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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의 여정 (출 3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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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의 긴 여정에 관한 내용입니다. 400년 동안 애굽의 통치하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해방되는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지 않으려고 온갖 방법으로 탄압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극적으로 탈출하게 된 그 기쁨과 희열은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개인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오랫동안 한 가지 일의 목적을 위해 준비해 오다가 그 일이 성공적으로 성취되었을 때도 동일한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머나먼 여정을 계속하는 동안, 처음 해방되었을 때의 그 감격과 기쁨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긴 여정 중에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들로 인해 그 감격과 기쁨은 불평과 불만으로 근심과 걱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백성에게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미래에 아무런 전망이 보이지 않고 살아갈 길이 막연하게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옛 생활이 더욱 그리워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노예생활을 하였지만, 애굽에서 안정되게 살았던 것이 더욱 좋게 느껴졌습니다. 그때에 비록 노예 신분으로 종살이하는 신세였지만, 먹고 살아가는 생활이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옛 생활에 대한 향수가 더욱 절실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백성들은 현재 당하고 있는 긴 여정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인권이니 자유니 해방이니 하는 추상적인 꿈과 같은 미래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본래적 생활에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 한 것에서 오는 불안과 불평이, 나아가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하나님에 대한 저주와 불신앙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타내는 불만과 불평은 마침내 그들을 인도했던 모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때 마다 모세는 백성에게 가나안 복지라는 새로운 꿈과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렇지만 백성에게는 꿈과 비전도 중요하지만, 현실로 나타난 실존적 문제가 더욱 중요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사이에서 엄청난 고뇌를 하고 있었습니다. 백성이 광야에서 갈 길을 몰라 방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비추어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셨으며, 저녁에는 고기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과 이슬을 내려 만나를 먹게 했습니다. 백성이 필요한 것을 요구할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그들의 갈 길을 인도하며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셨지만, 그들의 불평과 불만은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우리의 개인의 생활도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동안 경험했던 긴 여정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며 새로운 것으로 채워주시지만, 항상 불평과 불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삶의 여정 속에 하나님의 역사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것은 그 순간에는 좋은 것 같지만, 그 순간이 지나게 되면, 또 다른 불평과 불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 불만에 시달린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가 담판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이 백성을 탈출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며 그의 해답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해답과 축복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우리의 긴 여정과 순례에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과 자유를 찾아 최초의 중요한 길을 내 내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새로운 길이 시작되었지만, 그들의 여정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만은 자신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백성과 함께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했습니다.

  본문 15절에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의 질문은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면, 이러한 엄청난 민족의 역사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은 기약이 없을뿐더러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세의 질문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의 말씀은 라틴어로“Ne educas nos”,  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it is educare”로 곧 “우리를 이끌어 내다”, “우리를 인도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educare”는 부덕하고 사악한 곳에서 이끌어 내는 교육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부덕하고 죄악이 많은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려는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죄악이 가득한 곳에서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며 교육하기 위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며 새로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광야에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교육으로 일관하여 왔습니다. 

  성경에 등장한 인물 중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음악가요, 위대한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의 실제 생활을 보면 그렇게 불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그를 해치려는 사람,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그의 장인인 사울로 부터 살해의 위협을 받으며 쫓기며 살았습니다. 사울이 자신의 딸을 맡긴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는 이유는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 상 18장에 7절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 모든 성에서 여인들이 나와서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히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말을 했을 때 부터였습니다. 사울은 그 후로부터 다윗을 시기하며 질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시기와 질투에는 사위도 친척도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울이 자객을 시켜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그는 미친 척 변장하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사울을 두 번이나 살해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를 죽이지 않고 용서한 다윗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그의 아들 압살놈으로 부터도 살해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왕위를 위협하는 아들로부터 살해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죽을 위협을 수없이 받고 살아 왔지만, 그것을 불행과 원망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드렸습니다. 다윗은 오히려 자신의 생의 불행을 시와 찬미로 노래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서 그것을 극복할 힘을 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항상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불행을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로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 간에 현재에 머물고 있는 이곳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현재 머물고 있는 이곳은 온갖 유혹과 시험으로 우리를 잡아 두려고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현재의 처지를 항상 만족하며 머물러 있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과 매력은 항상 우리를 노예생활로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에서 그리워했던 노예생활과도 같습니다. 현재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현재의 삶이 타락하고 죄악이 가득한 곳인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곳으로부터 이끌어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시려고 합니다. 새로운 곳은 처음에는 힘이 들고 험난한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곳으로부터 이끌어내어 약속의 땅 새로운 미래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교육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교육으로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현재의 이곳으로부터 빠져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옛 것을 고집하면서 옛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은 곧 실패와 파멸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현재 머물러 있는 곳에서 벗어나는 것은 곧 새로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새로운 길로 새로운 것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여정 중에 입은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여정 중에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당하고 있는 고통과 고난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16절에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는 라틴어로 ambulaveris, 앰브란스를 의미합니다. 앰브란스는 위급할 때 환자들을 실어 나르는 구급차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위급한 일을 당할 때마다 앰브란스를 보내어 치료하시는 의사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과 유신의 상처를 입을 때마다 우리를 앰브란스를 보내어 안전한 곳으로 이끌며 치유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판단에 따라 우리에게 오셔서 돌보시며, 잘못된 것을 경고하시기도하고, 격려하시며 우리에게 새 길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욥은 그 당시 가장 유복하고 부유한 사람으로, 무엇보다, 가장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귀를 통해 그를 시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열 자녀들과 그의 모든 소유와 재산을 빼앗아 갔습니다. 심지어 그의 몸에 악취가 나는 욕창에 걸려 잿더미 위에 몸을 비비면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와서 조롱하기도 했으며 그의 아내마저 그를 저주하며 하나님을 떠나 마귀에게 승복할 것을 강권했습니다. 욥에게는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상처만 남게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으로 하나님대한 믿음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자신의 삶을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욥기 10장 18절에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심은 어찜이니이까”라고 탄식하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포기하거나 떠나지 않고 그러한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 없이 끝까지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고난과 고통 중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한 욥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의 상처를 회복시켜주셨으며 새로운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삶의 여정 중에 상처를 입고 있은 사람을 치료하시는 모든 사람의 의사가 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의사가 되시는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모든 생명체에게도 치료의 능력과 의사의 기능까지 주셨습니다. 젖먹이 아기는 어머니의 의사가 됩니다. 갖난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 어머니의 병을 유발하는 나쁜 것을 빨아 드립니다. 갖난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빨아야 어머니의 통증이 치료됩니다. 반대로 갖난 아기가 어머니의 모유를 먹어야 건강하고 튼튼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어머니와 어린 아기와의 관계는 상호 치유의 관계로 상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식물도 사람의 병을 고치는 약초로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육신의 병을 고치시는 의사가 되실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며 영적인 병을 고치시는 양약이 되십니다. 잠언 3장 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골수로 윤택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4세기경에 이탈리아 북부 투르지방에 마틴이라는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 이교도였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하루는 마을 어귀에서 헐벗고 병든 거지를 만났습니다. 거지에게 줄 돈은 없었지만, 자신이 입고 있던 군용 외투를 벗어 절반으로 잘라서 한 쪽을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 후에 마틴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그 반쪽 외투를 입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곧 작은 자에게  베푼 것이 곧 나에게 베푼 것“이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 후에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지면서 마틴의 나머지 반쪽 외투 자락을 조그마한 교회에 걸쳐 놓았습니다. 라틴어로 천이나 외투 자락을 카펠라(capella)라고 하는데, 교회에 걸쳐 놓은 반쪽 외투를 의미하는 카펠라에서 채플(chapel)이라는 단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채플은 "작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마틴의 작은 헌신이 "작은 교회"를 만들게 되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고 영적으로 병든 자들을 치유하는 참된 교회의 역할과 영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여정에 함께 동행 하시고, 우리의 상처와 아픈 곳을 치료해 주십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새로운 미지의 곳을 향하여 떠날 때마다, 입은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여정 중에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질문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17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동행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의 백성을 이곳까지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그 약속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영원히 남아 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출발한 출애굽의 사건은 오늘날 우리가 매 순간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시작하는 삶의 여정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는 또 다른 난간과 어려움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았던 3천5백 년 전과 전혀 다른 삶의 정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때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었던 육신적 생활의 어려움이 문제가 되었지만, 지금은 영적생활의 빈곤과 결핍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죄의 길로 빠져가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의 영적세계를 파괴하는 엄청난 우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가정과 정신세계를 지배고 있는 퇴폐적 영상물과 영적 전쟁을 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대사회의 죄악과 부도덕한 퇴폐문화에서 새로운 출애굽을 시작해야 할 영적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곧 이 시대를 승리하며 극복할 영적 훈련이 곧 우리가 탈출해야 할 새로운 출애굽의 시작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구별될 수 있습니다. 성도로서 구별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의 여정은 서로 각각 다릅니다. 살아가는 삶의 형태와 배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삶의 여정을 하나님께 의존할 때,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향하여 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 시대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했다하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말씀대로 구별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구별되는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입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풍족하고 영광으로 존재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특별한 여정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 자 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마다 험난한 현대사회에서 생명의 길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이 시대의 죄악과 퇴폐문화로부터 이끌어 내어 미래의 약속의 땅으로 지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네가 바라고 요청하는 모든 것을 행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그의 은총을 입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위급할 때 우리를 치료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여정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숙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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