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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성내지 아니합니다 (고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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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연탄을 태우는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어느 추운 겨울날 저녁 연탄을 피워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중에 너무 추워 나가 보았더니 그토록 잘 피던 연탄이 없어졌습니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눈치를 챘습니다. 이는 세든 옆집 사람의 소행이라 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하게 되면 이웃집과 싸움으로까지 번질 것 같았습니다. 교회 다니는 집사가 싸울 수도 없어서 참았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저녁 잠을 자는 척하고 나가보니 건넌방 부인이 연탄을 또 빼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뛰어나가 잡을까 했으나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 간신히 참았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두 주일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이 찾아와 "제가 연탄을 가져간 줄 알고 계셨죠?" 하며 사실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여 점쟁이 한테 물었더니 누구와 실컷 싸우면 액운이 물러가고 행운이 온다고 하여 싸움을 하려고 연탄을 가져갔는데도 도저히 싸움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은 그녀에게 점쟁이의 잘못됨을 깨우쳐 주고 전도하여 그의 가정이 모두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성내기도 더디하라)

성내는 것은 내재하였던 증오가 폭발할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대개 악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악한 것을 생각한다고 할 때에 생각한다는 '기장하다, 적어두다'는 뜻으로서 악을 악으로 갚고자 다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내는 것이 모든 분쟁과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않음을 알기에 성내지 않으며 악행자의 비난을 묵묵히 참을 뿐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누군가를 향해 갑작스럽게 자기의 분노의 감정을 폭발시킵니다. 억압, 좌절, 분노의 감정은 우리 모두가 품게 되는 감정입니다. 분노'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기 이외의 대상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나 자신을 향한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족속의 언어는 분노의 이 같은 주관적 측면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민족의 표현은 우리에게 생소한 감이 있으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서부 아프리카의 멘데 족은 분노를 말할 때 '베인 마음'이라 하고 미스키토 인디언은 '쪼개는 마음'이라 합니다. '쪼개는 마음'은 분노의 주체가 당한 불의의 결과일 뿐 아니라, 내가 자신의 감정을 지배한 적의(적의)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멕시코의 치이파스에 초트칠 조는 "분노는 달구어진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분노를 느낄 때 어떤 뜨거운 것이 마음속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것 같은 우리 감정의 상태를 매우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과테말라 국경 근처에 거주하는 코놉 족은 분노를 '붉은 영혼'이라 합니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던 '붉은 몸 속'이다. 분노한 사람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은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붉은 영혼이 몸 밖에까지 비치는 것입니다. 서부 아프리카의 맛시 족은 분노를 '썩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분노로 이글이글 타는 가슴은 곧 썩어버립니다. 우리말에도 "속 썩는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분노를 나타내는 감정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냄은 마음속에 잠재해있던 증오가 폭발함을 말함인데,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며, 때로는 패배의 표시로도 나타나게 됩니다. 성냄은 남들로 부터 모든 것을 잃으며, 자신에게는 살인독이 된다고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 학생이 선생님에게 "선생님 저는 성은 내지만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이해할 수 있네, 그러나 학생 수소폭탄이 떨어져도 오래가지는 않네. 그러나 무엇으로 그 재난의 상처를 복구할 수 있겠나?"라고 되물었다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성내지 않아야 합니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중한 선물을 많이 받았습니다(창1:27,28).

그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땅에서 살고 있지마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사는 것 같지만 저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선물은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 안에는 마음을 다스리는 특권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후 "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그 말씀 속에는 " 네 마음을 네가 다스려라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책임도 네가 책임지라" 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마음을 다스릴 특권을 우리 자신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스린다고 할 때 사람에 따라 그 다스리는 방법이 차이가 있습니다.   

  이성에 의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이성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지성인, 또는 문화인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을 비문화인 심하게 애기하면 야만인 이라고 합니다. 

자기 양심에 의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일이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양심에 묻고 이것이 도덕적으로 선한 일인가 악한 일인가 남에게 해가 될 것인가 이익이 될 것인가 등 이런 것들을 먼저 생각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우리는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의지에 의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이 의지를 가지고 어떤 어려운 시련이 있어도 끝까지 참고 잘 견딥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후에도 흑인이 백인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미국 남부에서 키가 여섯 자가 넘는 흑인이 마차에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처사로 하차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검둥이 빨리 나가"라고 차장이 그를 향해 크게 호통을 쳤습니다. 몸집이 큰 이 남자는 꾹 참고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전부터 싸움을 좋아하던 그의 친구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말했습니다. "이봐, 조지. 어떻게 된 거야. 어디 한번 주먹을 먹여 주게. 내가 합세해 줄게."  그러자 그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여보게, 하나님이 나의 울화통을 빼앗아 버리셨다네. 그래서 더 이상 싸움을 할 수 없네. 작은 칼을 불에 태우면 날이 무디어지는 것처럼 나도 신앙에 들어가고부터는 싸움을 하는 난폭한 성격이 무디어졌다네." 그러고는 기분이 좋다는 듯이 소리 내어 크게 웃었습니다.

누가 흑인의 마음을 다스린 것이겠습니까? 지성이겠습니까? 양심이겠습니까? 교양이겠습니까? 강한 의지이겠습니까? 아니면 학벌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다스리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물론 지성이 있어야 됩니다. 의지도 있어야 됩니다. 양심도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인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을 내지 않는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이루어져야 하지만 의로운 분노 역시 사랑의 마음을 품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내는 것은 분내는 것과 진노와는 다르다고 보기도 합니다. 의로운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전에 가득한 장사꾼들을 향해서 분노를 보이셨던 주님의 분노를 의분이라고 합니다. 아덴에 가득 찬 우상을 보고 분노했던 바울의 분노가 의분입니다. 이 분노는 긍정적인 힘이 될 수 있다합니다. 분노는 핏줄기 속에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고 고단한 근육에 글리코겐을 주입시켜 다시 기운을 회복하게 한다합니다. 찬닝 폴로크는 "인간과 자동차는 내부의 폭발에 의해서 앞으로 나간다."고 그의 책에 쓰고 있다합니다.

구약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350회 가량 나오는 데 비하여 '분노'라는 말은 450번 가량 나오는데 그 중에 375회가 하나님의 분노와 연결된다고 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창조적인 경험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남아프리카 므리츠버그에서 경험한 분노였다"라고 대답했다합니다.

병든 분노, 이기적 분노가 아닌 건강한 분노, 이타적 분노는 매우 창조적인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분노라고 자제함 없이 막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때에라도 우리의 분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스려져서 올바른 방법으로 표현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분노하실 때 결코 그 행동이 이성을 잃어버리신 행동은 아니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이하에 보면 양이나 소를 성전 밖으로 몰아내시면서 비둘기장은 부수지 않으시고 다만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고만 말씀 하셨습니다. 양이나 소는 주인들이 밖에서 찾아갈 수 있지만 비둘기는 일단 날아가 버리면 주인이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동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그대로 뒤집어엎기만 하셨지 내던져버리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에게는 일체 손을 대지 않으셨습니다. 이 분노의 와중에서도 예수님은 결코 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성내지 아니하는 모두가 됩시다.

  우리에게 주신 사랑가운데 행하라 하신 의무를 생각하며 성내지 않아야 합니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합니다.

  성내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의무를 감당하는 일입니다. 남들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어떻게 반응 하느냐에 따라 두부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한 종류는 자기의 권리만을 생각하는 사람이고 또 한 종류는 자기의 의무를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권리에만 더 집착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서도 우리의 의무를 더 생각한다면, 특히 성도의 가장 큰 의무인 사랑의 의무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당한 억울한 일이야말로 성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수년 전 남부 캘리포니아 주에 부랑인 폭동이 일어났을 때 일인데 어느 주일 저녁 한 젊은이가 교회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습니다. 그의 모습은 초라하였습니다. 몸은 더럽고 셔츠는 찢어져 있었으며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수염은 덥수룩하였으며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눈은 퀭하였습니다. 몸에서는 악취와 함께 술 냄새도 풍겼습니다. 그러나 교인 중의 한 사람이 외모를 보지않고 이 낯선 사람에게 친절하게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평생 교회에 발을 들여놓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모들에 의해 집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차고 안의 간이침대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낮 동안은 콘칩을 먹고 밤에는 약물을 복용하며 연명하였던 그는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개인적으로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몇 사람은 계속 보살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이 사랑으로 보살피게 되자 스티브란 이름의 청년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관심을 받아본 적도 없고 그러한 매력을 느낀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 사람들이 진심으로 돌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천천히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스티브는 어떠한 강요도 없이 자신의 삶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의 마음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태도가, 습관이, 언어가, 외모가, 드디어는 옷차림까지 변했습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갈망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터로 돌아가기로 결심했고. 나중에는 학교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의 대인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종종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이 그 젊은이를 완전히 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갔고 마침내 졸업했습니다. 현재 그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목회하고 있다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죄나 잘못과 상관없이 오해와 비난과 누명을 받을 때 어떻게 그 분노의 유혹에서부터 승리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사랑에 찬 일념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잘못과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해도 우리의 가장 큰 의무인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하신 사랑 실천의 의무를 생각하면서 성내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노력합시다.

  성내기는 더디하라는 말씀 따라 참고 평화를 만드는 자로 성내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1:18-19)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범사에 성내지 않도록 잘 참아야 합니다. 사람은 무시를  당하면 성을 내게 마련입니다. 이때도 잘 참아 내야 합니다.

  케리는 인도의 선교사였는데 성경을 일부 혹은 전부를 인도의 34말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 구둣방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인도에서 선교할 때 지식층에 속한 사람들이 모인 연회 석상에서 한 사람이 케리에게 무안을 주기위하여 거만한 태도로  "당신은 한 때 구두짓는 직공이었다면서요 "주위의 사람이 들을 만큼 큰 소리로 물었다고 합니다. 이때 케리는 "각하 구두 짓는 일이 아니라 헌 신을  고치는 일을 했습니다. "하고 한층 더 자신을 낮추어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키플링은 "사람들이 성내어 네 잘못이라 공박해도 침착할 수  있음이 장부요 남들이 너를 미워해도 미워함으로 대하지 않음이  남자의 표다 "고 말 한 적이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의 라이트 교수(Quincy Wright)가 <전쟁 연구> (Study of War)라는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거기에는 1480년부터 1941년까지 461년 동안에 각 나라가 전쟁을 한 횟수가 발표되었습니다. 영국 78회, 프랑스 71회, 스페인 64회, 오스트리아 52회, 터키 43회, 스웨덴 26회, 이탈리아 25회, 화란 23회, 독일 23회, 덴마크 20회, 중국 11회, 일본 9회 등입니다. 미국은 지난 150년 동안에 13회 전쟁에 가담했습니다. 이 모든 숫자를 합치면 461년 동안에 458회의 전쟁을 각 나라가 한 것입니다.

사람의 역사는 싸움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싸워서 서로 죽이고 시설을 파괴하고 고아와 과부와 불구자를 산출하는 비극은 이 땅에 지옥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뿐만아니라 엄청난 힘과 비용이 들기 때문에 다른 방면의 건설적인 발전에 막대한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툼이 잦은 사람의 인생은 발전이 없습니다. 오히려 쇠퇴만 있습니다. 특히 다툼의 원인은 분을 참지 못하는데서 시작이 됩니다. 사람과의 사이에서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경건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이 가는 곳마다 시비가 그치게 되어 평화가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다툼이야말로 지옥을 만드는 것 같은 비극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서 어떠한 이유로든지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야할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의 시비를 그치게 함으로 이 땅에 평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평화를 만드는 자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모세는 온유함이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인도자로서 온유함이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물을 원하면서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로 인해 낙심하게 되고 격노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말하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온유함이 승하였던 모세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노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극한 분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요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그는 그처럼 사모하고 그리워하던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노하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입니다. 노하다가 사람을 죽이고 옥살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언 25장 28절에서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은 고난 중에도 성내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참기 어려운 일도 나 위하여 십자가 지신 주님을 바라보면 어떤 것도 참고 나갈 수 있습니다. 잘 참음으로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을 뱉고 얼굴을 때리며 채찍을 가하는 자들을 향하여서도 성내지 않으시며 잠잠하셨습니다. 이방집권자 빌라도에게 넘겨주셔도 성내지 않으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는 잔악한 로마 군병을 향해서도 성내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용서를 빌기까지 하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럼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고 하신 주님 바라보며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을 실천합시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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