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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받는 긍휼 (마 5:7, 마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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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는 가운데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가 받아야 할 복 가운데 긍휼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이라고 하는 복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 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낫을 빌려줄 수 없답니다."하고 거절당하고 왔습니다. 아버지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에서 이 집에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추수하기가 급하니 낫을 좀 빌려 주십시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가 어떻게 하시려나? 지켜보고 있는데,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낫을 빌려주어라."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항의를 했습니다. "아버지, 며칠 전에 제가 낫을 빌려 달라고 할 때, 저 집에서는 빌려주지 않았는데요!" 그 때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얘야, -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면, 이것은 ‘복수’다. 그리고 ‘당신은 내가 필요할 때, 낫을 빌려 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빌려 줍니다 ’라고 말하고 빌려주면 그것은 ‘증오’다. 하지만 거절당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과거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냥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 준다는 마음으로 빌려주어야 이것이 긍휼이다!"

긍휼이라는 말은 복수도 아니고 증오도 아닌 깨끗한 마음입니다.
우리말 사전에는 '가엽게 여겨 도움'이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어는 ‘엘레오스’인데 그 뜻은 "비참한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 그를 돕는 미덕"이라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구약 히브리어로 ‘헤세드’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 들어가 그의 상황에서 그를 보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긍휼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한센씨 병자가 예수님께 엎드려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때 한센씨 병자를 대하신 예수님의 태도가 바로 긍휼함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긍휼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병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1-3절을 같이 봅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변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나으니라.”

아무도 한센씨병 환자에게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손을 젓기만 하지 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어 쫓습니다.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자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즉시 병이 나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냥 말로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 왜 구지 손을 대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한센씨 병자의 몸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려고 하지도 않고 아예 보기 싫어서 멀리 격리시키지 않습니까? 이것이 세상인심입니다. 이런 세상인심이 가족조차도 같이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만들고 헤어지게 합니다.
또 자기 집에 장애인이 하나있으면 감춥니다. 자꾸 얘기를 해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이 버리고 가족조차 외면하는 한센씨 병자의 몸에 손을 대십니다. 한센씨 병자에게 손을 대시는 예수님의 마음, 그 긍휼하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나타납니다.

불쌍히 여기셔서 손을 대시는 그 마음이 바로 긍휼함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데는 이 긍휼함이 꼭 필요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누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 이야기인가? 찾지 마세요. 그냥 예를 들어서입니다. 아내가 간음한 현장을 목격한 남편이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에 용서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보면 자꾸만 그 현장이 생각이 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용서를 했다지만 감정적으로는 용서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감정은 그렇지 않아요. 진정으로 용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생명을 주고받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하는 사이라고 라고 해도 상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시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물며 부부지간은 더 하면 더 했지요. 주고받은 상처가 작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상처는 죽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게 상처 주었던 사람이 죽거나 미국에 가고 없어도 상처는 항상 내 곁에 살아 마음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제는 용서해야지... 아픈 기억 자체를 잊고 싶고 과거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 용서하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하고 싶어서 용서한다고 해도 상처는 자꾸만 살아납니다. 이 남편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눈’입니다. 새로운 시각입니다. 새로운 눈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없다!' 로 부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아내는 죄를 지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지울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아내를 보는 시각입니다. 아내가 자신에게 부정한 짓을 하고 마음 아프게 한 사람으로 보았던 것을 이제는 아내는 지울 수 없는 죄인으로 그 죄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클까? 그 입장에 서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필요한 부족한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저 마누라가 나를 배반했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얼마나 복창이 터질 일입니까? 그러나 ‘아 불쌍하다. 그 마음은 얼마나 괴로울까? 날 보면 얼마나 미안한 마음이 들까? 진정으로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고 불쌍히 여기면 내가 자유하게 하고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도저히 못할 짓을 하여 배반하고 명예에 먹칠을 한 아내가 아닌 자신의 사랑이 필요한 가련한 여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진정한 용서를 하게 됩니다. 아내를 향한 분노에서 사랑의 시선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깨끗하게 비워진 마음으로 사랑스런 아내를 인격적으로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 앞두고 흔히 하는 말 중에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합니다.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자식은 죽어도 한다고 할 때 부모는 자식에게 져 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져주는 것이 힘이 없어서 입니까? 아닙니다.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이 있기 때문에 져주는 것입니다.

제 딸아이기 결혼을 하겠다고 신랑 될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저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허락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그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서 우리부부가 마음을 맞춘 것은 "여보!! 내 딸에게 상처주지 맙시다." 된다 안된다 하다가 안된다고 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상처만 남게 됩니다.
어차피 져 줄 거라면 처음부터 져주면 됩니다. 내가 반대하면 내 딸 상처받고 내 딸 불쌍하게 되니까 기쁜 마음으로 허락을 했습니다. "너희가 결혼해서 잘 살아라.." 지금도 그 부분에 대해서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제 사위가 못나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기대했던 것 하고 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남편이 돈을 가져가는데 "여보! 돈 잃어버릴 것 같은데 잘 좀 보관해서 가지고 가세요." 아내가 은행으로 돈을 보낸다고 했는데도 우기고 현금을 가지고 갔다가 돈을 잃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미 잃어버린 것 비난하고 상처를 주겠습니까? 그때 긍휼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 말을 안듣다가 돈 잃어버린 사람은 그 마음이 얼마나 더 괴로울까하는 생각으로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를 불쌍히 여겨주고 "여보! 걱정하지마! 그까짓 돈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건데 나는 돈보다도 당신이 더 귀해!!"하며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 말 한마디만 하면 남편이 미안해서라도 평생 공주처럼 받들고 살 것 아니겠어요? 볼 때마다 그때 잃어버린 돈 가지고 왜 자꾸 타령을 합니까? 그렇지 않아도 속상한데 자꾸 얘기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안됩니다.
직장을 그만 두었다고 해도 이미 그만 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비난하지 말고 오죽하면 그렇겠나? "잘했다!! 하나님이 더 좋은 직장 주실거다. 내가 기도할게 여보!!" 그렇게 힘을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긍휼이라는 말은 시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절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셨어요.
시편 145편 9절에도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 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에 풍성하신 분”입니다. 이 풍성한신 긍휼로 죄인된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셨어요. 그냥 그대로 받아 들이셨습니다. "얼마나 괴로웠냐? 얼마나 힘들었냐?" 그러면서 가슴을 끌어안아 주시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아이고 무슨 소리냐?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 이렇게 긍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들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 긍휼하심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계신 줄로 믿습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긍휼로 죄인 된 우리를 대하셨기에 저 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함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긍휼이 여김을 받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2. 살 사람으로 입증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씀을 드리면 살아가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찾아주는 것이 긍휼입니다. 이제는 희망이 없이 죽을 사람이 아닙니다. 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여러분 4절을 같이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나병환자, 한센씨 병자에게 제사장을 찾아가 ‘내가 병이 나았다!’라는 증명을 받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의사가 아닌 제사장이 병의 완치 증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을 찾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 찾아가서 "이제는 병이 다 나았습니다. 생긴 것은 뭉그러지고 못생겼어도. 난 병이 다 나았습니다."
이제 가정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위치를 다시 회복할 수 있게, 아들의 위치를 찾아주고, 아내의 위치를 찾아주고, 딸의 위치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일터에 가서 일꾼의 위치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자리를 찾아 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늦은 밤 고속도로를 달리다 갑자기 배가 아파 휴게소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첫 번째 칸은 문이 닫혀 있어 두 번째 칸으로 들어가 일을 보려는데, 옆 칸에서 느끼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이 사람은 조금 주춤했습니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는 게 어색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대답을 안 하면 더 이상할 것 같아 받아주었습니다. "예 안녕하세요." 
첫째 칸 남자가 또 물었습니다. "지금 뭐하세요?"
"나 부산에 가려고 하는 데요"
그러자 첫째 칸에서 그 남자가 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씩씩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런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미란씨, 조금 있다 다시 전화 드릴게요. 어떤 변태 같은 녀석이 옆에서 제가 미란씨에게 물어보는 말을 자기가 다 대답하고 있어서요."

요즘 핸드폰 때문에 이런 저런 일이 있습니다. 남의 전화에 대답을 하는 것, 있을 법한 일입니다. 몰라서 말대답 좀 했다고 고 변태라니요?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사람이 화장실에서 나가야 하나 그냥 있어야 하나 무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는 겁니다. 그 순간 설자리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자리를 다시 찾게 만드시고 일하게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병자가 아닌 일반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까지... 신경을 써 주시는 것입니다. 긍휼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 뿐 만 아니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까지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제 자리에 서게 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살이 했습니다. 왜 종살이를 합니까? 출1:7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종살이 한다는 것은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힘이 있으면 종으로 살지 않습니다. 사는 길은 바로와 싸워 이기거나 아니면 애굽을 탈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력으로는 바로의 군대를 이기고 애굽에서 탈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평생을 대대로 노예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고통과 신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식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셔서 구출해 주십니다.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자유의 땅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왜 그 땅에 가게하신 겁니까? 이제는 종에서 자유인이 되어 희망을 가지고 살게 하신 것, 이것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땅에서 자리잡고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를, 지옥의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우리들에게 기적과 이적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심을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가나안땅의 축복을 받고 살아가는 백성들입니다.
죄의 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자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살길을 여는 것이 긍휼입니다.

또, 바벨론 포로로 있던 백성들을 구출하신 사건을 보세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합니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포로 된 이스라엘을 자유인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만드십니다. 그 땅에 다시 나라를 세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으면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쟁에 지고 바벨론나라의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니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이웃나라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죄가 큽니다. 그 죄의 대가로 바벨론 포로로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입니다. 3세대가 지나갑니다. 할아버지가 와서 아들 낳고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고.... 서서히 기억 속에는 고국이 사라져 갑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날 길은 거의 없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바벨론 사람으로 자리 잡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힘이 없는 백성의 설움이 시작됩니다.

포로생활이라는 것은 아무 소망이 없는 삶입니다. 남의 나라에 노예요,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보다 고생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을 베푸십니다. 아무도 손을 내밀어 구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가 다시 나라를 세웁니다. 무너진 성을 수축하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잖아요. 자리를 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죄의 노예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자리 잡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포로에서 자유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건강, 남편 그리고 아내와 자식,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하나님 없이 내 뜻, 내 욕심대로 살다가 결국 우리도 세상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돈의 노예, 돈의 포로, 자식의 노예, 자식의 포로, 유행의 노예, 유행의 포로, 병의 노예, 병의 포로, 향락의 노예, 향락의 포로, 명예의 노예, 명예의 포로,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보내주셔서 우리 예배를 통해서 "너 지금 잘 못 살고 있는거야?" 세상의 포로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노예 된 우리들을 예배를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새 사람으로 다시 기회를,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예배시간이 자리를 잡는 시간입니다. 할렐루야!! 예배가 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세요. 하나님의 세우시는 긍휼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운명하시기 전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저희가 알지 못 함이니이다.' 그저 쉽게 말하면 '하나님, 저 사람들이 몰라서 저러는 것입니다. '몰라서 저런다.'는 말 그 밑바닥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갈릴리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를 찾아 가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기까지 하겠다고 맹세를 한 사람이 말입니다. 이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주님은 베드로를 사도로 일할 수 있게 세워 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사랑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할 때 주님은 “내 양을 치라!” 고 하시면서 사도의 사명을 다시 주십니다.

베드로를 긍휼히 여기기 때문에 다시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가 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긍휼하신 분입니다. 우리도 이 긍휼이 필요합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리를 찾아 주는 마음이야 말로 주님의 일, 마땅히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첫째는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내밀어 대심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요.
두 번째는 제사장에 병난 것을 입증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긍휼함의 결과는 ‘자유 함’입니다. 내적으로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살 희망이 생깁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자유함과 평안함과 희망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요...
4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3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병이 낫는데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잖아요. 우리는 좀 은혜를 받으면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바쁩니다. 잘하는 것 아닙니다. 자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좋은 것만 보이고 나쁜 것은 숨기려고 하잖아요. 그러면 안됩니다.

-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제사장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앞에 인정받고 싶으세요? 그러시면 누구보다도 주의 종에게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난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에게 인정을 받으셔야지요.

-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주의 종에게 인정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긍휼을 입은 자의 삶입니다. 무슨 뜻 같습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신들의 태도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책에서 본 글입니다. 긴 글이지만 짧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교도소를 갓 나온 전과7범인 사람이 어느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직장을 하나 마련해 주십시오.” 목사님은 난감했습니다. 갑자기 어디서 직장을 구해 준다는 말입니까? 목사님이 “미안합니다. 제가 직장을 구해 드릴 입장이 못되네요.”
하고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분이 말하기를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자라면서 한번도 사랑을 받아 본적이 없다. 부모가 일찍 죽어 고아원에서 자랐다. 난 한번도 사랑을 받아 본적이 없으니 오늘 난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면서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세상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불평에 대해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답니다.
“선생이 사랑을 받아 본적이 없다니요.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하는데 그거야 말로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요. 생각해 보세요. 생판 모르는 사람이 부모 없이 크는 선생을 데려다가 먹이고 입히고 고등학교까지 보내 주었는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뭐요?”
생각해 보니까 목사님 말씀이 맞거든요?
그 순간, 이 전과7범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목사님, 저에게 직장을 구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이렇다 저렇다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분 자신이 교회입니다. 당신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한남제일교회만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도 다 교회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 교회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다 교회입니다. 저가 자기 교회는 얘기 안하고 남의교회만 얘기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잘 쓰는 용어가 뭔가 알아봤더니 "너나 잘해라"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 뜻이 어떻든 간에 너나 잘 하시기 바랍니다. 남한테 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하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까지나 긍휼을 달라고, 왜 긍휼히 여기지 않냐?고 불평만 하겠습니까? 긍휼이 필요한 분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사람에게 잘 보일 생각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 잘 보일 생각만 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여러분 주의 종에게 인정받는 그런 삶을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땅에서 인정받지도 못하면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합니까?
-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여러분 예물에 관심 갖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면서 입증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긍휼함을 입증 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자꾸 남을 바라보게 하고 원망 불평하게 합니다. 마귀의 종노릇하면 안됩니다. 긍휼을 받은 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오늘도 긍휼히 여기면서 이 한주간도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도 다 긍휼을 받은 사람들이요. 긍휼이 필요한… 아주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5장 7절에서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복 있는 긍휼이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406장을 보게 되면 「내 맘이 낙심되며」

1 내맘이 낙심될며 근심에 눌릴때 주께서 내게 오사 위로해 주시네
가는 길 캄캄하고 괴로움 많으나 주께서 하며 내짐을 지시네
2 희망이 사라지고 친구날 버릴때 주내게 속삭이며 새희망 주시네
싸움이 맹렬하여 두려워 떨때에 승리의 왕이 되신 주음성 들리네
3 번민이 가득차고 눈물이 흐를때 주나의 곁에 오사 용기를 주시네
환난이 닥쳐와서 슬픔에 잠길때 주님의 능력 입어 원수를 이기네

후렴) 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론 세상 나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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