매관계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때 가족간의 재회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관계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그 분의 본성이십니다.




믿기만 하면 누구나 하나님의 식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원자로 믿으면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너희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갈4:7, NLT)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적인 가족관계는 혈육의 가족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가족관계는 영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가족관계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가족이라도 멀리 떨어져 살면 자주 만나질 못합니다. 자식이라도 커서 직장 따라 가고나면 만나는 것은 명절에 한두 번 그렇습니다. 그래서 멀리 사는 형제보다 가까이 사는 이웃이 더 낫다고도 합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난 것 같습니다. 이웃끼리도 잘 지내면 멀리 사는 사촌 못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랑으로 만나 결혼을 했지만 이혼으로 인해서 그 관계가 끝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예전에는 아주 드물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드물지 않은 현상입니다. 주위에 암 걸리는 사람들이 속출 하듯이 이제는 이혼으로 가정이 깨어지는 일들도 빈번합니다. 사랑의 관계를 잘 가꾸어가도 언젠가 나이 많아서 아니면 병들므로 그 관계는 깨뜨려 질 수 있습니다. 죽음으로 소멸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우리의 영적인 가족관계는 영속적입니다. 다른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영원토록 지속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피로서 맺어진 관계보다 훨씬 더 강한 유대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맺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예배하면서 우리들 사이에서는 “네 일이나 신경 쓰라”고 말하고 끝날 사이가 아닙니다. 극장가서 영화를 볼 때는 늦게 들어와서 컴컴한데서 자리를 찾아 앉든지 말든지 우리가 별 신경 쓰일 일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예배 할 때는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성경은 서로서로 관심을 갖고 돌아보고 함께 모이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신앙 안에 성숙하면 할수록 우리 신앙인이 살아가는 기준은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면 자랄수록 하나님은 우리 일에만 신경을 쓰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내가 너를 대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보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 우리의 관계가 성숙해지기를 바랍니다. 

보십시오. 하늘 아버지의 심정으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4)

우리 그리스도인은 단지 믿는 것 뿐 아니라 서로에게 속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홀로 있다는 것은 에덴동산 같은 완벽한 환경 속에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기러기 아빠는 양산되고 있지만 외로운 신앙생활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혼자 할 수 없는 것 첫째가 결혼생활이라고 그랬죠? 둘째가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외로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다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는 순간 우리가 한 가족이 되어서 여기서 세상 살면서 함께 일하고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의 상속을 함께 받을 자들입니다. 더 이상 홀로 지내는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 분을 믿을 뿐 아니라 그 분께 속한다는 것도 포함됩니다. 울산교회 교인이 된다는 것은 과정 끝나면 바로 등록하는 일로서 제한 될 수는 없습니다.

울산교회 성도가 되면 새로운 꿈을 함께 꾸게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임무를 함께 수행해야만 합니다. 울산교회 제직이 되면 제직으로서 준수해야 할 새로운 기준이 제시되고 그 기준대로 살기로 우리는 결단했습니다.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한 해가 되기로 서약 했습니다.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서 우리는 수군거리지 않기도, 지도자를 잘 따르기로 서약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지기로 서약 했습니다.

‘교회가 왜 이런 일을 안 해?’라고 말하는 몰상식한 교인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마땅히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면 교회 지체된 여러분이 해야 될 일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여러분이 하셔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을 성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해야만 합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이 올해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배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배우고 가르치고 하는 일에 동참해야만 합니다. 제직답게 처신함으로서 교회에 두신 하나님의 명예를 드높이기로 우리는 작정을 했습니다. 우리가 가슴에 표찰을 써서 다니지는 않지만 동네사람들은 우리가 울산교회 집사인 것을 다 알잖아요. 여려분의 처신에 하나님의 명예가 달려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지난해 우리는 비전 성취를 위한 전교인 40일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다른 믿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영원히 서로에게 속한 존재들임을 배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성경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통해서 우리는 누누이 확인하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포함하는 바를 실천하려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날 때부터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그대로 나도 다른 사람을 대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그들이 받아야 할 대우 이상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갚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면 다른 사람이 우리의 행동 규범일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이 되고 나면 ‘저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했으니까 나도 이렇게 하겠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가’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나도 다른 사람에게 반응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값으로 치르고 우리를 사랑하신 자리로 나아오셨다면 우리도 값을 지불해서라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사람은 용서받을 만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를 용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용서 받을 만해서 용서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하나님에 대한 수직적 관계는 형제에 대한 수평적인 관계로만 측정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좋아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사람들을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야 됩니다.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시인은 곧 이어서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라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주 밖에 나의 주는 없다고 고백했지만 그 고백은 땅에 있는 성도가 존귀한 자인 것을 볼 수 있는 자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사람을 소중히 여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로 영적 깊이를 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오늘 저는 하나님과 여러분의, 여러분과 서로간의 깊은 관계 만들기에 대해서 “서로 돌아보고 격려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세상에서 배운 방식대로 살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방식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이렇게 나와서 말씀을 듣는 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아서 하늘 아버지의 기쁨을 가득하게 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보고 안타까울 때는 기도할 수 있겠죠? 그리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기다려 줘야 합니다. 때로는 개입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뒤 없이 설치라는 말은 아닙니다. 자기 눈에 들보를 놔두고 티를 빼겠다고 설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우리 본문을 살펴봅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서로 간에 어떻게 하라고 말합니까? 서로 돌아보라고 명합니다. 돌아보면서 이야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예배시간에는 제발 지각하지 맙시다. 말은 안 해도 눈으로 말이죠.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 와서 앉으면 좀 쳐다 봐줘요.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아픈 마음으로, 상한 심령으로 쳐다봅시다. 부끄럽도록 쳐다봐주세요. 그러지 않고는 고치기가 쉽지를 않습니다. 웃지 마시고 그렇게 정말 쳐다봐 주세요. 그래야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 그분들이 “내버려둬, 나는 끝까지 지각할거야” 이렇게 결심하고 있지는 않거든요. “오늘 또 늦었네, 다음 주일은 잘 해야지” 이렇게 생각한다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도와줘야 합니다. 자주 결석하는 사람이 있으면 챙겨줘야 합니다. 지각 결석이 빈번해지면 영적인 뭔가 뒷걸음질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야 되지 않습니까? 교회를 잘 다니던 사람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해서 악한 말을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주일에 교회에 잘 나오던 사람들이 이 핑계 저 핑계로 한두 주일 빠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바쁘다고 핑계하고 다음 주일에 교회엔 꼭 가겠다고 약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에 보면 또 안보여요. 그러다가 그냥 1월달에 열심히 챙기다가 워낙 안나오면 우리가 기억을 못하고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그 사람 안나오는 것은 아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때쯤 되서 전화하면 “이제 교회 안가요. 더 이상 전화하지 마세요” 그런다고. 그렇게 굳어지도록 오래 두지 말고 서로 챙길 필요가 있습니다. 피차 권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주님의 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기억해야 됩니다. “오직 권하여 그가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그날이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향해서 인사할 때 “마라나다”라고 인사했어요. 주님이 오신다. 힘들게 신앙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이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불어넣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꼭 같은 말도 제대로 신앙생활 하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경고의 말이 되겠지요? 주님이 오십니다.

처음에는 작은 일에 타협을 하다가 나중에는 점점 큰일에 타협을 하게 됩니다. 순결서약을 한 열 다섯 살 난 청소년이나 신앙인이 되기로 약속한 쉰다섯 살의 어른이나 타협은 그렇게 일어납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어른 예배라도 나오던 청소년이 대학에 들어가서는 부모로부터 벗어나 생활하면서 자유를 만끽한답시고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귄답시고 신앙이 없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성경적인 가치관을 갖지 아니한 동료들과 어울리면서 처음에는 스스로 말합니다. “딱 한 번만 하자 절호의 찬스인데 . . .”

중년이 되어서 사업을 해도 기회는 찾아옵니다. “한 건만 하면 나도 . . .”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 제 말이 들리지요? 저는 여러분이 한건 올리려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실하게 살아가십시오. 큰 것 하나 그렇게 바라지 마시고 작은 일에 성실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앞에 로또 복권방이 있으니까 “복권 하나 당첨만 되면 이발소 주차장 헌납 하겠다”이런 생각을 가집니다. 뜻은 갸륵합니다마는 당첨 될 리도 없고 당첨되어도 처음 마음 먹은 대로 할리는 더 더욱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울산교회는 그런 더러운 돈은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노력하고, 여러분들이 땀 흘리고, 여러분들의 눈물이 배어있는 물질이라야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는 헌물이 됩니다. 사기치고 한탕해서 가져오는 것은 예물이 될 수 없습니다. 구약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물이 얼마나 거룩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소그룹은 서로를 보살피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소그룹은 서로 돌아볼만한 사이즈여야 합니다.

20명의 이름을 한 그룹에 넣으면 다 챙기기가 쉽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이 전임 사역자입니까? 서로 돌아봐서 피차 권면하기 위해서는 10명이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10명이 넘어가면 두 그룹으로 나눠야 됩니다. 한 그룹이 목적 40일 때처럼 서너 사람이라야 서로 돌아볼 수 있는 소그룹이고 자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소그룹입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말을 꼭 명심하십시오. 서로 돌아보아 피차 권면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행동을 해야 합니다. 사랑을, 선행을, 격려 하라고 말합니다. 남 착한일 하는 것 보고 삐죽이지 말고 잘 한다고 칭찬을 해줘야 해요. 물론 우리가 하는 일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흠을 잡으려고 하면 흠을 잡을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 일은 여러분의 임무가 아닙니다. 완벽하지 못하는 부분을 찾아내려고 하지 말고 잘하는 부분을 보면 격려하는 그게 우리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집사님 참 귀한일 하시네요. 저도 같이 할 수 있도록 다음에는 불러주세요”그래야 공동체가 바뀌어 지고 결과적으로 세상이 바뀌어집니다. 자기는 일도 안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뒤에서 잡아당기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서로 한 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은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유학생활을 할 때 그쪽에 있는 교회들이 정말 너무 한다 싶을 때가 있었어요. 마음이 아프던데 왜냐하면 우리가 형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될 이유는 서로에 대한 책임 때문입니다.

이마에 피가 솟구쳐 흐르는 것을 눈이 보았다고 칩시다. 그래서 눈은 머리에다가 그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면 머리가 명령합니다. “오른 손, 빨리 그곳을 눌러 막아라.”하지만 오른 손이 말합니다. “왜 하필 나입니까? 왼 손은 노는 데요.”그런 식으로 반응하면 어떻게 될까요?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한 여러분은 동료 성도들로부터 멀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합니다.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에게 있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중요한 책임은 다른 지체가 상처를 받은 것을 보았다면 즉각 개입해야 합니다. 경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개입을 해야 합니다.

어색하다고요? 귀찮다고요? 왜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개입 하느냐구요? 여러분은 서로 지체입니다. 주님의 피로 맺어진 형제자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명하고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서로에게 무관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명하셨습니다. 서로 몸이기에 서로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위해서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무언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합니다. 지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을 때는 행동이 요구됩니다. 미혹한 길로부터 형제를 돌아서게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야고보 선생은 그 서신 마지막에서 우리에게 유언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지각을 하고 예배한 형제 자매와 함께 인사도 나누지 않고 축도가 끝나자마자 습관적으로 먼저 나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늦게 온 사람들이 꼭 일찍 일어납니다. 가봤자 가서 중요한 일 하는 것도 없어요. 그러나 습관입니다. 우리 그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해야 됩니다. 우리 옆 사람을 바라보면서 눈으로 한번 이야기 해 볼까요? ‘오늘은 예배 후에 인사라도 나눕시다’어떤 분들은 눈으로 말해도 소리가 들리네요. 한번 그러면 말로 해봅시다. “오늘은 예배 후에 인사라도 나눕시다”광고 끝나기 까지는 일어나지 마십시오. 그래도 축도가 끝나면 자기도 일어서게 되어있어요. 그럴 때 옆에서 잡아주세요. 서로 이야기 했으니까 이제는 챙겨줘도 되겠지요? 잡아 앉혀줘요.

예배위원들의 친절은 광고가 끝나고 마지막 파송의 노래를 부르기 전에 문을 열어 드리는 게 친절이 아닙니다. 닫아놓고 문을 지켜주십시오. 열어주지 마십시오. 한번쯤 서서 거기서 찬양을 함께 하다보면 일어나가다가도 자기가 앉을 겁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여러분이 좀 당겨주십시오. 앉도록. ‘오늘은 손 한 번 잡아보고 한 마디 인사라도 나눕시다.’이런 마음으로 여러분 서로서로에게 한 번 더 쳐다봐 주십시오. 눈을 쳐다봐주세요. 날 쳐다보지 말고.

우리도 완벽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개입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의 삶에 관여할 만큼 완벽해야 한다면 우리는 입관하기 까지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하라고 명하시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예배생활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현저하게 지각하는 모습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면 주일마다 출석률이 달라질 것입니다. 말씀이 무엇을 말합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열심히 모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일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날. 그런 뜻이지요? 주님의 날이면 여러분이 왜 사사롭게 주님의 날을 씁니까? 누가 주일날 만나자고 그러면 “난 선약이 있어. 소중한 분과 약속이 있어” 그렇게 말해주세요. 주일은 예배하는 일과 성도가 서로 섬기는 일을 위해 쓰시도록 구별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날, 말은 주일이라고 하면서 시간은 우리 마음대로 쓰면 그건 야단맞아야 할 종입니다. 그렇지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합시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돌아보게 되면 다음 주일 감사의 자리가 여느 때보다 더 붐비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 3시에 예배드리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4시 반이면 집에 도착하니까 그때부터 좀 챙겨야 합니다. 주중에는 먹고살기 위해서 시간 낼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주일 오후에, 저녁시간에 좀 구역에 11월쯤 되면 아예 안와도 조금도 부담을 안 느끼고 있던 자리에서 이제는 나아가서 좀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결혼관계를 파탄에서부터 구할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 누군가를 건져낼 수 있습니다. 생명을 구하고 가정을 구하고 사업을 구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소중한 몸의 일부  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리고 온성도가 감사에 함께 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함께하는 주일, 풍성한 감사”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수요일부터 구역을 잘 챙겨주신 구역장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내일 챙기다가 어떤 사람이 “예”하긴 했는데 신통찮은 “예”가 있거든요?  “예”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꼭 다음주일에 가지요” “예”가 있고요 하나는 ‘알았으니까 전화 끊어 주세요’ “예”가 있습니다. 그렇게 “예”하는 사람들한테는 지구담당 목사님께 제 권면 가지고는 안 통할 것 같으니까 권면 해 주십시오 라고 요청하십시오. 지구담당자들 께서는 아무래도 담임목사가 직접 나서지 않고는 ‘파도야 파도야 난 어쩌란 말이냐’그렇게 버티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저한테 알려주십시오. 저도 이번 주간에는 함께하는 예배, 풍성한 감사가 될 수 있도록 신경을 쓰겠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 돌아보고 격려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절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쉽게 주차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고 주차하고 나면 바로 예배실로 들어올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을 일시적인나마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좋은 환경에서 새로운 예배습관을 만들어갑시다.

이 좋은 환경에서 예배드리는데도 연속해서 지각을 하신 교인들께서는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깨트리시기 바랍니다. 지난 수요일 구역장들과 공부하면서 감동 먹었습니다. 왜 이렇게 좋은 환경이 되었는데 계속 결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규칙적인 생활습관 때문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규칙적인 생활습관 좋기는 하지만 고칠 것은 고쳐야 안 되겠습니까? 리모델링을 해서 바깥 환경은 새로워지는데 거기 따라서 예배하는 우리 마음자세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개보수 위원들과 일꾼들이 교회당 수리에 전념하는 동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내부수리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외부환경에 관심이 많지만 하나님은 우리 내부 환경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전문은 이노베이션입니다. 내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배에 함께 하신 분 가운데 오늘 지각하신 분만 좀 더 분발하면 되겠습니다. 오늘 845명이 지금 찬양할 때 까지 들어왔어요. 그중에서 지각생이 몇%나 될까요? 1) 5% 2) 10% 3)15% 4)20% 어느 게 맞을까요? 845명중에서 188명이 지각했습니다. 20%가 지각을 했습니다. 다행이 여러분들은 일찍 오셔서 앞에 앉아버리면 뒤에는 신경을 안 쓰지만 나는 여기서 쳐다봐야 되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꼭 열두시 예배가 힘들면 몇 주 동안이라도 다른 예배를 더 만들어 볼까요? 10시 예배에 15분 늦게 오는 사람들은 3부 예배에 나오면 1시간 45분 빨리 올 수 있는데 꼭 3부 예배 오면서 또 지각을 하더라고요 이상하게.

우리 서로 격려합시다. “다음 주일에는 10분 일찍 나옵시다.” 한 번 더 서로 격려합시다. 서로 쳐다보면서“지각없는 주일, 결석 없는 주일로 삼읍시다.”날 쳐다보면서 하지 마세요. 저는 지각도 안하고 결석도 안하는 사람이니까 서로 쳐다보면서 이야기 합시다. “지각없는 주일, 결석 없는 주일로 삼읍시다.”

생각해 보십시오. 음식 전부가 상해도 버리지만 바퀴벌레 하나가 빠져도 불결한 음식이 됩니다. 온전한 예배를 망가뜨리는 것은 예배 자 전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전체 예배를 망가뜨립니다. 여러분이 무슨 특권을 가졌다고 남의 예배까지 망칩니까? 하나님이 우리 울산교회 3부 예배를 받으실 때는 예배 자가 함께 845명이 함께 정성을 다하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대 하십니다.

예배시간에 10분 늦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분은 각오하십시오. 심지어 15분, 20분이 지나서 여유롭게 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문제는 늦는 사람이 항상 늦다는 것입니다.

마치 밥을 한 숟갈 정도 남기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밥이 많으나 적으나 남기고 반찬이 있으나 없으나 남깁니다. 나쁜 습관 때문입니다. 규칙적인 생활습관 고수하지 마시고 다음 주일에는 10분 일찍 나온다고 각오해 보십시오. 다행한 것은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목사님이 뭐라고 해도 나는 또 지각 할 겁니다. 그렇게 마음먹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렇죠? 그런 마음은 안 먹습니다. ‘오늘 하필 지각했더니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네’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 순간에는 자기가 전에 지각했던 것을 전혀 생각 안합니다. 오늘만 지각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데리고 오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안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선한 생각이 있다는 거예요. 생각을 심으면 행동의 열매를 걷을 수 있습니다.

다음주일에는 늦지 않으리라는 생각의 씨앗을 뿌리면 행동의 열매를 얻게 되고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를 리모델링 된 교회에서는 거둘 수 있습니다. 나쁜 습관은 우리를 괴롭히는 폭군과 같고 좋은 습관은 우리를 섬기는 충실한 심복과 같습니다.

나쁜 습관을 따라 살면 인생이 고달픕니다. 그러나 내가 습관을 주도해서 가면 인생이 생산적입니다.

정말 우린 복된 한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3부 예배 때는 얼마든지 주차할 공간과 함께 앉을 의자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천명이 더 와도 함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1800명까지는 넉넉하게 앉을 수 있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일단 기존신자들이 모두 나와서 함께 감사하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본당수리공사가 마무리되는 성탄절에는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분들, 이웃 분들 모시고 나와서 예배할 수 있는 복된 자리를 마련하기를 바랍니다. 한 달 남짓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마음으로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배려하면서 성탄 때 초청하면 오실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드리고 오늘 설교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과 같이, 모이는 일을 그만 두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히10:24-25) 아멘 (정근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