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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휘장은 넓게, 말뚝은 견고히 (사 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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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사 이사야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사역을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고 하였습니다(사 9:2).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으로 이루어나가는 신약교회의 비젼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53장에는 「십가자 밑에서 그린 그림」이라고 불릴만큼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의 장면을 정확히 묘사하였습니다. 이어서 54장에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고 하는 말로 기적 같은 교회시대의 환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앞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하고 자기 교회의 설립을 선포하므로써 구체와 시켰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세상 나라는 다 멸망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발전하고 건재하여 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자기의 교회를 지키시고 발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 뜻을 이루어 드려야만 합니다.
2006년은 우리 교회가 설립된 지 육십 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는 2006년 새 회기에 목회행정의 기조를 「휘장은 넓게, 말뚝은 견고히」라는 표어로 하고, 우리 교회의 역사적 의미와 새 시대를 열어갈 비젼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2절에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라고 한 말은 교회의 영역을 끝없이 넓히라는 말입니다. 곧 복음의 세계성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행 1:8).

I. 신비로운 축복의 약속입니다.

본문 말씀 1절에 “잉태지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장막터를 크게 잡고 휘장을 넓게 펴야 될 이유를 밝혀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권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축복하시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입니다.

(1) 교회가 세상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여기 “홀로 된 여인”은 외롭고 약한 자를 뜻하는데 성경에서는 흔하게 “고아와 과부”라고 표현하였습니다(출 22:22-23). 주경학자 박윤선(朴允善)박사는 본문에서 말하는 “홀로 된 여인”을 이사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거나 또 한편 장차 신약시대에 전개 될 그리스도의 교회를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강대국 바벨론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가 온갖 억압과 고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홀로 된 여인으로, 바벨론을 남편 있는 여인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다시금 부흥 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또한 이것을 멀리 신약교회로 비유할 때 초대 교회가 세상나라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당하고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지만, 결국 교회를 핍박하던 세상 나라는 멸망하였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온 세상을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60:22에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2) 성도가 받게 될 꿈같은 축복입니다.

1절에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잉태하지 못하고 구로치 못하는 여인이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不姙)여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경우는 대체로 시집 못간 처녀이거나 남편 잃은 과부도 해당됩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임신 중에 겪는 고통과 해산이 임박하여 구로하는 아픔 역시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이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새 생명에 대한 환희와 행복으로 이어지는 과정입니다(요 16:21). 그러므로 자식을 두지 못한 여인의 불행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한을 품게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상황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누구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창 30:1-2).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체념해 버린 사람에게 자식을 낳게 된다는 약속을 하고 그것도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더 많게 하겠다고 하였으니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사는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신비로운 은혜입니다. 사람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현실로 이루어 놓으십니다. 일찍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당하고 회복불능의 상태에서 좌절하고 있을 때 신비로운 하나님의 경륜을 내다보면서 민족의 비젼을 선포하였습니다. 예레미야 31:22에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흑암의 땅 사망의 그늘진 곳으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사건을 예언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하였습니다(사 9:7).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과거에 이루어졌던 일 보다 앞으로 열어나가게 되는 새로운 일에 더 큰 희망을 가집니다. 시편 126:3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5절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고 하였습니다.

Ⅱ. 수용할만한 그릇을 준비하라는 뜻합니다.

식구가 늘어나면 거처하는 공간도 그만큼 넓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잉태하지 못하고 생산하지 못하는 여인에게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자식이 생기에 되었다면 이는 꿈같은 축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축복의 언약을 불신하고 홀로된 여인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버린다면 아무리 많은 축복이 주어져도 그것을 거두지 못하며 흘려보내고 말 것입니다. 여기 장막터를 넓히라는 것이나, 휘장을 넓게 치며 줄을 길게 하라고 하는 것은 무한 광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키우라는 말씀입니다.

(1) 생각의 그릇입니다.

골로새서 3:1-2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것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에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릇의 크기나 넓이, 또는 깊이도 중요하지만 그 생각이 고상하여야 됩니다. 이사야 55:8-9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생각에 접근하고자 애를 썼습니다(시 139:17).

(2) 은혜의 체험을 통한 신령한 그릇입니다.

성도가 신령한 삶을 통하여 은혜의 체험을 하므로 은혜의 그릇을 키우게 됩니다. 아이 사무엘은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잠을 자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생활을 했지만 은혜의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분간하지 못하였습니다(삼상 3:4-5).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후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하였을 때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 할 줄을 알지 못하고 경험이 없사오니…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선악을 분별하게 하여달라”고 기도했습니다(왕상 3:5-9).
하나님의 은혜나 축복은 신비로운 것이기 때문에 은혜의 체험 없이는 분간하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2:13에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의 상태에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지 못하고 축복의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생활에 있어서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됩니다(엡 4:13). 사도 바울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엡 3:18-19).

(3) 인물을 키우게 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를 그릇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15에는 사도 바울을 가리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2:20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그가 의도하시는 나라를 경영하시면서 거기에 쓰임 받을 일꾼을 키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삼년 동안이나 제자를 훈련시키신 것도 이런 일을 위하여 준비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9에는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을 기둥같이 여기는 재목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 신실한 인재를 양성하는 곳입니다. 시편 110:3에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고 하였습니다.

Ⅲ. 신약교회의 비젼을 나타냅니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교수는 그의 저서 미래사회(Next Society)에서 21세기는 모든 분야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사회적 변화를 예고하며 거기에 대비하는 경영철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의 말처럼 우리는 이전에 생각도 못했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는 문화적 환경의 변화에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러한 사회와 환경의 토양 위에서 복음의 사명을 전략적으로 펼쳐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1)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일찍이 메시야의 환상에 충만한 이사야는 장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펼쳐지게 될 새로운 시대의 기적같은 현상을 소개한바 있습니다. 이사야 11:9에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오순절 이후 성령받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분부를 받들어 세계도처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 28:19)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복음의 대상이 언어와 종족에 구분없이 적용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신 말씀은 복음의 영역이 공간의 벽을 넘어 오대양 육대주에 편만할 것을 내다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나라를 보더라도 수천 년 이교 국가에 복음이 들어온 후 불과 백여 년 만에 천만 명이 넘는 기독교의 나라로 바뀌었으니 물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게 되는 증거입니다.

(2) 지식과 문화의 벽을 넘어

포로시대의 선지자 다니엘은 마지막 시대를 예언하면서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하였습니다(단 12:4). 오늘날 인간 지식의 발달과 과학의 눈부신 발명은 공상의 세계를 현실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처럼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세계는 최첨단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인간의 가치관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모든 문명이 양(量)에서 질(質)로 변천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풍토는 현대교회가 전개하는 복음운동의 방법을 고도화 시켜 놓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세계화의 물결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오늘날 초, 중학생들의 조기 유학이 말해주듯이 언어와 민족, 또는 국경의 벽을 허물어 놓았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앞으로 더욱 가속화 된다고 볼 때 우리 교회가 시도하는 정책의 비젼도 새롭게 짜여 져야 될 것입니다.

(3) 승자와 패자의 논리

오늘날 세계화 속에서 경제 전쟁에 돌입한 사람들은 흔히 시장이나 무역의 장벽 없이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가장 신속한 정보와 고품질의 상품으로 세계를 석권하는 자가 승리자로 군림하는 것입니다.
에수님께서도 일찍이 하나님 나라의 경쟁력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운동을 치열한 전쟁으로 표현하였고(마 11:12), 그 비결은 보통 사람이 알 수 없는 비밀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3:11-12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의 의도에 맞도록 충성스럽게 장사를 하여 배나 남겼을 때 이를 칭찬하시고 그에게 더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낙인 찍어 그 있는 것도 빼앗아 버렸습니다(마 25:28-29).
예수님께서 보시는 승자와 패자의 개념은 이런 것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계시의 환상을 품고 거기에 눈높이를 맞추며 끝없이 도전하는 교회입니다. 우주적인 복음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세계를 장막터로 삼아 휘장을 넓게 치는 것입니다. 그 확보한 영역만큼 그리스도의 이상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있는 자에게 더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황광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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