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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곧 오소서 임마누엘 (사 6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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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마지막 잎새가 얼른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이젠 지쳐서 생각하는 것조차 싫어...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저 담쟁이덩굴의 마지막 잎새처럼 이젠 조용히 사라지고만 싶어...”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주인공 존시의 대사입니다. “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난 죽는 거지?” 힘없이 묻는 존시의 그 말 한 마디마저 오늘 우리에게는 사치스러운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강한 척, 아는 척, 가진 척 하며 절망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참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희망을 걸 수 없는 마지막 잎새 같은 것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 그것도 머지 않아 끝이 날 것 같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올 것 같으면 마지막 잎새가 결코 남아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불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삶의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고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묻고 있습니다. “정말 이대로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입니까?”
 
  그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과거를 회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사람들은 지난 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경험한 민족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애굽 왕 바로의 노예로 지낼 때 무슨 희망이 있었습니까? 아무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아니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탄식 소리와 신음 소리를 누가 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들으시고 강림하사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기적들을 통해서... 역사 속의 그 어떤 신이 그와 같이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결코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죄 범한 그들에 대해서 심히 노하셨을지라도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 주님이 지금도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렇게 볼 때 과연 시인의 고백은 아주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460장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그 주님이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뭔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남의 탓부터 할까요? 심지어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죄수들 중에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작 한다는 말이 재수가 없어서, 혹은 돈이 없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난 중에도 주님께 부르짖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그런 고난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죄와 허물을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가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고백해야 합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오늘 주위에서 발견되는 온갖 무서운 죄악들을 생각할 것 같으면 우리가 조금 빗나가는 삶을 사는 것이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어려움이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교만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믿지 않는 우리의 불신앙의 결과로 빚어진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주님 앞에서 죄를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먼저 우리의 죄부터 인정하고 고백해야 될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이웃집 베어먼 아저씨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베어먼 아저씨는 밤새 그렇게 무섭게 휘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담장에 마지막 잎새를 그려 놓고 죽었습니다. 어제 존시가 보았던 그 마지막 잎새는 이미 땅바닥에 나뒹구는 죽은 잎새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담장에 그려진 새 잎새는 떨어지지 않는 영원한 잎새가 되어 꺼져가던 존시의 생명에 다시금 불을 지폈습니다.

  주님은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절망의 문을 깨뜨리시고 그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희망을 향한 기다림의 근거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불렀던 “아빠 아버지!”는 그 주님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영원한 희망의 근원이 되시고 한없이 넓고 큰 능력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렇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처럼 주님은 이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때문에 우리는 그 주님을 향해서 담대히 외칠 수 있습니다.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그 주님이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절망 중에서 부르짖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은 그 주님의 재림 때에 이뤄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도 그 주님을 기다리는 기다림 속에서 우리의 모든 절망적인 정황은 넉넉히 극복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임하시는 성령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참된 의미의 이김을 미리부터 맛보게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주님을 기다리는 기다림은 해묵은 진통제와 같이 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놀라운 주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믿음의 행동인 것입니다.

  오늘부터 금년도 대림절 절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 절기는 극히 절망적인 분위기에서 시작됩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상황은 극히 절망적입니다. 이스라엘은 원수들과 이방 나라들에 의해서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구원하시고 또 보호하시는 주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누가 말했습니까? 그런 증거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심한 고통 가운데 팽개쳐져 있는 것입니까?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주님이 노하셨습니다. 노하신 주님이 징계의 채찍으로 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그토록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과 그 죄로 말미암아 주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하반절)

  너무나 오래 계속되는 재난에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주님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습니다. 문제를 주님께 맡기려는 사람들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먹구름을 뚫고 밝은 태양을 향해서 날아오를 수 있게 하는 삶의 반전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반전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렇게 고백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하반절) 이렇게 고백하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반전의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희망이 확실한 것은 주님께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또한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참된 희망은 자기 백성을 늘 돌보시고 살피시는 전능하신 주님의 그 능력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주님의 그 놀라운 능력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무모한 일이 아니요 또한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고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이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절망을 이기고 승리하게 할 것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주님 안에 참된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 주님을 기다리며 맡기신 사명에 죽도록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주님이 주시는 영광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아 쓰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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