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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명이 있어 달려가는 길 (행 20: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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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늘로서 2005년도 한해의 교회 회기를 마치고 다음 주일부터는 2006년도 회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로서는 본격적인 3기사역이 시작되는 시기라 생각합니다. 이번 주일은 한 매듭을 갖는 시간으로서 이러저러한 스스로의 평가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며 여미고 다짐하는 새로운 시작을 이루기 원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평가와 사역의 지평을 앞두고 그리고 내일에 대한 계획을 진행해야 한다면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서 그와 같은 일을 이루어야 할까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살펴봄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지나온 동안의 과정의 삶의 모습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성령의 지시하심에 따라 예루살렘에 가면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의 사역을 마지막 사역지가 될 것이며 환란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고 마지막에 그것은 결국 그 인생에 마지막 사역을 뜻하는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밀레도에서 그가 평생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변화를 받고 함께 동역하며 기쁨과 은혜를 나누었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하여 같이 회우하며 그 마음에 있었던 소회를 진술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그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수고하고 헌신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고백과 그리고 그는 아무런 후회가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해서 수고를 했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마지막 사역을 위해 주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 달려가기 위해 그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이와 같은 비장한 각오를 내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한 사도의 마음의 눈물어린 비장함속에 자신 있고 당당한 그리고 감격스러운 고백을 있게 한 삶의 모습을 우리는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자신 있는 때가 어느 때인가? 우리 인생들에 있어서 가장 자신 있을 때에는 무엇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하다고 느낄 때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하다는 자신의 삶의 정당성과 정체성의 부여야말로 우리 인생을 가장 자신 있고 당당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열심과 열정을 다하고 있을 때 우리는 후회 없는 삶의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현재 과정에 대하여 어떤 판단을 내리던 그것은 결국 최종적인 아름다운 결과를 이룰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입니다. 즉 정당한 일을 하고 있고 나는 그것을 최선을 다했고 지금 결과는 반드시 지금 눈에 보이고 있는 것처럼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결과는 최고의 아름다움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사람은 누구든지 당당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일이 하나님 앞에 정당한 일이었고 또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했으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최고의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실 것을 확신했기에 그는 담대했고 자신 있었고 두려움 없이 당당하되 그는 생명을 조금이라도 귀히 여기지 않을 만큼 즉 생사를 넘을 수 있을 만큼 그는 자신 있고 당당하게 그의 삶의 모든 매력을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내용을 생각해 봅니다.

첫 번째 우리가 우리 인생에 대하여 가장 자신 있고 당당할 수 있는 이유와 때는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하여 같이 은혜와 사랑과 교제를 나누고 그가 있었던 삶을 요약진술하며 이제 그들에게 격려하고 자신의 마음을 다시 다짐하는 이와 같은 장면들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대해 최선을 다해 후회 없는 여정을 보냈다는 것을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19절을 보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힘을 다하여 그에게 주어진 능력과 정성을 다하여 그는 이제까지 겸손한 가운데 눈물을 흘리면서 모든 간계를 겪으면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힘까지 다해서 그는 후회 없이 그의 삶에 아무런 미련 없이 그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과 여건과 환경 속에서 그 앞에 놓여 진 사람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겸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신이 내세울 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복음만을 내세웠으며 자기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이 없으면 어떻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겸손이 없으면 어떻게 사람과 만나 사귈 수 있으며 겸손히 없으면 어떻게 사람에게 기쁨을 제공하고 그 사람을 내 마음의 입장으로 같이 이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겸손해야만 우리는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며 우리는 사람과 사귈 수 있으며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내게 자랑할 것은 오직 복음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진심으로 그들을 위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주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많은 수고와 고통 속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만이 아시는 눈물입니다.

우리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한번 따라하십시다. ‘사람에게 동정 받지 말고 하나님께 동정 받읍시다’ ‘사람에게 불쌍히 여김 받지 말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읍시다’ 우리는 사람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을 필요가 없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동정 받지 않고 하나님께 동정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만이 우리에게 보실 수 있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우리의 눈물을 비춰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주님 앞에 우리의 눈물을 보여 주님의 자비의 긍휼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에게 동정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앞에만 보일 수 있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수고와 애씀과 각고의 고통 끝에 하나님 안에만 보일 수 있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에게 다 평가받으면 하나님 앞에 평가받을 것 뭐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다 위로 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만이 아는 위로를 받을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몰라주어 마음에 슬픔이 있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부분이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와 위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다 상 받으면 하나님 앞에 받을 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다 박수 받으면 하나님 앞에 다 박수 받을 것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늘 우리 동역자들에게 지도자는 항상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은 꾸미고 위장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떳떳하게 있다가 문 열고 문 닫는 순간 넘어져도 절대 사람 있는 곳에서는 넘어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런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가 사람에게 약하게 보이고 어디 가서 사람에게 동정 받고 그러면 안 됩니다. 어디 가서 당당하고 자신 있고 의연한 모습으로 살고 정 우리가 힘이 없을 때 문 닫고 그 안에서 주님만이 보시는 가운데 우리는 엎어져 주님의 위로와 은혜와 소망을 기대하는 강인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정말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간교한 시험을 받고 그 가운데에서도 그것을 참고 인내하며 주를 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리 훌륭한 지식과 문벌과 그리고 모든 논리와 설득력을 가지고 있어도 역시 그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고통이 있었고 참아야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참고 견디었기에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사를 이룬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 사람들에게 가르쳤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이라고 오늘 20절과 21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와 같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또 시험을 참고 견디며 결국 그것은 사람들이 가르친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복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으로 우리가 회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그는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사람에게 가르치되 우리가 주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최고의 유익인 것을 생각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바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서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눈물을 흘리며 가슴아파하며 시험을 참고 그는 겸손한 가운데 그 일을 다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 어떤 환란이 다가와도 심지어는 죽음이 다가와도 나는 두려울 것이 없고 후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게는 남긴 일이 없고 내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가운데서 모든 것을 다 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일 일을 모릅니다. 정말 내일 일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했으니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장례보고를 받았습니다. 제가 사진을 보고 좀 마음에 깜짝 놀랐어요. 왜냐하면 바로 제 기억에는 지난 주일인가 지지난 주일인가 뵈었거든요. 그 할아버지 한분이 키도 조그마하신 분이신데 나갈 때 꼭 손을 흔들고 가세요. 외국 정상이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면서 손을 흔드는 것처럼 꼭 손을 흔들고 가세요. 여러분 아마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조그마한 할아버지인데 늘 손을 흔들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참 씩씩하시다 건강하시다 생각했는데 오늘 장례 보고가 올라온 사진을 보니 그 할아버지셨습니다. ‘아니 얼마 전까지 봤는데, 지난주에도 본 것 같고 그 지난주에도 본 것 같은데 아니 벌써 이렇게 세상을 떠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에 정말 우리 인생이라는 게 하루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주일 저녁예배 때 뒤에서 저하고 악수를 했는데 나이도 저하고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신 분이 계셨습니다. 정말 모르겠더라고요. 아니 저녁에 나하고 악수를 했는데 급히 전화를 받고 보니까 월요일 날 아침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정말 우리 인생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 우리 오늘 얼굴 봤다고 내일 얼굴 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이시간이 우리에게 단 한번 지나가는 유일한 시간이에요. 우리에게 이 시간은 다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내 앞에 있는 사람도 다시 우리에게 언제 볼지 몰라요. 자 우리 한번 따라합니다. ‘있을 때 잘 합시다’ 자, 다시 한 번 ‘내 옆에 있을 때 잘합시다’ 시간 지나서 없어지면 결국 남은 것은 후회 밖에 없습니다. ‘내가 왜 그때 그렇게 못했을까? 내가 그때 그렇게 잘해주지 못했을까?’ 여러분 우리 인생은, 우리 시간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정말 우리 인생의 앞일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런 후회가 없는, 죽음을 앞두고도 후회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삶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나면 후회가 없습니다. 아니 나는 더 이상 잘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것이 최선이고 내가 후회 없이 했다면 주어진 결과에선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보다 할 일을 다 했다는 후련함과 부끄러움이 없는 감사와 자신감입니다. 내가 죽음을 앞두고도 감사하는 것은 내가 복음전파를 위하여 온전히 나를 드릴 수 있었기에 아무런 후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23절과 24절을 보면 내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어도 나는 내 목숨에 대하여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나는 담대하게 내 사명의 길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평가의 기준을 넘어섰습니다. 생과 사의 기준을 넘어섰습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일 가운데 주의 복음을 위하여 사는 것이 내 기쁨이고 그것이 나의 최선이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26절, 27절을 보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것은 내가 이제 복음을 전해야 될 것을 다 전했기 때문에 나는 너희에 대해서 이렇게 깨끗하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너희의 죄, 너희들 구원을 못 받아도 너희의 피에 대해서 나는 그렇게 책임이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할 복음을 모두 다 전했기 때문에 내 몫을 다 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의 열정이 있을 때 저는 24절을 보면서 마음에 감동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는 마치려 함에’ 저는 이 구절을 보면 깜짝 놀랍니다. 마치려 함에 사도 바울의 사역을 향한 개념은 완성의 개념이었습니다. 조금 내게 주어진 여건 가운데 조금한다라는 것이 아니라 마치려 함에 사도 바울은 완성의 개념이었습니다. 내게 할 일이 있는데 이걸 아주 완성해서 마치고 끝내버려야 되겠다는 이와 같은 개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는데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하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을 마치고 끝내 버려야 되겠다라는 이런 심정으로 그는 그의 삶을 다 쏟아 넣었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우리는 마치려고 하는 이와 같은 뜨거운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에게 뜨거운 열정이 우리들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모든 책임을 다하고 이제는 내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책임을 다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자신감과 담대함이 생기고 아무런 후회가 없이 담담한 심정으로 평가를 이기고 그 평가에서 연연하지 않고 우리는 기쁨으로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희 교회에도 의사 분들이 많으신데 수술하시는 분들도 저희 교회에 계십니다. 수술을 했어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과 모든 정성을 쏟아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럼 결과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면 기쁨으로 우리가 결과를 받아들여야지요. 결과가 좋아서 기쁘면 기쁜 것이고, 정말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되지 않았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고 실망하지 말고 그 다음 또 수술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겠다고 해서 ‘나는 하면 안돼’라고 생각하고 일을 그만 둔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할 기회도 없을 거예요.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정말 내가 가진 능력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내가 최선을 다했으면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삼고 또 다른 장으로 또 다음으로 또 다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우리 삶에는 이러한 열정과 책임감과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끝까지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책임, 사랑, 끝까지’ 우리는 언제든지 책임감 있는 성도가 되어야 되고 우리는 책임을 나에게 강조하지 다른 사람에게 강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끝까지에요. 저는 우리 교인들에 대해서 참 마음에 기쁜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참 자신이 있지요? 갑자기 달라졌어요? 제가 늘 자신 있으라고 말씀드렸지요. 자, 우리 교인들 자신이 있지요?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이 하나 있는데 무엇인지 가르쳐 드릴까요? 여러분들이 자신이 있어야 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여러분들은 뭐든지 하면 끝까지 하지 않습니까? 분당중앙교회의 특징은 끝까지이지요? 한번 따라해 봅시다. ‘끝까지’ 아직도 안 그런데요. 그런 사람은 오늘 가셔서 회개하고 금식을 해보세요. 우리 교인의 특징은 끝까지에요. 우리가 자신 있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우리는 끝까지에요. 지금은 좀 부족해도 우리는 끝까지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한번 시작하면 우리는 중도에 그만두는 것 없습니다. 하다가 흐지부지 그만 두는 것 없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마지막까지 마침표 찍고 끝내야 합니다. 대부분 그렇지 않지요. 학생 때도 책읽다보면 어떤 학생들은 앞부분 영어 참고서 보면 명사 대명사 수사 여기만 봅니다. 이 뒤페이지까지 전혀 안보고 이 앞만 창세기만 50번 읽은 사람도 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일 하는데 끝까지 할 수 있는 것이 이교회의 특징이잖아요. 우리 성도들의 특징이지요? 처음에 부족해도 괜찮아요. 끝까지 가다보면 대부분 거의 대부분이 다 떨어져 나가요. 거의 대부분이 다 떨어져 나가요. 끝에 나가는 것은 아주 소수 중에도 극소수에요. 그런데 우리는 결국 끝까지 갈 수 있거든요. 그러니 우리는 자신 있는 거지요. 끝까지 갈 수 있는 것을 누가하게 하시지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의 맡겨진 사명을 마치려고 함에 마치려고 한다 이 말이에요. 이만큼 하면 됐지가 아니에요. 우리는 과정은 완벽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과정은 완벽주의자가 되고 결과는 최선 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과정조차 대강해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정은 완벽하게 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결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했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꺼이 과감하게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엉뚱하게 결과에 대한 완벽주의자가 되면 어떻게 되지요. 이건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부인하는 게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평생 기쁠 수가 없어요. 우리는 과정에 완벽한 사람들이지 결과에 완벽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게 내 분복이고 내 기쁨이고 내 자랑이고 감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사명을 감당할 때 그것을 마치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는데까지 한다’가 아닙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입니다. 되면 되고 안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에 슬쩍 피해 들어가면 안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이 일을 해내고야 말겠습니다라는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께 그 일을 맡기는 것이 우리들의 일입니다. 우리는 수사적인 표현에 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진실에 능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사적인 표현에 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진실에 능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사적인 표현에 능한 것이 아니라 진실에 능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책임지기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책임지기를 자처해야하고 그 책임을 지는 그것을 마치려고 하는 일에 우리는 들어서야 합니다.

이제까지 수고하고 애쓰며 지나온 삶이 더 깊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드림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수많은 수고와 애씀을 이루었습니다. 이룬 성취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취해서 거기에 안주하고 싶어서 ‘아, 내가 이만큼 이루었으니 내가 편하게 있겠다’가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헌신의 세계를 향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지경을 향하여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한 믿음이면 돼. 내 믿음이 이정도 수준이면 돼.’ 이제 여기서 더 깊이 빠져들지 말고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마지막 순간까지 한 단계 한 단계 과감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룬 것이 나를 막지 않고 오히려 가게 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성취와 이룸이 우리로 하여금 과감한 헌신을 가로 막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영화의 면류관이 아니라 오히려 헌신을 가로막는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소유했습니까?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헌신의 길을 막게 하고 안주하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우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깨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히려 우리가 이룬 모든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헌신의 세계로 더 깊은 헌신의 세계로 우리가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늘 이제까지 이룬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더 깊은 은혜의 세계 헌신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헌신하고 잊어버리자 왜 헌신하고 잊어버려야 합니까? 또 다른 헌신의 세계로 나아가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한 헌신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헌신의 세계로 우리는 나아가야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후회 없이 죽음의 자리를 향해 갈 수 있으니 우리는 당당하고 감사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삶이야말로 감격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확고함을 스스로에게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그가 전한 복음이 결코 과장이나 거짓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거기에 가고 싶어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 물건을 제일 잘 팔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 만약에 물건을 파는 사람이 내가 돈이 없어서 이 물건을 못 사지, ‘내가 이 물건 팔아서 돈벌어서 얼른 이 물건 내가 사야 되겠다.’ 그런 사람이 잘 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진실이니까. 나는 정말 이 물건 갖고 싶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못사요. 내가 이 물건 팔아서 장사해서 빨리 이 물건 가져야지.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한테 물건을 권할 때도 결코 그냥 허수로 권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의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처음에는 능력과 기술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진실과 정직과 성실이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조금 지나면 사람은 정체성의 문제가 우리를 흔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정말 옳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나는 거기에 정말 내 삶을 걸었느냐? 조금 지나면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정직성에 대해서 우리가 마음에 확신이 안서면 기반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거짓으로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이게 정말 옳고 바르고 나도 그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거기서 힘이 나오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어쩔 수 없는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이 이끌림에 의하여 내 길을 가게 된다라는 자체입니다.

우리에게 천국에 소망과 헌신과 사역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면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고 싶어합니다. 여러분 새벽기도 나오는 성도들 또 청년들을 봅니다. 아마 새벽기도 나오기 위해서 저녁에 일찍 주무셔야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을 헤치고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망이 더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거야.’라는 소망이 있으니까 나오는 것 아닙니까? 오늘 예배 나올 때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쁨이 있지? 라고 생각을 하니까 우리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정말 성령의 이끌림에 의하여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은혜 가운데 자처함으로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헌신하는 봉사하는 각양의 직책의 봉사자들을 봅니다. 다시 태어나도 주님의 일을 하고 싶어하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봅니다. 우리는 사명을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쁨과 감사이기 때문에 그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생이 자신있고 당당한 사명을 가지고 자신있게 자신의 길을 가게 될 때 우리는 더 높은 차원 더 새로운 차원의 삶을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길은 결국 사명이 있어서 달려갈 때 사람들의 안쓰러움이나 평가의 차원을 넘어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삶을 구성하고 마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생사를 이미 넘어선 차원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생사의 문제가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성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처음에는 능력과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 승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출발동기가 옳은 사람이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이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전파에 대한 사명성에 대해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왜 이 복음을 전파하느냐? 나는 이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마음에 절박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정말 옳은 일이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고 이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 내 목숨을 드려도 괜찮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삶의 바른 판단근거를 가지고 결정했고 열정을 다해 수고했으면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주어져도 담담할 수 있습니다. 이게 내 분복이고 이것을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니엘은 그 친구들과 더불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왕의 진미가 우상에게 드린 재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는 그것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채소만을 먹고도 그 얼굴이 오히려 빛났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열정을 다해 내가 바른 판단 기준에서 내가 그 일을 하겠다 생각하면 그것이 비록 어렵고 힘든 일이어도 그것이 우리를 빛나게 합니다. 여러분 요새 그런 얘기하죠. 자리가 사람을 빛나게 하는 것 같아요? 사람이 자리를 빛나게 하는 것 같아요? 옛날에 그런 노래도 있었잖아요. ‘회전의자에 빙글빙글 도는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이지.’ 여러분 그런 노래 기억해요? 요새 절대 안 그래요. 앉으면 주인이 아니에요. 능력없는 사람이 앉으면 그 자리가 망가집니다. 시간 걸리지 않아 잠깐이면 다 망가집니다. 요새는 그렇지 않아요. 어떤 자리에 어떤 사람이 가도 그것을 감당할 만한 이상의 능력이 있으면 그 자리가 빛나게 됩니다. 옛날에는 자리가 사람을 빛나게 했는데 이제는 사람이 그 자리를 빛나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어떤 역할을 맡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맡은 역할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왜 나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중에서 한 달란트 주었나라고 항변하지만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맡은 바에 누가 얼마나 충성되이 그리고 아름답게 그 일을 이루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내 위치를 바꿔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 내가 내 위치를 빛나게 하여서 이 위치가 최고의 위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명을 가지고 어떤 경우에도 내게 주어진 것을 기쁨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명을 가지고 달려가니 그 어떤 환란이나 핍박이나 죽음의 위협도 그를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담대해지면 자신감이 생기면 그 삶은 전혀 다른 삶이 됩니다. 복음에 대한 사명이 생기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그것은 생사를 넘게 됩니다. 누가 먼저 고난을 면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먼저 고난의 영광을 받느냐로 바뀌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에서 봉사하는 분들 보니까 봉사를 오래 할 수밖에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냐 하면 교회에서 어려운 봉사를 하시는 분들입니다. 제가 이렇게 교회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을 보니까 어려운 봉사를 하시는 분이 거기서 빠져나오지를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려운 일을 그만 두면 누가 또 일을 해.’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일수록 그 일을 오래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좀 어렵지 않은 일을 하시면 ‘이것 또 다른 사람 할 사람 많겠지.’ 그렇더라고요.
우리 지난 여름에 의료선교단이 필리핀 선교 갔다가 첫날 총기 강도들이 들어와서 사람들한테 목에다 총기를 겨주고 물건도 다 뺏어가고 돈도 다 빼앗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관광할 사람은 관광하고 오고, 선교할 사람은 선교하고 와라. 선교하러 갔는데 그까짓 거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모두가 잘 따라주어서 선교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관광하러 간 것이 아니니까. 목사가 우리 성도들 괜히 위험한 몰아넣고 싶어서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갔다 와서 이제 같이 이야기도 하고 식사도 같이 했는데 제가 한사람 한사람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봤는데 내년에 안 가겠다하는 사람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차마 거기를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니까 어려움이 있어야 사람들이 헌신합니다. 그런데 가서 어려움 없이 편하게 지냈으면 ‘다음에 나 안가도 다른 사람이 갈 수 있을 거야. 괜찮아.’ 그런데 어려움이 있으면 ‘내가 안가면 어떻게 해. 내가 가야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없으면 절대 헌신하고 봉사할 수 없습니다. 오래 못합니다. 헌신과 봉사는 어려움이 있어야 그 어려움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벌써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힘든 사람은 쉽게 봉사하고 헌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어려우면 결코 그것을 그만두지 못합니다. 오히려 감격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봉사하고 헌신하는데 불평이 생긴다는 것은 여러분이 열심히 봉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면 감사할 것밖에 없고 일체 우리의 마음속에 기쁨과 내가 이 일을 끝까지 해야지 내가 아니면 어떻게 해, 끝까지 이 자리 비울 수 없지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사명을 감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이와 같은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사명은 결국 사람을 강하게 합니다. 사명은 기쁨으로 그 이일을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명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될 때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먼저 준비하고 어떤 일을 시작해서 준비하는 근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시작하면 쉽게 지쳐요. 그런데 주님을 위해서 진행하면 지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쳐야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주님이 하시니까요. 항상 사명을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사명은 사람을 강하게 합니다. 우리의 힘 이상을 발견하게 합니다. 여러분 제가 늘 말씀드리죠. 사명이 뭐죠?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데 내 눈에는 보여요.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그것이 눈에 안 보이는데 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늘 쉽게 설명 드리잖아요. 여기 통로에 쓰레기가 하나 있는데 종이가 하나 떨어졌어요. 다른 사람은 그냥 지나가는데 나는 그것 그냥 못 지나가겠어요. 나는 꼭 주워야 한다면 그 사람은 뭐죠? 종이 줍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일이든지 마찬가지에요. 이상하게 다른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고 어려운 아이들을 보면 나는 꼭 도와줘야 하고, 조지 뮬러는 고아를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3000명이나 고아를 양육하는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뭔가 눈에 보이는 것이 사명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죠. 먼저 보는 것이 사명이다.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이 사명이다. 자 따라서 합시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결국 보여야 일을 합니다. 내 눈에 보여야 합니다. 내 귀에 들려야 합니다. 사명과 헌신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눈뜨면 우리의 할일이 눈에 어른거려야 합니다. 자나 깨나 그 일이 눈앞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저는 집에서 가끔가다가 자다가 설교하는 일이 꽤 있는 것 같아요. 자다가 막 설교를 하는데 특별히 주일 저녁 같은 날 하루 종일 설교를 하다가 저녁에는 대부분 너무 피곤하잖아요. 너무 피곤해서 잠이 잘 안 오는데 그런데 좀 누워 있다보면 깜빡 잠드는데 막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집인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저뿐 아니라 누구든지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늘 몰두하고 있는 일이면 자다가 잠꼬대하다가도 그 일로 잠꼬대를 합니다. 목사는 뭐 잠꼬대하다가도 설교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우리가 사명이 있어 가슴이 설레이는 삶이 얼마나 우리들에게 기쁜 삶입니까? 늘 우리 가슴이 용솟음치잖아요.

세번째 결국 복음의 사명이 있어 달려가는 일은 성령에 이끌리어 가는 길이고 그것은 외적인 고난과 고통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입니다.
오늘 보면 ‘나는 이제 심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각 성에서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나 나에게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증거를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리고 그는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만 주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심령이 매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심령이 매임을 받았어요. 성령에 의해서 매임을 받았고 주님에 의해서 매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의 삶은 그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똑같은 병이 있어요, 깨끗이 씻었어요. 한 병에 참기름 담으면 무슨 병이 되죠? 참기름 병이 되요. 한 병에 사이다 담으면 사이다 병이 됩니다. 사이다 병 씻어내고 참기름 담으면 그것도 참기름 병이 되는 것입니다. ‘어? 사이다 병에 참기름 넣었네.’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어, 참기름 병이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용물이 뭐가 들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모든 신분이나 모든 상태나 외견이 다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사명의 사람이 되고 은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성령의 이끌림 받는 분들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되죠? 간단해요. 악령의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사단의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역사에 우리를 이끌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있는가! 아닌가를 어떻게 알죠? 내 마음에 평안이 있고 나로 인하여 다른 이들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는가? 이것으로 인해, 이 행동으로 인해, 이 마음으로 인해, 주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가? 주의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흥황 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백성에게 기쁨과 은혜가 전해지고 구원의 역사가 활발히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점점 느끼는 것은 내 마음에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소원을 버리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우리들에게 옳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자주 말씀드리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 뜻을 이루자가 아니라 내 뜻을 버리자’ 하는 것이 믿음의 길인 것 같습니다. 내 소원을 이루자가 아니고 내 소원을 버리고 주님의 소원을 이루자가 우리 믿음의 백성의 길 같습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순간 우리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인류에 문자가 있었던 때와 문자가 없었던 때가 시대로 구분이 되죠?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이 되잖아요. 문자가 있다는 것은 뭘 의미하고 있죠? 모든 기록내용들을 기록해서 전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라는 것은 전수되잖아요. 우리 삶에도 전혀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을 때 이끌림을 받지 못할 때는 전혀 다릅니다. 심령의 매임을 받아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주님께 매임 받은 것이 감사한 것이 삶이 되어야 합니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의 은혜에 매여 주님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인도 하시면 우리의 삶의 상황을 일제히 달라집니다.

자, 오늘도 따라서 합시다. 상황에 종속되지 않는 믿음. 우리는 상황에 종속되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 가야 합니다. 늘 우리는 너무 상황과 내게 주어진 현실 속에 너무 많이 매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상황에 종속되지 않는 믿음으로 우리는 그것을 능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예수님 곁에서 그렇게 큰 기적을 보고, 아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이와 같은 부활의 기적을 보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누구하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지고 비척여도 누구 하나 대신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길거리 가는 구레네 시몬이 강제로 붙잡혀 대신 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충만을 체험하고 난 후에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채워졌을 때, 성령이 채워지지 못했을 때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나는 나야’가 아니에요. 성령이 우리들에게 내주하고 있을 때 성령이 내주하고 있지 않을 때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나는 나야가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멀리서 쳐다보기만 하던 자들, 오히려 도망치던 자들이 이제는 주의 복음을 위해서 어디 가서든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고 그것으로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믿음의 선조로 남아 있습니다. 어떠한 환란과 핍박도 우리 앞에 거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면 그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의 생활이죠? 여러분 이제 조금 있으면 점점 더 추워지는 날이 오는데 여러분 겨울에 춥죠? 그런데 겨울에 춥지만 나가서 뛰어보세요. 추운가, 더운가? 안 뛰어 보셨나봐요. 한번 뛰어보세요. 오히려 땀이 뻘뻘 나게 됩니다. 상황이 우리들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우리는 그 상황을 능가하는 새로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상황이 우리를 묶지 못해요. 히브리서 11장 38절을 보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해요. 생과 사를 넘어섰는데 사명 속에 달려가는데 그의 삶에 그것이 기쁨인데 어떻게 이세상이 우리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사명이 있어 달려가다 보면 다른 것은 우리 눈에, 마음에 보이지 않고 사명을 향한 열정과 기쁨만 다가오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 삶을 움직입니다.
저는 늘 아침에 일어나면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 오늘도 주님의 지시하심이 눈에 보이게 하시고, 주님의 지시하심이 귀에 들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지심하심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야 합니다. 들리는데 어떻게 안 합니까? 보이는데 어떻게 안 해요? 우리의 생명조차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여겨지는 삶을 투입할 헌신처의 삶의 길을 찾아가면 그는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호흡만 한다고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가 호흡만 한다고 생명이 아니라 우리는 살아 역사하는 움직이는 동적인 능력과 무엇인가를 이루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새 역사를 일으키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 핍박하던 사람이었어요.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전하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삶의 성향, 기질, 의지를 바꾸십니다.
우리 학생들을 위해서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인간을 만드시고 창조하셨으니까 없는 상태에서 인간을 나게 하셨는데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의지력을 새롭게 만들어 주시고, 그의 마음속에 새로운 뜨거운 열정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그의 기질과 성품을 바꿔주시고 그의 마음에 기호와 그리고 모든 삶의 방향을 바꿔주십시오. 인생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지혜를 조성하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성품을 갈아 새롭게 만들어 주옵소서. 상황을 변케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는 새로운 역사를 만드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모든 사람이 예수 믿게 하고 싶게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어디서 오겠습니까?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함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우리 삶의 이제까지 그림을 버릴 수 없다면 그 위에 덧칠해서 우리의 과거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두려워하던 사람입니다. ‘내가 어떻게, 나는 아이인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제단의 화저로 그의 입술을 지지시고 그에게 성결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용하십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바뀌어졌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바알의 신당을 부수는 여룹바알이 되었습니다. 그는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의 새로운 작품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새로운 작품으로 하나님의 작품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제는 우리는 새로운 삶의 사명의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것입니까? 바른 방향, 열정을 다하는 최선의 삶,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삶, 그리고 사명에 이끌려가는 길에 들어선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오늘도 사명의 길에 들어서서 정말 가슴 벅차게 달려가도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희열인 이와 같은 은총이 함께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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