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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빠의 성탄절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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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그린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초현실주의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89)의 1951년 작품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Christ of St. John of the Cross)를 약간 고친 그림입니다. 제가 본 대부분의 십자가 그림은 땅에서 올려다보거나 마주 대하고 있는 관점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림들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고통을 생각하게끔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으로 그려진 그 그림은, 십자가에 달린 당신님의 아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할까를 생각하게끔 했습니다. 관점만 바꾸었을 뿐인데 그것이 제게 또 다른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동안 제가 들어왔거나 혹은 전해왔던 성탄 설교의 대부분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관점에서 묵상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관점에서 성탄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해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성탄절을 환호하면서 가장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장사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대형 마트들은 초대형 크리스마스트리에 화려한 조명과 요란한 장식들을 답니다. 할아버지 산타로는 부족한지 아가씨 산타들까지 동원되어 흥겨운 캐럴송에 맞추어 춤을 추며 분위기를 잡고 판촉행사를 벌입니다. 술집이나 여관들도 ‘Merry Christmas’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한 대목 잡으려고 얼마나 수고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들만 즐거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연인들은 달콤한 데이트를 꿈꾸면서, 아이들은 푸짐한 선물을 기대하면서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또 교회는 성탄절이 되면 부모를 초청하기 위한 아이들 재롱발표 준비로 분주해집니다. 높은 십자가 꼭대기에서부터 입구까지 사람들 머리위로 쏟아져 내리듯이 오색  찬란한 조명등을 달아놓습니다. ‘축 성탄’이라는 글도 빼놓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대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그 모습은 ‘축 성탄’이라고 할 만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이 태어나신 곳은 은은한 조명등 아래가 아니라 어두침침한 마구간이었고, 흥겨운 캐럴송 대신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이었습니다. 푸짐한 축하 선물은 고사하고 깨끗한 잠자리조차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성탄 카드로 보면 마구간이 고상하고 낭만적인 분위기지만, 실제로 그곳은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곳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자식을 낳은 기쁨도 크겠지만, 갓 태어난 아이를 마구간 말죽통에 뉘여야 하는 미안함과 안타까움도 함께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유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 일반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축 성탄’이라기보다는 ‘애처로운 성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빠’(Abba)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요, 동일한 능력과 동일한 영광을 가지신 유일한 아들, 독생자이십니다. 그런 분이 말죽통에 뉘였습니다. 그것은 단지 어린 시절 한때의 고난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친 고난의 서곡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제 전 생애에 걸쳐 고난을 겪으실 것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당신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인 인간에게 조롱과 멸시와 모욕을 당하실 것이고, 따귀를 맞고 침 뱉음을 당하실 것이고, 채찍에 맞으실 것이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늘 아빠의 마음이 마냥 기쁘고 즐거울까요?

요한이가 두 돌이 되기 전에, 자다가 경기(驚氣, convulsions)를 한 적이 있습니다. 숨을 쉬지 못해 꺽꺽 거리고 몸이 뻣뻣하게 굳으면서 싸늘하게 식어갔습니다. 아내와 저는 난생 처음 겪는 일이라 아이가 죽는 줄 알고 무척 당황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이의 생명과 내 생명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자식이 고통당하면 그 고통을 대신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그날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는 분명 깊은 아픔과 고통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 아픔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실 의무는 없으셨습니다. 반역하여 온갖 죄악만 만들어내는 피조물들을 쓸어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하신 자녀들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당신님의 ‘사랑’, 곧 ‘애정’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애정’을 발견하는 순간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나 같이 형편없는 죄인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내 가슴에 밀려들 때, 내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애정을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한 여인이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하나 있는 딸자식을 위해서 이를 악물었습니다. 모든 아픔을 속으로 삭이고 약한 모습 보이지 않은 채 억척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딸아이는 계속 비뚤게 자랐습니다. 아무리 타이르고 달래도 점점 더 반항적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너무 힘들어 딸아이를 재워놓고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훌쩍 훌쩍 울었습니다. 자다가 그 넋두리를 들은 딸은 그제야 펑펑 울며 엄마 품에 안겼습니다. 딸은 아빠가 죽은 후에 별로 울지도 않고, 담담하기만 한 엄마를 보면서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답니다. 그래서 아빠 대신 복수하는 심정으로 엄마를 미워하고 반항했던 거죠. 그러다가 엄마가 아빠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모진 감정이 녹아내리고 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한국의 부모님들 중에는 어린 시절 너무 못 입고 못 먹고 자란 탓에, 자식만큼은 그렇게 살게 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부지런히 일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자식이 계속 비뚤어지면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러느냐고 따집니다. ‘입을 옷이 없냐?, 먹을 밥이 없냐?, 따뜻한 집이 없냐?, 뭐가 못마땅하냐?’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하려고 밤낮 수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의무에 충실하려고 하면서 아이에게 충분한 ‘애정 표현’을 못했던 것입니다. 부모의 애정을 느끼지 못한 자녀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부부간에도 적절하게 애정이 표현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애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아내가 남편에게서 애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그 두 사람은 곁눈질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설령 외도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은 아주 따분하고 답답한 생활을 할 것입니다. 애정 없는 교사는 학생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애정 없는 직장생활은 더욱 고단하고 힘듭니다. 애정을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동물과 식물도 애정을 받으면 달라집니다.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개와 애완용 개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보신탕용 개는 늘 기운 없이 축 처져 있지만, 애완용 개는 털에 윤기가 흐릅니다. 화초를 키워도 애정을 담아 물을 주면 싱싱하고 이파리도 반짝입니다. 그러나 선물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의무감으로 키우는 화초는 시들시들 합니다. 무생물도 애정을 표현하면 달라집니다. 차에 대한 애정이 없이 몰면 최신형 에쿠스도 금방 똥차 같이 되지만, 중고 프라이드라도 애정을 가지고 대하면 갈수록 새 차로 변합니다. 애정을 가지고 닦아주는 농문은 20년이 지나도 반들반들하지만, 애정이 없이 대한 농짝은 5년도 되기 전에 망가지거나 찌그러집니다.

신앙생활도 애정이 있느냐 없느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똑 같은 예배를 드리고 똑 같은 봉사를 해도 하나님께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과 ‘애정이 없는’ 사람의 모습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애정 없으면 찬양하고 기도하다가도 하품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그때뿐이며, 쉽게 지치고 피곤해져서 번번이 죄에 넘어집니다. 가끔 열심을 낼지라도 율법주의적인 바리새인과 같이 됩니다. 똑 같이 신학을 배워도 ‘진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배우는 사람과 단지 통과해야하는 피곤한 과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는 전혀 다릅니다. 성탄절이 되면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좋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좋은 일도 애정이 없으면 단지 일회성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애정 없는 고아원 방문을 아이들은 오히려 귀찮아한다고 하더군요.

얼마 전까지 ‘장미빛 인생’이라는 드라마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한 번도 보질 못했지만 워낙 유명해서 주워들은 것만으로도 대충 내용을 압니다. 아내는 떨어진 남자 속옷을 입어가면서까지 한푼 두푼 모으며 알뜰하게 삽니다. 몸에 불치병이 병들기까지 자기를 희생하며 온 가족을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아내 몰래 바람을 핍니다. 참 몹쓸 사람이지요. 그런데 바람난 남편이 결정적으로 돌아오는 계기가 있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단지 아내가 병들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 특히 자기에게 쏟아 부어진 그 애정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나를 향한 애정’이 깨달아지고 느껴지면, 사람은 변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마구간 말죽통에 누이시면서 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애정의 표현이 내 가슴에 전달된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 변할 것입니다. 그분을 향한 나의 기도, 나의 찬양, 나의 예배는 새로워 질 것입니다. 같은 말씀을 읽어도 무미건조하게 느껴지지 않고 송이꿀보다 더 달게 여겨질 것입니다. 나를 향한 그 분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면, 나의 직장생활, 나의 가정생활이 달라질 것입니다. 반면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바람난 아내처럼 세상을 향해 한눈파는 모습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내를 버리지는 않지만 애인을 두고 몰래 사랑하는 바람난 남편처럼 세상과 양다리 걸치고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성탄이 되면 거리는 화려해지고 사람들마다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그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과연 첫 성탄절에 보여준 하나님의 뜨거운 애정이 발견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2005년 성탄절에 하늘 아빠의 뜨거운 애정을 깨닫고 느끼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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