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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눅 2: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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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영적코드-기다림

누군가가 인생을‘기다림의 삶’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인생의 여러 기다림 중에서도 참 기쁨과 행복,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기대는 단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기다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끝이 안 보이는 기다림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절망을 지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동일하게 기다림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림을 통하여 질그릇을 금 그릇 되게 하십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잘 기다리게 하는 힘이며 뿌리 깊은 영성이란 기다림의 영성입니다. 이러므로 인생의 실패는 기다림의 실패이며, 신앙실패의 원인 중에 하나는 조급함에 있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당장 이루라' 재촉하며 충동하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리라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이 기다렸던 분은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까지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약속하심을 받고 결국 탄생하신 메시야 아기 예수를 만나 뵙게 됩니다.

이 시므온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일생동안 의롭고 경건하게 지내며 그리스도를 기다렸을까요? 그것은 시므온이 살던 세상이 어두움의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세상은 개인적인 윤리, 사회적인 윤리가 다 파괴되어지고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어두운 세상이었습니다. 종과 여자들의 인권은 여지없이 무시되었고, 기형아와 비록 멀쩡한 아이라도 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기는 죽이는 것이 용납이 되었습니다. 이교도의 우상숭배가 만연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경건하다고 스스로 자처하는 유대인들도 무거운 형식적 율법주의에 속박되어 있었고, 예언자들의 소리는 그친지 오래되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로마에 식민지 된 상태에서 유대 백성은 로마의 압박과 수탈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또 로마에 빌붙어 유대를 다스리던 헤롯 왕가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했으며 백성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거둬들여 온갖 사치와 향락 속에서 지냈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세상 속에서 시므온은 그리스도가 오셔야만 이 어두운 세상이 밝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두운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되실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다림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탄생한 그리스도를 만나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두운 세상에 어둠을 밝히실 빛으로, 온 인류의 위대한 희망으로 오십니다. 세상의 어두움을 밝게 비추이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어떠합니까? 시므온이 살던 시대보다 훨씬 물질문명이 발달했지만 죄로 인한 세상의 어두움은 더 심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시대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멀리 여행하고, 더 신속하게 의사를 전달하고, 더 높이 건물을 지으며, 더 많은 문화의 혜택과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어두움은 초나 전기가 부족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어두움은 정신적, 영적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삶의 여러 분야에 짙은 어두움이 전혀 걷히지 않고 있습니다.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 성으로 인한 차별, 출신지로 인한 차별이 여전하며, 무자비한 폭력과 지능적인 범죄가 계속 증가일로에 있습니다. 

이 시대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 시대의 어둠 속에서 우리가 기다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치 이천년 전에 시므온이 시대의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린 것같이 우리도 예수를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떠나간 임이 올지 안 올지 몰라서 불안과 탄식으로 범벅이 된 절망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시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오시는 분에 대한, 오셔서 어두움을 비추시는 빛이 되시며, 어두움을 깨치시고, 새벽을 여시는 분에 대한 기대와 감격에 가득 찬 희망의 기다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기다림도 암울한 현실 앞에 불안해하고 있는 인류에 참 소망을 주실 것에 대한 간절한 기대로 가득 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이 시대의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우리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이 시대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어두움에서 구하실 유일한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이 시대가 간절히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간절한 기다림을 볼 수 없습니다.

대강절 기간에 그리스도의 오심 즉 성탄을 간절히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탄생은 보통 사람들의 출생과 구별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자연적이고 단순한 출생의 사건만이 아니라 특별한 "오심", "강림"의 사건, 즉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그분은 저절로 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오신 목적을 알려주는 칭호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오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주시고 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즉 기름부음을 받은 분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바로 죄 가운데 있는 인간들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전적으로 인간의 구원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며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는 평화가 됩니다. 그 분은 오셔서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분은 오셔서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분은 죄의 어둠, 실패의 어둠, 좌절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에게 빛으로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욱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분은 혼돈과 무질서의 세상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가 오신 것은 세상 모든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 바로 이러한 분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과 벅찬 감격 속에서 성탄을 맞았습니까? 진정한 성탄 준비는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없으면 화려한 성탄 장식이나 행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간절한 기다림 속에서 이 대강절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시므온처럼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감격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탄절을 보내면서도 그리스도를 만나는 벅찬 감격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간절히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오신 사건이 정말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실감하지 못합니다. 시므온은 평생 동안 간절하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렸고, 결국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감격에 벅차 하나님께 찬송했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 시므온처럼 우리 개인의 소망이시며, 인류의 희망이시고 구원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기도하며 대강절의 남은 기간을 보냄으로써 벅찬 감격 속에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최고봉은 기다림

신앙의 최고봉은 기다림이며 연단 중에 마지막 연단도 기다림입니다. 인생의 성패도 기다림에 따라 좌우됩니다. 인생은 출발부터 기다림으로 출발합니다. 산모가 새 생명을 잉태하여 열 달을 기다림으로 채워야 출산의 기쁨을 맛 볼 수 있습니다. 만일에 새 생명이 열 달의 기다림을 다 채우지 못하게 되면 조산하게 되고, 조산하게 되면 미숙아로 분류되어 인큐베이터 안에서 남은 기다림을 채워야 합니다. 이처럼 기다림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축복도, 응답도, 성취도 기쁨도 없습니다. 찬란한 새벽도 길고 긴 밤중을 기다려야 찾아오고, 새파란 봄도 매서운 겨울을 기다려야 우리 곁에 찾아옵니다. 뿐만 아니라 풍성한 가을의 수확도 지루한 장마와 태풍을 기다려야 살포시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세상살이가 기다림의 연속인 듯합니다. 이러므로 기다림을 아는 자가 인생을 알고 하나님을 닮은 자입니다. 세상에는 하루아침에 성취되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건축 시에도 기다리지 못하여 시공을 급하게 서두르게 되면 그 건물은 부실공사 되어 나중에는 붕괴위기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인생과 신앙의 건축도 마찬가지 입니다. 충분히 그리고 마땅한 기다림을 견뎌내지 못하면 설익은 밥과 같고 떫은 감과 같게 됩니다.

결혼이 급하십니까? 성공이 급하십니까? 다이어트가 급하십니까? 신앙의 성장이 급하십니까? 기도 응답이 급하십니까? 교회 부흥이 급하십니까? 내 집 장만이 급하십니까? 그래도, 돌아가야 합니다. 결코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고, 견디고, 꾹~ 참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기다림 없이 거저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밥을 지을 때도 30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1분에 한 번씩 솥뚜껑을 열어 본다면 그 밥은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입니다. 과속이 당장은 빠른 듯 보이나 결국은 사고로 이어지게 되고, 과식이 금방 포만감을 느끼나 곧, 배탈을 가져오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속도에 예민해 있고, 빠른 속도에 익숙하여 삽니다. 이제는 고속이 아니라 초고속이며, 정보가 아니라 첩보시대입니다.

21세기는 '속도전쟁의 승리자가 진정한 강자'라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속도전쟁에 덩달아 춤을 춥니다. 그래서 기다림과 더딤에 어색해 하며 못 견뎌 합니다. 빨리, 하루아침에 성자가 되기를 바라며 빨리 기도응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빠른 교회부흥을 원하며, 빨리 내 뜻대로 주변사람들과 상황들이 변하기를 조급해 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의 불평과 마르지 않는 목마름은, 속도에 대한 하나님과의 충돌현상입니다. 우리는 급한데, 하나님은 느긋하시다 못해 꿈쩍도 안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장 눈에 보여야 하는데, 하나님은 10년, 20년. 숨어 계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아픔과 맥 빠짐과 무너짐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기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부족과 미숙을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의 덜됨과 철없음을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향하신 기다림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10년, 20년을 끈질긴 사랑으로 기다려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지체들을 향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하심에 대하여 한 달을 길다 합니다. 1년 앞에 쉽게 포기하고 절망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하여 기다림의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부부, 자녀, 친구, 동료, 교우, 이웃에 대하여 기다림에 너무 인색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로 인하여 늘 마음이 눌려 있고 상해 있습니다. '왜? 저 모양인가...' '왜? 저렇게도 안 변할까...' '왜? 아직도 그 수준밖에 안되나....' 이런 넉두리와 한숨 속에는 내 자신에 대한 교만과 다른 지체들에 대한 조급함과 경시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의 마음도 이러하실 터인데...'왜 그렇게 믿음이 없냐?' '왜 그렇게 성화되지 못하냐?' '왜 그렇게 아직도 그대로냐?'고.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도 극심한 조급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당장 마실 물을 달라 하고 고기와 먹을 것을 달라합니다. 안주면 돌아간다 합니다. 이것이 우리 내면의 일그러진 실존형상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당장 응답하시라 보챕니다. 하나님의 때를 앞당기라 떼를 씁니다. 왜 이렇게도 더디냐고 따집니다. 그런데 조급함의 이유는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며, 우리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리고, 야곱이 21년을 기다리고, 모세가 80년을 기다리고, 요셉이 13년을 기다렸듯이, 가족에 대하여 남편에 대하여 아내에 대하여, 자녀들에 대하여, 포기하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기다리되 투덜거리지 말고 잠잠히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기다려주지 않으시고 당장 포기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람은 몽둥이와 잔소리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기다려 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변화속도 만큼 남도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기다리게 하실까요? 그 이유는 기다림을 통하여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깨뜨리시기 위함입니다. 기다림처럼 우리를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깨뜨릴 방법은 없습니다.

그 기다림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교만은 부서지고, 자아는 죽고, 속사람의 찌꺼기는 걸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자신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것은 나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치명타를 아십니다.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빨리 깨어지고 쉽게 항복하는지를 아시기에 하나님은 그 부분을 건드리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다림과 하나님의 기다리심

우리의 기다림과 하나님의 기다리심 중에 어느 쪽이 더 힘들까요.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주님이 계시고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준비케 하시는 놀라운 손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배려가 있습니다. 기다림의 끝은 나의 깨어짐으로 앞당겨 질수 있습니다. '기다리라' 하심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섭리이며, 나를 나 되게 하시는 기막힌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냥 막연히 기다리시면 안 됩니다. 기도하며 은혜 받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 마침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실수 있습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 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 애가 3;25-26)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 32 : 6) 주께서 우리 자신과의 교제를 원하시고, 또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사실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명상의 시간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응접실에 주님을 홀로 기다리게 하지 마시고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주님과 함께할 시간을 찾으십시오. 주님과의 교제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준비하며 기다리자

성탄이 우리에게 축복의  날이고 또 그날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하여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우리가 그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입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준비하여 맞이할 때 우리 가슴에 가득한 기쁨과 축복을 누리지만 기다림 없이 의미 없이 맞이한다면 성탄으로 베푸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행사는 조용하고 검소하게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기다림으로 들떠야 합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4 주 전부터 대림절을 지킵니다. 대림절이라는 말은 기다리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다가오는 절기라는 말이 아니라 기다려야 다가오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기다리는 사람이 맞이하는 절기입니다.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그냥 기다리기만 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맞은 사람은 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고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하여 기다렸습니다. (마태 2장) 안나와 시므온은 사모하며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누가2:25-40).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준비 없이 일을 당한 사람입니다. 중요한 일이 있는데 준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 없이 맞을 때 성탄이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인 것처럼 주님의  재림 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준비하는 신자가 됩시다. 이번 성탄은 준비하여 맞이합시다. 깨끗하고 넓고 넉넉한 마음을 준비하고 주님을 맞읍시다. 주님은 너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더러운 마음에는 오실 수 없으시고 주님은 너무 크신 분이기에 좁은 마음에 오실 수 없고 주님은 사랑이시기에 미움이 있는 곳에는 오시지 못합니다. 비록 마굿간처럼 낮은 마음일 지라도 넓고 깨끗하고 넉넉한 마음에 오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공간을 넓히고 단장하고 맞이합시다. 그러면  성탄이 참으로 큰 축복이 절기가 되어 성탄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끝 날까지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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