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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욘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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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본문- 요나 1: 8- 10

하나님께서 우리 평안의교회를 많이 사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주님의 은혜로 인도해 주셔서 예배 후, 한 해를 감사로 결산하는 당회를 개최케 하심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형통함으로, 때로는 힘들었던 삶을 이어왔던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동일하신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는 본문의 말씀을 중심하여 요나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 도 주시는 메세지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합니다. 풍랑으로 인하여 큰 배가 깨어지게 될 정도로 예기치 않았던 두려움에 어쩔 줄 몰랐던 무리들이 이것은 바다의 신이 노하여 일어난 일 같으니, 그렇다면 빨리 육지의 신을 찾아 이 풍랑에서 면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해 보자며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점점 시간이 지나가면서 자기들이 찾았던 신에 대한 불확실성과 풍랑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선장이 배 밑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던 요나를 찾아와 깨웠고, 무리들은 요나를 향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지 당신이 한 번 말해보라고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당신 직업은 무엇이고, 고향은 어디이며 어느 민족 사람이냐고 요나에게 다그쳤습니다. 그 때 요나는 놀랍게도 자신은 히브리 사람일 뿐만 아니라,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무리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분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평상시 같으면 신앙인의 으례적인 말이라고 치부할 수 있으나, 지금은 목숨이 경각에 놓여있는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누구도 가볍게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요나에게 반문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향하였느냐?" 육지와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을 피해 가다가 당신 때문에 우리 모두가 재앙을 받게 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분위기는 일순간 무리들의 풍랑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보다 오히려 요나와 그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신앙적 화제로 바뀌었습니다.

요나는 평소 신앙고백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신앙고백이란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하는 하나님에 대한 내적 확신을 입술로 다른 이들 앞에서 선포하는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나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라든지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라든지 "성령님은 나의 모든 것을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고백들은 참으로 진솔하고 거짓이 없어야 되는 것들입니다. 평상시 요나의 신앙고백은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그의 삶은 신앙고백과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차이가 있어도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하나님에게서 멀리 벗어나려는 자기모순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어디에서나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계신다고 고백하면서도, 사명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에서 피해보려고 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이 요나를 향해 다그칩니다.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밝히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어떤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면 솔직하게 밝히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최근 한 재벌 기업가의 딸이 뉴욕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우리를 슬프게 만들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녀의 사망원인이 교통사고가 아니라 아파트에서 전기줄로 목을 멘 자살이라고 밝혀지면서 더욱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기가 사귀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데 부모가 허락해 주지 않아서 무척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아파트에서 일주일 이상 나오지 않고 칩거하기도 했다고 관리인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상속받을 재산만 해도 2000억원이 넘는다고 하는데 수많은 물질도 사랑의 아픔을 치유해 주진 못한것 같습니다. 부친이 속한 그룹의 홍보책임자에게 왜 처음부터 정직하게 알리지 않았느냐고 기자들이 추궁하자 여러 가지 궁색한 변명들을 대었지만 설득력은 없었습니다.

처음에 교통사고로 뉴스에 나왔게에 그냥 그렇게 덮어지기를 바랬다라는 좀 더 솔직한 대답은 나중에 나왔습니다. 누구든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솔직한 대답보다는 좀 더 편리하고 좀 더 수월한 방법으로 넘어가기를 원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이지요. 좀 편하고 유익하다고 하면 그렇게 가는 것이 우리 사회의 도덕적 양심수치인것 같습니다. 비행청소년 부모님을 만나 상담하다보면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 애는 원래 좋은 애인데, 친구를 잘 못 만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잘못 가르쳤다거나 본이 되지 못하여 자녀에게 비행의 말미가 되었다는 대답은 거의 들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친구 잘못이고, 모두가 다 사회 잘못이라고 남의 탓을 하는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는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지금 무리들은 요나에게 당신이 어떻게 하여 이런 상황이 오게 했는지 솔직하게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직업은 무엇이며 고향과 국적은 어디인지 진솔하게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요나가 그들에게 정직하게 이야기 할 의무는 없습니다. 환란과 역경의 상황을 적당하게 둘러대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9절 말씀을 보니까 아주 정직하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대답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에 원어의 의미는 먼 곳에서 이주해온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통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게 하신 아브라함 후손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후손 모두는 먼 곳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입니다. 먼 곳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란 의미에서 히브리사람이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먼 곳에서 이주 해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신앙적 의미는 따로 있습니다. 반어적 의미와 내용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다르듯이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라는 신앙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70인역 성경은 의역을 했습니다. 신앙적인 의미로 번역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 말을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뜻을 그대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라고 밝힌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입니다라는 고백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거지요.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많은 어려움과 잘못이야기하면 괴로움과 고난을 여러분들이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불리한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런 대답을 요구했을 때 여러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자리에서는 입만 다물고 있으면 어려움이 빗겨 갈 것 같은데, 굳이 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내가 교회 다니는 집사요, 권사요, 장로라고 그렇게 말을 해서 그 환란을 뒤집어 쓸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머리가 돌아가지는 않습니까?

헌신해야할 부분에서는 머리가 잘 안 돌아가고, 그렇게 피할 상황에서는 그렇게 비상하게 머리가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요나가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상황에서 어떤 책임이, 어떤 결과가 자기에게 온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거짓없이 정직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평안의교회 집사입니다. 나는 평안의교회 목사입니다...."

최근 교회에 속한 차량들을 유심히 보면 속상한 일이 많습니다. 70, 80년대만 해도 평안의교회, 소망의교회, 사랑의교회 등등 교회이름을 쓰고 다니는 프라이드가 대단했습니다. 83년도에 개척을 하고 나서 성도가 조금씩 전도가 되어 차량이 필요한 시점에서 어머님의 헌신으로 봉고를 한 대 구입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주행거리가 10만 ㎞가 넘은 낡은 봉고차였지만 얼마나 마음이 벅찼는지 모릅니다. 매일 같이 닦고 청소하고 궁금하여 신문지를 깔고 차 밑으로 들어가 누워서 닦고 조이고 그랬습니다. 멀리서도 교회 이름이 새겨진 봉고만 보면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현실적으로 본다면, 차령에 교회 이름을 안 쓰면 행동하는 데는 편리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교통법규를 어기고도 죄책감을 덜 느끼는 것이거나, 규모있는 언행을 하지 않아도 덜 부담이 되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편리함이라면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목회자나 평신도나 의식에 문제가 있지 않고서는 그런 생각과 처신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서 진정한 프라이드를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는 요나가 사명에서 도망치는 참으로 부끄러운 지도자의 모습이었지만, 위기 상황에서, 불리한 상황에서 다시금 마음을 작정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잃었던 모든 점수를 회복하고도 남을만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시간이 다가올 때 어떤 손해가 다가온다 할찌라도 당당히 하나님의 사람이심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지금 바다의 신이 노해서 엄청난 풍랑으로 배가 깨어지게 된 상황에서는 이제 땅의 신이 힘을 발휘해서 이 바다의 신을 정복하면 된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던 우상숭배의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바다와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나는 믿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요나의 고백을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관심이 변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환경적인 관심에서 이제는 신앙적인 관심으로 요나에게로 모든 관심이 이제는 집중되었습니다. 신앙적인 것으로 화제가 바뀐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당신이 피해서 오다니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어찌해서 이런 일을 행했습니까? 10절에서 무리들이 요나에게 묻는 질문은 우리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돌이켜보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질문을 통해서 요나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이켜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요나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너에게 터무니 없는 것을 너에게 시키셨더냐? 네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그렇게 엉터리 같이 보이더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그렇게 순종할 수 없더냐?

오늘 당회지요. 당회 때 집사와 권사와 장로가 추천되고, 선택이 됩니다. 기획위원회에서 집사와 권사와 장로님들을 추천하면 여러분들이 투표로서 결정을 하시면 됩니다. 일차적으로는 담임목사가 마음에 있어야 추천이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담임목사를 통해서 기도하면서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느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지난 9월부터 석달동안 많은 기도와 고민 속에서 임원들에 대한 각 부서에 대한 일들이 준비되어져 왔습니다. 올해에는 신천집사, 권사님들에게 문자로 며칠 전에 미리 통보해 드렸습니다. 낮에 안계신 분은 저녁에 문자를 드렸고, 휴대폰이 없으신 분들에게는 집전화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참으로 평안의성도들은 감사해요. 거의 대부분은 제가 감당하기가 어려운데,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해서 종을 세우신다면 잘은 못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메시지를 받을 때 얼마나 제가 감사한지 모릅니다. 잘 선택했구나! 기쁨이 있었습니다. 문자를 못 보내신 분들도 아마도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사명을 주실 때 요나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사명이 못마땅했어요. 정말 짜증 났어요.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런 일을 시키실까? 나는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은데, 여러분, 매주 수요일마다 헌신예배를 드린 분들이 미리 와서 헌신찬송을 할 때에 제가 늘 요구하는 찬송이 355장입니다. "부름받아 나선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정말 그 찬송은 쉽게 불려질 수 있는 찬송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고 세우실 때, 어떤 직책이든, 어떤 자리든 주님께서 부르시는 줄 믿고 순종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생각에 난 이게 별로 맘에 안 들어.... 이자리는 일이 되게 많은 자리지... 그러면서 "부름받아 나선 이몸 골라서 가오리다...." 그렇게 찬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같은 직분이라도 체면은 세우되 일은 좀 덜하는 거 그런 거 없습니까? 하고 기웃거리지는 않습니까? 골라서 일해 보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여러분 마음 속에 1%라도 있었다면 오늘 이 시간 진정으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사도는 우리 지체를 비유로 말씀하지 않습니까? 월드컵에서 축구선수가 발로 슛을 넣어 우승을 했지만 우승메달을 발에 걸어주지는 않습니다. 어디다가 걸어줘요? 목에다 걸어주지요. 발이 목을 향해 "저건 한 일도 없으면서 금메달은 지가 받네..."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발은 두 시간을 쥐가 나도록 힘들게 뛰었지만 그러나 명예는 목이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이나 발이나 넓게 생각하면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께서 교회가 한 몸이라고 비유한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 선교회원들이 매주 돌아가면서 성도들이 보이지 않는 주방에서 열심히 공동식사 준비를 해놓으면, 성도들은 맛있게 먹으면서 기쁨으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선교회끼리, 속회끼리 친교를 나누는 것을 바라보면서 흐믓한 즐거움을 갖는 것이 봉사자의 행복인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고생을 죽어라 하고 저것들은 실컷 먹기 바쁘구먼.."이런 생각을 갖는 분이 있다면 자신이 서있어야 할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요나는 무리들의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내가 그렇게 순종할 수 없었는가? 그게 정말 순종하기 어려운 일이었는가?

두 번째는 요나 자신의 행동을 반성케 하는 질문이 되었습니다. 내가 어찌하여 사명을 버리고 이렇게 헛고생만 하고 있는가? 사울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바리새인과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또 다시 다메섹의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죽이려고 가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큰 빛으로 앞을 보지 못했지만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사울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후에 그는 좀더 구체적으로 간증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행 26: 14에 보면,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로다."

농사 지으셨던 분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아시지요? 소나 말이 성질이 나쁘면 자주 뒷발질을 하곤 하는데, 그러면 주인은 수레 뒤 소의 장단지부분에서 한 두뼘 정도 거리에 가시나무로 만든 채를 만들어 걸쳐두면 소가 뒷발질 한 번 하다가 가시나무에 찔려 피가 나도록 아픔을 겪게 되는 데 이후 그 소는 죽을 때까지 뒷발질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알고보면, 사람보다 짐승이 훨씬 머리가 좋은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구나..."네가 지금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데, 그것이 너에게 얼마나 마이너스인지 네가 알고나 하는 일이냐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풍랑 속에서, 죽음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할 때에 그들 앞에 끌려와서 도대체 당신이 어떤 일을 했길래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추궁당하는 신세가 된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세상에서 밟힌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빛과 소금이어야 할 우리가 밝음과 맛을 내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고 다닌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것은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참으로 부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이 질문은 비단 요나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아닙니다.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던져지는 질문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는 요나같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내 구미에 맞는 일들만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사명을 등지고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내가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보내시든지, 주님께서 무엇을 맡기시든지 충성하기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히브리 사람 앞에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써 존경을 받고 영적리더쉽을 발휘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 때때로 불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요나 같이 스스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평가하며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했던 그가 오히려 세상 사람을 통해서 추궁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정리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백성임으로 고백하는 요나로써의 회복된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게 하옵소서.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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