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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삿 16: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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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 나라는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위한 난자제공사건이 가장 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모 방송에서 황 교수의 연구팀이 연구를 위해 난자를 제공받고, 그 대가로 금품도 주었다는 내용을 보도하여 터진 사건입니다. 이 일을 황 교수가 알았느냐 몰랐느냐에 초점을 맞추면서 급기야 황 교수가 기자회견을 통해 모든 사실을 인정했고, 이제 모든 줄기세포의 연구를 중단하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입니다.

  줄기세포연구에 관한 논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동물이나 사람을 복제하는 일은 생명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반대하는 견해와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도 정리가 되었습니다.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황우석 교수팀의 인간체세포복제행위는 그것이 연구 목적이라도 사용하는 기술이 인간복제 기술과 동일하므로 언제든지 복제인간의 탄생으로 연결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이 연구는 인간생명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인간 생체실험이며, ‘살인하지 말라’는 보편적인 도덕법을 범한 윤리적 범죄행위이다... 이 연구는 과배란 촉진에 따른 여성신체의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연구집단 안에서는 난자를 제공받아서는 안된다는 국제윤리지침도 무시한 것으로서, 여성을 실험도구화하고,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며, 비윤리적인 난자매매를 가속화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생명에 관한 논쟁 속에 밝혀진 이번 사건으로 온 국민의 분노가 치솟고 있습니다. “방송국을 폭파시키겠다, 담당 PD와 가족을 죽여버리겠다, 국제망신이다, 아까운 인재를 매장시켰다”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국제 사회도 이번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터질 문제가 불거진 것으로 보도하고, 이번 일로 황 교수의 노벨상수상에 차질을 빚게 되었고, 줄기세포연구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고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이 일로 마치 한 개인의 영예가 떨어지고, 국가의 위신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난치병연구에 커다란 장벽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이제 이것으로 끝입니까? 이번 사건을 보면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어떤 사람의 한마디가 흥분하는 모두의 마음을 가라앉게 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개인도 끝난 것이 아니고, 국가의 신뢰도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노벨상도 물 건너 간 것이 아닙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밝히고 바르게 시작하면 됩니다. 콩을 젓가락으로 집는 한국인의 섬세함과 우수한 두뇌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기독교윤리협회의 마지막 선언이 큰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난치병 치료를 위한 성체줄기세포 연구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으로 심각한 문제점을 동반하는 배아줄기세포 배양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며 성체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촉구한다.”

  여러분, 인간 삶에 특히 신앙에 늦은 것은 없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깨닫는 순간부터 다시 시작해도 충분합니다. 우리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첫째, ‘비록 실패했더라도’ 입니다. 본문은 유명한 삼손에 관한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이 꿈에 그리던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하여 살 때 사사시대가 있었습니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재인 왕정시대를 열기 전에 여러 곳에서 사사들이 세워져 나라를 다스리고 지켰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삼손입니다. 사사기에 삼손의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삼손은 사사 중에 기억될만한 인물입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 나실인으로서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그 힘의 근원은 머리에서 비롯된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길게 늘어진 머리가 힘의 근원이었기에 하나님은 그 머리를 자르지 않게 하였습니다. 삼손은 그 능력으로 당시 적군이었던 블레셋을 무찔렀습니다. 삼손이 살아 있는 한 도저히 이길 가망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 블레셋은 드디어 삼손을 넘어트릴 계략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용했습니다. 여자에 약했던 삼손에게 들릴라는 날마다 유혹하여 괴롭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못할 말이 있느냐고 하면서 삼손을 힘들게 했습니다. 이것이 유혹이고, 잘못된 것인 줄 알았으면 단호하게 물리쳐야 하는데, 삼손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삼손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성경은 그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죽을 지경이라” 마침내 삼손은 유혹에 넘어가 들릴라에게 힘의 비밀을 건네주고 말았습니다. 블레셋이 삼손의 머리를 자르자 신기하게도 힘은 사라졌고, 삼손은 예전처럼 블레셋이 와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삼손을 잡아다가 두 눈을 빼고 자기들이 믿는 신전의 기둥에 팔다리를 묶어 두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삼손이 실패했습니다. 그가 넘어졌고,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납니다. 비록 한때 여인의 유혹에 빠져 실패했지만, 그의 마지막은 감동적인 승리로 끝납니다. 비록 실패했더라도, 죄를 지었더라도, 아직 늦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살면서 가장 초라해 질 때가 바로 실패할 때입니다. 그래서 실패하면 자포자기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종종 실패를 경험합니다. 죄도 짓고 넘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낙심하면서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며 포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비록 실패했더라도 우리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죄를 범했더라도 얼마든지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권투가 인기 있는 스포츠였을 때, 홍수환이란 유명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1977년 11월 26일 바로 이 즈음에 이 선수가 적지인 파나마에서 경기를 하는데 2회까지 무려 4번이나 다운이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모두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3회전에 상대선수를 몰아붙여 KO를 시켰습니다. 그때부터 그에게 4전 5기의 별명이 붙었습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칠전팔기의 용맹은 바로 여기 성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실패했더라도,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납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그의 인생에 많은 영예를 얻었지만,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어렵게 쌓아올린 그의 명성과 업적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남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탐하여 간음죄를 지었고, 그의 남편인 충신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무참히 죽게 한 살인자였습니다. 이런 일이 임할 때 모든 사람은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실패했지만 그는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을 그를 용서했고, 사람들은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큰 영예와 축복을 누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실패했습니까? 죄를 짓고, 잘못했습니까? 그래서 낙심하고 절망하십니까? 이젠 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칠전팔기의 신앙으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둘째, ‘비록 힘이 없더라도’ 입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힘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마지막도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본문도 삼손이 마지막 힘을 다하여 신전기둥을 무너트린 사건입니다. 삼손은 처음에 힘이 있었습니다. 그 힘으로 적군을 물리치고, 그 힘으로 능력을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힘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너무 초라한 모습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너무도 약하게 보입니다. 이제 그의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할 상황입니다. 그가 다시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삼손에게 다시 힘이 생겼습니다. 이젠 보다 더 큰 힘이 생겼습니다. 그 힘으로 다시 싸워 이깁니다.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 성경은 그가 지금까지 살았을 때 블레셋을 무찌른 숫자보다 이 한순간의 힘으로 죽은 숫자가 더 많았다고 강조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놀라운 힘이 다시 임했습니다.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늦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힘이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모습입니다. 우리의 힘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처음부터 그 힘은 내게서 온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내려 온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힘이 있던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많이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강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출발했습니다. 빈손으로 시작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 가운데 지금 힘이 없다고 말합니다. 육신과 영혼이 지친다고 말합니다. 이제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나는 쓸모가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스스로를 약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라면, 회복시키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늦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포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스스로를 비참하게 하고, 낙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신앙입니다. 삼손이 약해졌지만, 그가 다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는데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습니까? 그가 포기하지 않고, 늦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기도요, 신앙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해 보십시오. 나를 한번 생각해 달라고, 나로 강하게 해 달라고, 나에게 은혜를 달라고, 필요한 것을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삼손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 말씀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여 다시 힘을 얻고, 잃었던 것을 다시 찾으시고,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비록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입니다. 본문은 삼손의 이야기의 마지막 결말입니다. 이 사건이후로 이제 삼손은 성경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젊은 시절, 좋은 시절, 꿈같은 시절을 그가 영예와 축복을 얻으며 황금기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시절을 보내면서 그가 실패했고, 힘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회복하려고 하는데 이젠 시간조차 그의 편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삼손은 두 눈이 뽑힌 채, 적군 앞에 조롱과 비난을 받으며 이제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이방 신전에서 그의 쓸쓸한 생애를 마감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너무도 안타까워 보이는 순간입니다. 모두가 이런 상황에 이젠 시간이 아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삼손은 패색이 짙어 보입니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어 보입니다. 거의 끝나는 시간이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본문의 마지막은 삼손이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을 덮어버리는 그야말로 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늦었다, 끝났다고 생각된 순간에 반전이 이룬 것입니다.

  우리가 축구경기를 보면서 그런 경험을 합니다. 전 후반과 연장전까지 다 뛰면서 이젠 패색이 짙어 보입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1분에 역전되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도 그런 경기를 경험했고 많이 보았습니다. 늦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 끝나지 않으면 늦은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닙니다. 결국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역전되고, 변화됩니다. 이것이 삼손의 이야기에서 아주 귀하게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늦었다고 말할 시간은 인생에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젊은 날 좋은 시간을 다 보내고 이제 죽어 가는 사람에게 무슨 구원의 은혜가 임하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상의 강도를 보십시오. 그가 좋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그는 강도로 살았습니다. 남을 헤치고 죽이고 살았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구원을 받을 시간조차 남은 게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죽는 그 순간에 그가 주님을 만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한 마디로 그는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늦은 시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살아있다면 구원을 받습니다. 늦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반복하는 것 중에 하나가 후회입니다. 우리는 결심도 잘하지만 후회도 잘합니다. 그때 왜 그렇게 했을까 후회하면서 아쉬워 할 때가 많습니다. 후회란 깨달음입니다. 철이 드는 것입니다. 후회하면서 다시 해보기에는 시간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다시 시작해도 시간은 충분합니다. 칠십 년의 인생을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69년을 잘못해도 1년으로 다 회복됩니다. 아니 69년 364일을 잘못해도 단 하루로도 그 덮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계에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와 같기 때문입니다. 천년 같은 하루만 있으면 70년이 아니라 700년도 덮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해가 이제 꼭 한달 남았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우리가 종종 뒤를 돌아보며 후회합니다. 그러면서 자책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후회하고 깨닫는 순간부터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한 달이라는 기회가 있습니다. 이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처음 마음으로 출발하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에 늦었다고 생각하는 시간은 결코 없습니다. 오직 깨닫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모든 인생은 다 깨닫는데 단지 시간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이냐 나중이냐, 여기서냐 아니면 거기 가서냐, 이 차이만 있습니다. 깨닫고 바로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삼손의 이름은 본문이후로 다시 신약성경에 등장합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사람들 속에 그의 이름이 선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한때 실패하고 약했지만 삼손은 다시 모든 힘과 능력을 회복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실패했더라도, 비록 힘이 없더라도, 비록 시간이 모자라도, 아직 늦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세계에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이제 다시 깨닫고 시작하여, 좋은 결말을 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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