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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려라, 준비하라 (말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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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일들은 어떤 일이든지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공사도 그렇습니다.  행사도 그렇습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예술작품도 그렇습니다. 
음악 작품 가운데 미완성교향곡이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왜 미완성교향곡이라고 했을까? 끝을 잘 맺어야하는데 잘 맺어지지 않아서 애쓰다가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놔두어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드라마도  끝을 잘 맺어야 그 감동이 오래 갑니다.
특별히 한 해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2005년 끝을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이렇게 중요한 끝을 어떻게 맺고 있습니까?
성경, 그 내용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천지창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민족해방의 웅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반면에 아가서와 같이 아기자기한 사랑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룻기와 같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시집도 있고 격언집도 있습니다.
인류의 구세주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편지들도 많습니다.
이런 다양한 내용이 어떻게 끝을 맺을까?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오늘 설교 제목, ‘기다려라, 준비하라’ 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오늘 본문을 열심히 살펴보아도 ‘기다려라, 준비하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밑에 흐르고 있는 가르침은 ‘기다려라, 준비하라’입니다.
1절 앞부분을 보세요. ‘내가 내 사자를 보내겠다. 기다려라.’합니다.
이 사자는 세례 요한을 말합니다.
1절 뒷부분을 보세요.
‘주가 임하신다. 그는 언약의 사자, 약속된 사자이다. 기다려라.’합니다.
이 주님은 구세주, 메시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5절을 보세요.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주님은 심판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그 심판에 대해서 준비해라.’ 합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있는 구약성경의 맨 끝 장인 말라기서 4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라기서 4장은 ‘공의로운 해가 떠오른다, 기다려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 악인들은 밟힘을 당한다. 그런 일이 없도록 준비해라.’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의 끝이고, 동시에 신구약성경 전체의 끝인 요한계시록은 어떻습니까?
끝에 이르러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을  제시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 1~2)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를 기다려라’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끝 장인 22장의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

그 때 많은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흰 두루마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1절에서는 성도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성도들은 지금 보이지 않는 흰 두루마기, 주님께서 주신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두루마기는 이번 부산 APEC에서 각국의 정상들이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한 번 입었던 두루마기보다 훨씬 귀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끝 장, 22장에서는 이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경건생활을 잘 하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생활을 게을리 하는 것은 흰 두루마기에 때가 많이 묻었는데 그대로 놔두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은 흰 두루마기에 얼룩이 묻었는데 그대로 놔두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하시고, 요한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화답하고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이렇게 축복하는 말로 끝납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것은 ‘그러니까 기다려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한 것은 ‘주님,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저는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끝에서 주님이 그의 성전에 임하겠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처음 이 땅에 강림하시는 것, 초림을 말합니다.
신약의 끝에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강림하시는 것, 재림을 말합니다.
우리는 또 하나의 강림을 기억하며 체험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늘 내 마음에 강림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낯선 말이기는 하지만 현림(現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서울 - 대전- 부산, 이렇게 이어지는 것과 같이 성도들은 주님의 초림 - 현림 - 재림 이렇게 이어지는 궤도 위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탈선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주님을 기다리며  맞이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잘 기다리는 것이 준비 잘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이 대림절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강림절이라고도 하고 대강절이라고도 합니다.
그 가운데 저희 교회에서는 대림절이라고 통일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강림절’이라는 이름에는 ‘기다린다.’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강림절과 혼동되기 쉽습니다.
성령강림절에서 중요한 것은 강림입니다.
대림절에서 중요한 것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대강절이라는 이름에는 그런 의미가 들어있기는 한데 어감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림절로 한 것입니다. 
저는 교회들이 이 용어로 통일해서 사용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난 며칠간 「국민일보」종교면은 며칠 째 계속해서 ‘한국교회 성경이 바뀐다’라는 제목으로 ‘2006년은 한국교회의 「개역개정판」 시대가 열리는 해이다.’라는 요지의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1998년에 「개역개정판」이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이 성경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한성서공회 총무인 민영진 목사님이 지금도 공석, 사석에서 자주 이 이야기를 하면서 목양교회가 앞장서준 것을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국민일보 특집 어제 기사에서도 개정판 사용을 적극 홍보하고 있는 세 목사로 안동교회 유경재 목사, 덕수교회 손인웅 목사, 그리고 목양교회 유관지 목사를 들고 있더군요. 사실은 저보다 「개역개정판」에 더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목사님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성경을 「개역개정판」으로 바꾼 것은 쉽게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때 이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엇을 바꾸기가 참 어려운 때였습니다.
성서공회에서 번역을 마치고 보급하기 전에 감수용 성경을 만들어 돌렸습니다.
‘보시고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한 권 받았습니다.
마침 새벽기도회에서 로마서를 강해하고 있을 때라 예전 성경의 로마서와 대조해보았습니다. 개정한 부분을 붉은 볼펜으로 표시해 가며 대조했는데 의외로 많이 개정했습니다.
그런데 꼭 개정해야할 것들을 개정했습니다.
‘아, 교회에서 이 성경을 사용해야 하겠다.’ 저절로 그렇게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얼마 동안 상을 줄 일이 있을 때는 상품은 으레 「개역개정판」성경, 기독교교육진흥주일에 교사들에게 주는 선물도 마찬가지, 그렇게 하다가 바꿨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한국교회 전체의 「개역개정판」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저나 대부분의 성도들이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판」은 초기에 나온 것인데 성경본문은 개정을 하고서, 교독문은 예전 것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요즘 나온 「개역개정판」성경의 교독문은 개정판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교독문도 개정된 것으로 통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교독한 55번이 ‘강림절(1)’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도 ‘대림절’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아까 잘 기다리는 것이 잘 준비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잘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잘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소망 가운데 잘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며 지나는 가운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잘 기다린 사람들과 잘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어떻습니까, 여러분, 잘 기다렸습니까?
‘그야 믿음의 조상이니까 잘 기다렸겠지!’ 하시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잘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 2)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과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14: 16)하셨습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손을 주겠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끈기를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지요.
집에서 기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하려고 했습니다.
더 나가서는 여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온 지 십 년만의 일입니다(창16: 3).
십 년은 잘 기다렸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팔십육 세였습니다(창16: 16).
‘아, 이제 시간이 더 지나면 나는 아들을 낳을 수 없다.’ 하는 인간적인 판단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인간적인 판단을 초월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잘 기다리지 못하고 여종 애굽 여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의 저 무서운 분쟁입니다.
아랍은 이스마엘의 후예들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도 그런 허물이 있었네!’ 실망하지 마세요.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고 허물이 있습니다.
그것과 싸우면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설교할 때 종종, ‘성도 여러분, 이렇게 사셔야합니다. 사실은 목사인 저도 그렇게 살기는 힘이 듭니다. 그러니 평신도인 여러분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힘써야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 교회 성도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씀이 ‘사실은 목사인 저도 그렇게 살기는 힘이 듭니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어떤 쾌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고 목사님이 더 친근하게 여겨지기도 한답니다.
‘나는 목사님의 그 말이 좋아서 그 교회에 나갑니다.’ 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우리는 약점을 가진 아브라함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의 일에서 교훈을 얻어 인간적인 판단을 버리고 잘 기다리기 위해서 힘써야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하시고 이천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오시지 않는 것을 보니까 예수님은 다시 오시지 않을 것이 확실해! 나는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어! 재림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겠어!’ 인간적인 판단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적인 판단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실수로 빚어진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대림절은 인간적인 판단을 버리고 재림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하면서 잘 기다릴 것을 다짐하는 때입니다.

잘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의 본보기로 광야의 호렙산 밑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산에 올라갔습니다. 사십 일을 산에 머물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출애굽기 32장 1절의 말씀입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그리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였습니다.
그 앞에서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삼천 명이 죽었습니다.
그 때 모세가 이렇게 기도했지요.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창33: 32)

저희 교회에서 화요일마다 중보기도학교를 열고 있는데 모세의 이 기도가 가장 위대한 중보기도입니다.
모세의 이 비장한 중보기도가 없었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 비참한 일을 겪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미련한 다섯 처녀도 잘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신랑을 잘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기름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문은 닫히고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두려운 선언을 들었습니다.

잘 기다리지 못해 불행하게 된 사람을 하나만 더 찾습니다. 누구일 것 같습니까?
사울입니다.
사울이 블레셋과 싸우는데 블레셋 사람의 병력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병거가 삼만, 마병이 육천 명,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겁이 나서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었습니다.
사무엘상 13장 6절은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은 떨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 사무엘이 있으면 도움이 되겠는데 사무엘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직접 번제를 드립니다.
사무엘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삼상13: 13~14a) 라는 무서운 선언을 합니다.
사울은 잘 기다리지 못해 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강한 적 앞에서 두려움에 잠긴 왕과 백성들은 사무엘이 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줄 것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요즘 군대에서 군목이 담당하고 있는 역할과 같습니다.
요즘 정부에서 군대 군종감실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대단히 잘못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의 기록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야할 것입니다.

사실은 이 때 사무엘이 조금 늦게 왔습니다.
그래도 사울은 기다렸어야하는데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늦게 오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호렙산 밑의 이스라엘 백성들, 미련한 다섯 처녀, 그리고 사울, 이렇게 잘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과 대조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욥입니다.

욥, 이해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에서 주님의 응답을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10: 2)

하나님이 알려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욥13: 22)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 5)
귀로 듣는 신앙에서 눈으로 보는 신앙으로 신앙이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요즘 업그레이드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제일 대표적인 것은 컴퓨터이지요.
업그레이드 중에 제일 좋은 업그레이드는 신앙이 업그레이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잘 기다린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셨습니다.
물질적인 복으로, 양 만 사천, 낙타 육천, 소 천 겨리, 암나귀 천,
자녀의 복으로 아들 일곱과 모든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 셋,
장수의 복으로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를 보게 했습니다.
잘 기다려서 받는 복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님의 재림을 잘 기다리면 이것보다 더 큰 복을 받습니다.

잘 기다려서 복을 받은 또 한 사람은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율법이 해이해지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신 분인데 악, 패역, 이런 것들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인데,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십니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십니까?’
이렇게 불만이 많았던 점은 말라기 시대의 사람들과 비슷했습니다.
말라기 시대의 사람들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1장 2절,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본문 앞의 2장 17절,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그리고 17절의 끝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3장 14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박국은 실컷 불만을 토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하박국서 2장 1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하박국은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기다려라!’ 하셨습니다.
하박국서 2장 3절 뒷부분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대원리가 되는 놀라운 답을 주셨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러분, 욥과 같이 잘 기다려서 신앙이 업그레이드되고, 복을 받고, 하박국과 같이  진리의 대답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제대로 기다리지 못한 사람으로는 아브라함, 호렙산 밑의 이스라엘 사람들,  사울, 미련한 다섯 처녀, 여럿을 들고, 잘 기다린 사람으로는 욥과 하박국, 둘만 드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잘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서 그 자리를 채워야합니다.

구약이 잘 기다리며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신약이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잘 기다라며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잘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해결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모순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있습니까?
진리를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 있습니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참는 가운데 그 고통이 복으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전도 대상자가 있는데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남편이 그렇습니까? 자녀가 그렇습니까? 친구가 그렇습니까? 이웃이 그렇습니까?
끝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시편 37편 7절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시편 130편 5절과 6절은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라고 노래합니다.
이와 같이 기다리면 하나님은 들으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시편 40편 1절과 2절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시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특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구원사의 완성, 구원사의 결론, 구원사의 마침표는 주님의 재림입니다.
재림이 없으면 구원사가 그야말로 미완성교향곡이 되고 맙니다.
음악의 미안성교향곡들 가운데는 명작들도 있습니다만 구원사가 미완성교양곡이 되면 예수님의 초림도, 십자가도, 부활도 다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주님이 왜 늦게 오십니까?
기다리시느라고 늦게 오십니다.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기다리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의 말씀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성도 여러분,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잘 기다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잘 기다림으로 승리하고, 복 받고, 해답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고, 오늘 예배 가운데 우리에게 오시며, 장차 심판의 주님으로 이 땅에 오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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