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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마 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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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탄절이 가까이 오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방박사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큰 기쁨으로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면서 자신들이 가져온 보배 합을 열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는데 나는 주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참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가슴을 짓누르고 참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을 보면 저 멀리 페르시아로부터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여주신 별을 보고 예수님 앞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오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가 그들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막을 건너야 했습니다. 강을 건너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별을 보고 왔기 그들은 남이 잠자고 쉬어야 하는 언제나 밤에 이동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주님의 나라를 향해 나가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인생이라고 생각됩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오직 한 가지 소망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세상에 새롭게 태어난 왕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왕을 보고 그 위대한 왕에게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그들은 추위를 이기고, 앞이 보이지 않는 밤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왕을 만나야겠다는 뜨거운 소망으로 그들의 노정을 포기하지 않고 먼 길을 걸어 온 것입니다.  별을 보고 밤에 이동하면서 사막과 강과 추위와 여러 강도의 위험에 직면하면 그들은 왕을 보기 위해 멀고 먼 길을 걸어오는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우리도 주님이 계신 저 하늘나라를 향해 동방박사처럼 길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이 길을 가다보면 믿음의 사막도 만날 수 있고, 강의 위협도 받을 수 있고, 인생의 질병으로 고통을 받을 수도 있으며, 여러 인생의 강도와 도적들로 인해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라고 했습니다. 인생에는 누구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떨어지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예배에 감격이나 기쁨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광야에 머물러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런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 자리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가는 방향을 향해 일어나 계속해서 그 골짜기를 지나 걸어 나가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걸어야 골짜기를 벗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이 본 환상이 에스겔서 3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겔이 어느 골짜기에 이르렀더니 그곳에는 들어오는 입구에서부터 나가는 저 끝까지 해골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마른 해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뼈만 앙상하게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해골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살도 있었고, 힘줄도 있었고, 생기도 있었던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망의 골짜기에 들어서면서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 사망의 골짜기, 죽음의 골짜기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일어나서 걸어 나가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뼈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겔37:6) 할렐루야!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그 말씀대로 힘줄이 생겼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살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가죽이 생겼고, 말씀이 임하지 그들에게 생기가 들어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일어났고, 그 죽음의 골짜기를 벗어나기 위해 걸어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어둠의 골짜기를 지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경험했던 것처럼 죽음과 사망을 넘어서 마른 뼈들만이 존재하는 절망의 골짜기에 들어 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동방박사들처럼 별을 보고,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사막을 건너고, 강을 건너고 마침내 주님께서 계신 그 인생의 마구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보고 앞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걸어가야 광야를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사망의 골짜기를 다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가 인생의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가 된 것은 그 골짜기에서 주님과 함께 계속해서 걸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계속 걸어야 도착합니다. 계속 나가야 목표점에 이르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앉아 있으면 그곳이 사망의 골짜기가 되고, 음침의 골짜기가 되고, 에스겔 골짜기가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앉아 있는 동안 광야에서 우상을 만들었던 것처럼 그곳이 우상의 골짜기가 되는 것입니다. 걸어가야 합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믿음은 걷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walk with God 즉,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입니다.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또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절망과 죽음과 어둠과 눈물의 골짜기, 해골의 골짜기, 두려움의 골짜기를 빠져 나와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걸어야 합니다. 걸어야 합니다. 또 걸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렇게 걷고 또 걷고 걸어서 주님 앞에 왔습니다. 저는 2005년 한 해 동안 우리 예사랑 교회 성도들이 주님을 향해 계속해서 걷고 또 걷고 걸었다고 확신합니다. 이렇게 걷다보니 어느 덧 12월이 되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뻐하는 성탄절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진실로 승리한 사람만이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주님 앞에 나오면서 주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 다윗은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아름다운 궁궐에 거하지만,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신 법궤는 낡은 천막에 거하는 모습을 보며, 슬퍼했던 것처럼, 주님은 저 마구간에 계시고, 소외되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거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화려하고 아름답고, 강건하고 평안한 곳에서 주님께 경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에 붙들리게 되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동방박사는 주님을 위해 가장 기뻐하고 또 기뻐하면서 자신들이 가져온 보배 합을 열고 주님께 드릴 것을 준비했지만 나는 주님의 은혜로 한 해 동안 평안의 길을 왔으면서도 주님께 기쁨으로 열어 보여 드릴 보배 합이 있는가?라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이제 동방박사처럼 나의 보배 합을 열고 크게 기뻐하면서 최소한 세 가지의 예물은 드려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로 우리가 준비해서 드릴 예물이 바로 황금입니다. 황금은 단순히 물질을 드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은 신하가 임금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금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왕의 영광을 상징하며, 금은 그것을 선물로 받는 사람이 고귀한 사람이요 영광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동방박사가 황금을 예수님께 드린 것은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임금이요 자신의 왕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드린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드려야 할 황금은 물질이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며,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 분인지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분명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동방박사들은 예수님께 나올 때에 황금을 준비하여 그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고백하면서 주님 앞에 왔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주님 앞에서 믿음의 금을 준비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즉, 예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이며, 누구인지 분명하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고백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너무나도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6-19)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향해 바른 고백을 하면 복이 임합니다. 베드로는 한번 주님을 메시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온전히 고백하고,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고, 그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는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하면, 선지자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단순히 선생으로 고백하면 여러분은 선생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실로 나의 구세주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면 여러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며, 구원의 능력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지 바르게 고백해야 합니다. 동방박사는 황금을 준비하여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자신들의 왕이 되시며, 자신들의 주인이 됨을 고백한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도 믿음의 황금을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그분이 나의 능력이시며,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죄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동방박사들은 보배 합을 열고 유향을 주님께 선물로 드렸습니다. 유향은 향기 나는 기름입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제사를 드릴 때나, 혹은 소제라는 곡물의 제사를 드릴 때마다 어느 제사에서든지 유향을 섞어 드림으로 언제나 향기로운 냄새가 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특별이 이 유향은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에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거룩한 기름이었습니다. 구약의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들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6:15절에는 “그 소제의 고운 기름 가루 한 움큼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다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라고 했고, 레위기 6:21절에는 “그것을 기름으로 반죽하여 번철에 굽고 기름에 적시어다가 썰어서 소제로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2절에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의 향기가 되셔서 우리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제사에서 향기나 나기를 원하십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신약 시대는 우리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적인 제물입니다. 제물에는 반드시 유향이 뿌려지고 그 유향의 향기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기쁨의 유향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유향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과거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365일 아침마다 성막 안에 있는 향로의 향을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5:8절에는“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보았는데 믿음의 사람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이었습니다. 금 대접에서는 향이 가득하여 그 향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바로 성도들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365일 쉬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불이 꺼져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제사에 기도의 유향이 뿌려지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사가 결코 아닙니다.

동방박사는 유향을 준비하여 드렸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주님을 위해 향유 옥합을 깨어 주님이 계신 온 방을 향기로 채웠습니다. 기도의 향기가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성탄절에 우리는 주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기도의 유향을 준비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명의 향기를 준비하기를 진실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동방박사들이 준비하여 기뻐하며 드린 것은 몰약이었습니다. 사실 몰약은 왕의 탄생과는 어울리지 않는 선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몰약은 죽은 시체에서 나는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 바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는 몰약을 준비하여 기뻐하며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실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그분의 거룩하신 헌신과 희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의 사람으로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선물이 있다면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며 봉사하는 몰약이라는 선물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성도가 성도를 위해 그리고 주님을 위해 우리도 헌신할 수 있습니다. 봉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면서 주님만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사실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부인입니다. 자신이 죽은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6절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우리의 옛사람은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주님의 보혈로 사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주고 새로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몰약을 준비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은혜로 감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옛사람은 무덤에 묻어 버리고 주님의 보혈로 거듭난 예수의 피로 채워진 나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죽었습니다. 산 것은 나의 혈기가 아닙니다. 나의 옛 가문적인 전통도 아닙니다. 죄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옛 사람은 몰약에 발라져 묻혀 죽었고, 새롭게 우리는 예수의 피로 채워져 부활한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이 쓴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교회의 청년이 새로 등록을 했는데 그가 말하기를 “나는 박씨지만 실제로는 최씨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어머니가 과거에 박씨가 아닌 최씨와 우연히 잠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꼭 열 달 만에 자기가 나오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와 잠자리를 하고 딱 열 달 만에 아이가 나왔으니 최씨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자기 핏줄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마침 최씨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아들이 생겼으니 최씨는 박씨에게 찾아와 내 아들을 내 놓으라고 했고, 박씨는 자네 아들이 아니라 내 핏줄을 타고난 내 아들이라고 서로 싸운 것입니다. 결국, 최씨와 박씨 두 사람은 언성이 높여 싸우게 되었고, 동네 사람들이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아이는 청년이 될 때까지 최씨에게 가지 못하고, 박씨 밑에서 눈치 밥을 먹으며 자랐고, 동네에서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도 더러운 피를 받고 태어난 것에 대해 갈등을 했습니다. 마음에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최씨 피를 받았건 박씨 피를 받았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은 것이 내 죄를 씻기 위함이었음을 믿는 것이요, 그 예수가 흘리신 피로 나의 죄를 다 용서 받았음을 믿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가 우리를 위해 피 흘리셨다는 말은 우리의 이전의 육신에 속한 피를 몰아내고 예수님의 깨끗한 피로 바꾸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몸에 들어 온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과오와 허물을 다 씻어 주시고 새롭게 하셨습니다.”그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이 밝아지면서 “이전의 부모로부터 받은 피는 취소되고 생명의 새 피를 받았으니 기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제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옛 사람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몰약은 희생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도 동방박사가 주님께 희생과 죽음을 상징하는 몰약을 선물로 드린 것처럼 우리들도 희생과 죽음의 몰약 그리고 자기를 부정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몰약을 주님께 성탄 선물로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물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황금을 드리겠습니까? 아름다운 기도의 향기로 준비하여 유향을 드리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부정하며 예수님의 피로 변화된 희생의 사람, 봉사의 사람, 헌신의 사람인 내 자신을 주님께 드리겠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여러분은 주님께 무엇인가 드릴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동방박사처럼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용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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