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마 22:1-14)

  • 잡초 잡초
  • 358
  • 0

첨부 1


목회를 하면서 교우들의 가정을 심방하게 됩니다.  점심이나, 저녁 때가 되어 음식을 대접하실 때에는 주로 매식하게 되지만, 때로는 집에서 준비하여 대접하는 교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시는 분들이 예상하였던 사람보다 많이 가는 것도 실례가 되고, 미안한 일이지만, 예상하였던 인원보다 적게 가게 되었을 때에도 사실 미안한 마음이 들게 됩니다.    10 사람 정도 모시고 간다고 약속하였는데, 아무리 불러모아도 5명 정도만이 갈 때는 민망한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일로 약속하였다고 하면 할 수 있는 대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어야 좋습니다.  때로 음식이 너무 많이 남아도 문제고 음식이 모자라도 주인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배경에는 당신을 어떻게 하든지 잡아죽이려는 유대교 교권자들의 음모가 있었습니다.  유대 교권자들, 유대인의 대제사장을 비롯한 많은 제사장들,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산헤드린의 의원인 백성의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마21:45-46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을 쫓아내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엎으셨을 때에 다음 날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에게 유대의 교권자들이 찾아왔습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말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라고 달려들었습니다.  이 때에 우리 주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 중에 오늘의 비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더욱 확실하게 알아듣도록 오늘의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비유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무슨 권한으로 성전을 청결하게 하였으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았느냐 따지고 묻는 물음에 비유를 말씀하시므로 간접적으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비유란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으라고 하신 말씀이요, 불신자들에게는 숨기시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왕에게 비길 수 있습니다.  여기 내용을 보면 하늘나라는 어떤 임금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는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 잔치와 같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 초점은 혼인잔치를 베풀고 초대하고 있는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왕은 자기 아들이 장성하므로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식을 올리고 국가의 내로라 하는 사람들을 초청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아들이라면 다음에 아버지를 이어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요 , 이제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고 신부를 맞이한다는 것은 한 나라의 왕이요, 아버지로서 가장 기쁘고 복된 날이 아닐 수 없고 또한 온 국민들이 함께 축하할 일이었습니다.  왕은 아들의 혼사만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모든 일을 주관하는데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나, 초청할 사람들을 선정하는 일에 왕이 직접 나서고 있습니다. 

유대나라의 혼인 잔치는 대개 한 주간 동안 계속되었고, 며칠 더 길게 가지는 경우도 흔하였습니다.  한 가정에 혼인이 있으면 온 마을이 떠들썩하게 축제로 보내었습니다.  여기서 혼인잔치를 배설하고 초청하는 왕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으며,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사역, 곧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왕이 아들을 위하여 베푸는 혼인 잔치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혼인잔치로 비유하는 것은 생소한 일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표현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아내로 맞이하는 남편과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사야54:5에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말씀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의 신랑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왕은 혼인잔치가 다가오기에 일국의 왕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음식을 차리는데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미리 초청장을 보냈던 사람들, 혼인식에 참석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에게 다시금 혼인날짜를 알려주고 시간도 알려주고 꼭 참석하시라고 확인시켜드리려고 왕은 종들을 보내었습니다.  정중하게 모셔오려고 배려한 것입니다.  초대한 사람들을 모셔오려고 하였는데, 그들이 왕이 보낸 종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올 생각도 아니하였습니다. 

왕이 초대하였는데 오지 않는 것을 보면 참으로 겁도 없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강심장입니다.  그래도 왕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음식을 다 차리고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잔치에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붙잡아서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사실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인데, 세상 일과 먹고사는 일에 몰두하고 더 많은 쾌락과 안락을 얻느라고 너무나 바빴습니다.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이런 사람은 오로지 자기 소유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39:6에 보면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또 한 사람들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돈 버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영적인 초청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습니다. 

예전에는 교회에 가는 것도 재미있고, 배울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있어서는 종교를 대체할만한 사회 프로그램들이 많습니다.  사회봉사하는 것도 의미도 있는 것 같고, 보람도 있습니다.  교회에 가는 것보다 흥미를 느끼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골프교도 있고, 축구교도 있고, 영화교도 있고, 대체종교들이 많아졌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왕의 아들이 혼인하는데, 그런 특별한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마다하고 자기 볼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 왕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왕과 싸워보자는 이야기가 다름없습니다.  왕을 왕으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말이요, 왕의 초대 같은 것이 무슨 영광스럽고, 반드시 가야만 하는 일이냐고 하면서 일국의 왕을 동리 사람들보다도 못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왕의 초청을 거절한 이 사람들은 사실 3번이나 거듭되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처음에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종들이 와서 일러주었습니다.  다시 종들이 와서 산해진미로 준비하였으니 꼭 오시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세 번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수십 번도 더 많은 초대를 받은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왕은 진노하였습니다.  아예 군대를 풀었습니다. 자기의 근위대에 속한 군인들을 보내어 자기의 종들을 죽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초청을 거절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아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종들을 죽인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데,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도시는 불에 탔으며, 성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군대를 동원하여 살인자들을 죽이고 동리를 불사른 것은 마지막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말씀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독생 성자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으며, 이미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왕이 보내신 종들을 죽임으로 그 특권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청한 사람들은 이제 합당하지 않은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초청을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야기시킨 것은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초청에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요3:18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우리 주님을 거절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거절하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이 내려진 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8절의 말씀입니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초청은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종들을 보내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혼인잔치를 포기하지 않고 오늘 저와 여러분을 보내시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을 막론하고 네거리 로터리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네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이 발견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초청하여야 합니다.  더 이상 소수의 특권층에 머물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초청할 사람들을 선정하였지만, 이제는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누구나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부르시는 초청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자유인이나 종이나, 도덕적인 사람이든지, 비도덕적인 사람이든지 가리지를 않습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감히 왕의 초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생각지 않은 사람인데 부름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만이 선한 사람이고, 세리와 창녀들, 그리고 병자들, 가난한 자들은 땅의 사람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자세히 알고 보니 악한 자나 선한 자를 가리지 않고 부르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속 중심을 보시고 있습니다. 

딤전2:4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9:13에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기쁨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영혼의 전도는 하나님으로 잔치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가서 만나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초대에 응할 수 있고, 그들이 초대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만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우리 시대에 함께 살아가는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나가서 만나야만 됩니다.  네 거리로 나가야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사람을 만나야 초대장을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앉아서 나만 구원받은 것으로도 감사한 일이라고 나약한 마음,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면 한 사람도 초대될 없습니다.  세상에 왕의 초대장을 가지고 나간다면 신명나서 나갈 터인데, 하나님의 초대장을 가지고 나가는 것은 주저한다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전도자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 파견되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발이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고 하셨습니다.

종들은 네 거리로 나가서 만나는 대로 데려오는데, 악한 사람이든지, 선한 사람이든지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습니다. 혼인잔치 자리는 가득 채워졌습니다.  혼인 잔치 시간이 되었습니다. 손님들이 입장을 마치고 왕이 들어오면 잔치는 시작됩니다.  왕이 잔치하는 장소에 들어가 보았는데, 거기에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은 이 잔치에 참석해서는 아니 될 부적격한 사람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것처럼 마지막 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은 드러나고 걸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왕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아 그대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  우리 성경에는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고 했습니다. 

왕의 잔치에 들어가려면 다 화려하고 우아한 예복을 입을 수 있도록 격식을 갖추느라고  좋은 예복을 수없이 마련하여 들어가는 입구에 걸어놓고 누구나 입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급하게 들어왔는지, 너무나 억지로 들어왔는지, 왕의 잔치를 우습게 여겼는지, 하여튼 자기 옷을 입은 채로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에 옷을 잘 입고 다녀서 왕이 마련한 옷보다 자기 옷이 더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예복이란 그의 본래의 신분도 가려주고 출신 성분도 가려주고 학벌의 유무도 상관없이 지금 모두다 예복을 입었으면 새로운 귀족이고 선택받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왕 앞에 나아갈 때는 왕의 권위와 왕의 영광에 어울려야 되었고, 왕을 격하시키거나 왕의 체면에 손상을 주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왕이 준비한 예복을 입는 것으로 축복이고 구원이고 은혜입니다.  왜 예복을 입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논할 일이 아닙니다.  왕은 왕실의 격식에 맞도록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준비해놓았으니 입으면 되는 것이지, 왜 입어야 하느냐 묻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사61:10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의의 겉옷, 곧 예복을 입혀주셨습니다.  우리가 더러운 옷을 걸치고 하나님 앞에 서지 않도록 구원의 옷, 의의 예복을 입혀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우리는 흰옷을 입게 되어 있습니다.

계7:14에서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옷을 입었느냐 하는 것으로 그의 신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왕이 옷이 달랐습니다.  왕족이 입는 옷, 귀족이 입는 곳, 평민의 옷, 천민의 옷, 쌍것들이 입는 옷이 달랐습니다.  교복을 입었으면 학생이요, 법의를 입었으면 법관이요, 경찰의 옷, 군인의 옷, 죄수의 옷이 다릅니다. 

여기에 예복을 입지 아니한 한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예복을 입지 아니한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행위로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이거나 자고하고 자랑하고 자기의 것을 드러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가라지들이며, 이들은 염소들이며, 이들은 “주여, 주여”하는 사람이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왕은 사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환은 종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활동하는 사람으로 왕의 밑에서 왕의 명령을 받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의 심부름하는 천군 천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환을 시켜 “예복을 입지 아니한 자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가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올지는 잘 모르나, 네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데리고 올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내 마음에 품고 사랑하는 친구, 태신자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 악하거나 선한 모든 사람을 부르시고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주님 앞에 종들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10월 30일은 새생명축제입니다.  새생명들이 오신 가운데 가지는 축제여야 합니다.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이번에 한 생명을 구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홍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