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구의 소리를 듣는가? (눅 23:13-25)

  • 잡초 잡초
  • 298
  • 0

첨부 1


벌써 연말의 분위기입니다. 2005년을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달에 와 있습니다. 그만큼 세월이 빠릅니다. 이 빠른 세월만큼이나 사람들이 마음도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요? 조금만 좋은 일 있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다가도 조금만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싹 돌아서 버립니다. 잘 해 봐야지 하다가도 작은 일 하나에도 나는 암만 해도 안 돼 하면서 좌절의 늪으로 빠져들기도 합니다.
여기 예수님을 고발하는 무리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이 어린 나귀에 올라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외치던 무리들은 다 어디로 가고 지금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사람들로만 가득합니다. 어쩌다가 세상이 이렇게 바뀌고 말았던가요?

먼저 생각할 것은 빌라도의 판단과 무리들의 판단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앞에 놓고 예수를 고발한 무리들과 예수를 심문한 빌라도의 판단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고발한 무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만들어야 하겠으니 더욱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외칩니다.
반면 빌라도는 자기가 아무리 심문을 해 보아도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고발한 것과 같은 죄목은 아무 것도 이 사람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더군다나 자기뿐 아니라 헤롯도 또한 그것을 찾지 못하고 우리에게 돌려보냈다고 하면서 이 사람은 사령을 받을만한 일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이왕 고발되어 왔으니 그냥 무죄 선고하기는 그렇고 고발한 무리들을 위해서라도 매질하여 놓아주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릅니다.
“이 자를 없애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시오.”
참고로 바라바는, 그 성 안에서 일어난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환호하던 그 마음은 다 어디로 가고 지금에 와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이 예수를 환호하며 맞아들일 때의 마음이 왜 이렇게도 바뀌고 말았던가요?
돌이켜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무리들의 환호를 보면서 로마 군사들이 나와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때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 어찌 보면 초라한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로마 당국은 예수는 자기들에게 아무런 해도 되지 않는다고 판단을 합니다. 그 뒤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들을 내어 쫓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의 판단이 옳다고 단정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환호하며 영접하던 무리들의 입장에서는 실망감으로 가득합니다. 이제야말로 로마 당국을 몰아내고 메시야의 왕국을 세울 줄만 알았더니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결코 그럴 마음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실망감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는 모습을 보면서 심한 좌절로 바뀌고 맙니다. 도대체 예수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이적을 베풀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으로부터 시작해서 죽어 있는 나사로를 살리기까지 하셨고 심지어는 하늘로부터 저주와 형벌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던 문둥병자는 중풍병자까지 고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 가에서는 여자와아이 외에 오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배부르게 먹이시는 기적까지 베푸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서도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하필 병자를 고쳐도 안식일에 고치시며 가장 민감한 문제인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왜 내어 쫓으시냔 말입니다. 그런 건 모른 척 하고 더 급한 일, 오랫동안 외적에 의해 점령당해 통치 받고 있는 나라를 해방하는 일이 더 급한 일이 아니던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데는 전혀 관심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클 수밖에요. 그래서 그럴 바엔 폭동을 일으켰던 독립군 대장 바라바를 대신 풀려나게 만드는 것이 더 낫겠다는 계산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의 생각은 반대입니다. 예수는 자기들에게 해가 되지 않지만 바라바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입니다. 얼마 전 예루살렘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위험인물 제 1호입니다. 이번 기회에 바라바를 처형하는 것이 앞으로 예루살렘을 다스리는데 더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풀어주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 그래서 매질을 하고 풀어주도록 하자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빌라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어떻게 보면 그는 기회주의자입니다. 분명 예수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매질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풀어주면 됩니다. 그런데 그를 망설이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소리였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이 무리들 모두가 다 함께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면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막강 로마 군대라고 하지만 지금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만으로는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몰려와 있는 그 수많은 백성들을 다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갇혔던 바라바를 풀어주도록 하고 맙니다.
여기 분명히 무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큰 소리로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이겼다고 했습니다. 들려지는 소리는 모두가 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소리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분명히 압니다. 예수가 아무런 죄도 없다는 것을요. 그렇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랬다가 백성들이 데모하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면 자기 목숨이, 아니 총독이라고 하는 자기 자리를 잃게 될까봐 두려운 나머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의 재판만 해도 그렇습니다. 무리들이 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지만 그들의 주장이 틀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결과는 무리들의 요구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민주주의의 맹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수결의 원칙을 말하지만 그러나 전체가 다 원한다고 해도 전체가 다 옳다고 말한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목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왔을 때도 그랬습니다. 12명이 정탐을 나갔는데 그들의 한결같은 보고는 가나안 땅이 정말 좋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쏙 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워낙 강해서 우리 힘으로는 그들과 싸워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12명 중 10명이 그런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말이 틀린가요? 객관적으로 볼 때 그들의 말은 다 맞습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들이 생각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경험과 지혜로 우리는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내 힘으로는 안 되는 일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의 여건과 내 능력만 생각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줄 알았던 일도 막상 부딪쳐 보면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거기다가 모든 여건이 좋지 않을 때는 더 신중할 수밖에 없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환경을 보고 나의 능력을 보고 나의 처해 있는 여건을 고려해 보고는 이건 된다 안 된다 이건 할 수 있다 없다 판단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느 쪽의 의견이 더 많은가도 고려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런 환경도 보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도 고려해야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안 되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옳다고 해도 하나님이 고개를 저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과 하나님이 세우신 종의 인도를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멘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약속이 현실로 주어지게 되지만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약속이 주어져 있더라도 그것이 다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현실을 보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여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자 가운데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 자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나를 실망시키고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일 수도 있고 나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으로 생각한다면 외면하고 말면 그만일 수 있습니다. 안보면 될 수 있습니다. 피해 버리면 됩니다. 하기 싫은 일이라면 하지 않으면 됩니다. 속상해 하면서 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과 나에게 도움은 안 되고 힘만 들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쪽을 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똑같은 일을 해도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하는 것과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하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사람을 외면한 그것으로 인해서 나도 주님으로부터 외면당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편 한 사람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을 품지 못하고 저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내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사람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쉽게 돌을 던지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요? 그래요 죽어 마땅한 사람을 따지자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로부터 시작해서 돌을 던지도록 하라고 하셨을 때 기세등등해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왔던 사람들 중에 돌을 던질 수 있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돌을 던집니다. 비난의 화살을 퍼붓습니다. 마구 비아냥대면서 내 그럴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내 속을 지지리도 썩이는 사람이기에 더 가슴에 품어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하는 환호성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소서 외치는 소리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한쪽은 예수를 환영하고 한 쪽은 예수를 배척하는 것 외에 다른 점이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고 다른 쪽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둘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는 예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게 되면 아니요 라고 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 깊이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좋은 일이 있다면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가 살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요 내게 좋지 않은 일이 있다면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병든 자를 고쳐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그러나 백성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원수 되었던 자들을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래서 피해 다니고 있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것과 무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나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 주님의 사랑을 알 수 잇도록 내가 이끌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냔 말입니다. 그렇지를 못하고 저런 사람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한다면 그런 내가 다시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를 못 살게 구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이 찾는 사람인 줄 알아 참 사랑으로 감싸줄 수 있어야 하고 품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십자가가 보람 있는 일이 되는 것이요 주님이 나를 건져 구원하신 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상처 받고 버림받은바 된 사람들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있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우리를 떠난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찾아나서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감싸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세상에 빠져 헤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우리가 찾아나서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그래서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아 주님 앞으로 돌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어떤 환경이라든가 병이라든가 연약함이 있다면 이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로 여러분이 온전히 회복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주님에게서 멀어지지 마십시오. 힘들기 때문에 더욱 주님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나를 치료하시고 나를 회복시키고 나를 하나님의 품으로 돌려주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시오 그 고통스러운 채찍에 맞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으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게 어떤 아픔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불평하지 마십시오. 누가 나를 어렵게 만든다고 해서 비난하지 마십시오. 원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오늘 내게 있는 어려움으로 인해 더욱 감사하십시오. 내게 있는 상처로 인해 더욱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시고 힘들어 하는 나를 위해 손 내밀어 잡아주시는 주님의 손길에 나를 맡기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힘들기에 더욱 감사하십시오. 고통스럽기에 더 감사하십시오. 누가 나를 어렵게 만들거든 그 사람이 바로 내가 사랑해야 할 지극히 작은 자라고 믿으십시오. 아울러 모두가 다 옳다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도 옳다고 하시는지 깊이 묵상해보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세워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