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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본을 보입시다. (딤전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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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사님이 예배를 드리는데 안내를 하는 집사님이 황급히 와서 집에 불이 났으니 빨리 가보라고 했습니다. 급히 달려가 보니까 집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급히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이 집사님은 그 자리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집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에 집에 불이 났다고 하면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이 불을 꺼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눈을 떠서 보니까 집은 다 불타고 재만 남았다고 합니다. 

어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라는 갈대 섬으로 봄철에 야유회를 갔었습니다. 한참 노는데 주변에서 불이 났습니다. 봄철에 갈대밭에 불이 붙으니 어마어마하게 타는데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달려가서 불을 끄는데 한 친구가 갑자기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평소에 그 친구는 참 믿음이 좋았습니다. 친구들도 다 인정했습니다. 친구들은 가끔 색깔이 있는 구두도 신었지만 그 친구는 항상 검정 구두를 신고 검정양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색깔 있는 구두나 양복을 입으면 "신학생이 그게 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급한 순간에 그 친구는 불을 끄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친구들은 다 동원이 되어 불을 껐습니다. 불길이 다행이 잡혔습니다. 그때 다른 친구들은 기도한 친구를 향해 모두 "야! 그 친구 믿음 참 좋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믿음이 없이 불을 껐던 친구들은 다 목사가 되었는데, 혼자서 간절히 그렇게 기도했던 그 믿음 좋은 친구는 목사는커녕 나중에 이단에 빠져서 돌아다니다가 이제는 예수도 안 믿고 지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변론하는 것을 지켜본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선의의 질문에 신6:5과 레19:18을 각각 인용하여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해서 신앙의 영역과 윤리의 영역을 사랑 안에서 통괄했습니다. (막12:28-31)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되 사랑의 본을 보이는 달입니다.

  이웃 사랑의 본을 보입시다.

레위기에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19:18) 하셨고 야고보 사도는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 2:8)라 하여 이 말씀을 "최고한 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로마의 황제가 제정한 법은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황제가 제정한 법은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감히 이 세상에 그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최고한 법입니다. 지고의 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누구도 이 말씀을 어긋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이 율법사인 것을 아시고 그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더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그는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인정해 주시면서 "잘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렇게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합니다. 그러자 율법사가"그러면 내가 사랑해야 할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있는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옷도 벗겨졌습니다. 실컷 맞아서 인사불성이 된 채 길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도움을 주어야만 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우리 눈앞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그 사람의 외모가 어떠하든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그 사람이 우리가 사랑해야 하고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참 사랑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의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우리의 몸 돌보기를 저절로 터득합니다. 배고프면 먹입니다. 추우면 옷을 입힙니다. 병들면 약을 먹이기도 하고 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이와 같이 돌보듯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으면 그렇게 보살펴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25:40에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곧 예수님을 돕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13:2∼3에 보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돌보아줄 때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도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또한 롯도 그러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고난받으실 때가 가까운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요한은 증거했습니다.

예수의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나타났습니다. 제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예수는 친히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씻기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은 매우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발을 씻기우는 행위는 종이 상전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진정한 사랑과 겸손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위는 제자들과 예수와의 관계성을 상징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목욕한 자는 온몸이 깨끗하므로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우심이 그들의 죄 사함과 관련이 있음을 교훈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주와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제자들이 서로 발을 씻기게 하기 위한 본을 보이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서로가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겸손하게 사랑의 섬김에 대한 교훈을 행동으로써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의 낮아지심은 십자가의 고난당하심에서 그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기까지 낮아지심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희생하신 것처럼, 제자들이 겸손하게 서로를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며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하실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셔서 자신이 제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희생한 것처럼 예수께 보냄을 받는 제자들이 복음을 받아 그들의 제자가 되는 자들에게 그와 같이 사랑의 섬김을 보일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몇 달을 집에서 쉬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마음에 드는 회사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광고가 나왔습니다. 그는 이력서를 제출했습니다. 다행히 서류전형에서 합격을 했습니다. 그는 회사로부터 정해진 날 면접을 보러오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제 면접 보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침부터 잘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넉넉하게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서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달려가는 도중에 그는 웬 아주머니가 길가에 차를 세우고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펑크난 타이어를 갈아 끼우기 위해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조금 바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 대신에 자기가 펑크난 타이어를 갈아 끼워주었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그는 부랴부랴 회사로 갔지만 면접이 다 끝나버렸습니다. 그는 인사과를 찾아가서 사정을 했지만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풀이 죽은 채 뒤돌아 서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부터 회사로 출근하세요." 그는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웬 아주머니가 웃고 계신데 조금 전에 길가에서 자기가 도움을 주었던 그 아주머니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주머니가 바로 그 회사 사장님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도움을 주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셈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우리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최고한 법을 지켜 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사랑의 본을 보입시다.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은 (시 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 하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인생을 통해 줄곧  역사 하시면서 그를 구원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나의'라는 소유격을 붙임으로써 그 능력과 보호의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생애 동안 함께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 23:1)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하면서 자신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성도들은 비록 양과 같이 무력하더라도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성도들을 늘 지켜 보호하시는 분이기에 하나님만 의지하면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은 받은 자를 치면 죄가 된다고 하며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살려 줍니다.(삼상26:9)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은 피곤에 지쳐 동굴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이 순간 다윗은 사울을 살해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다윗의 부하 장군들은 사울을 죽이자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런 기회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사울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울을 죽이지 않으면 언제 다윗과 그 부하들이 사울의 칼에 죽음을 당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이 세운 통치자라 하여, 죽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비록 자신의 신변에 피해가 올망정, 결단코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부하 장군들에게 사울을 죽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도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모든 심판과 복수의 권한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기에 인간이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침해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분명히 인식하였고, 또한 인정하였습니다. 정녕 모든 복수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사랑과 선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몫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은 하나님의 사자의 책망을 받고 회개합니다.(삼하12:1-13)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행동했던 다윗에게 대언자인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다윗 앞에 선 나단은 한 비유를 들려주어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나단이 다윗 왕 앞에서  많은 양과 소를 가진 부자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가난한 이웃의 단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빼앗았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단이 말한 이야기는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의 은밀한 죄를 드러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단의 비유를 들은 다윗은 크게 노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며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한 마리 양을 빼앗은 부자는 가난한 자에게 4배나 갚아 주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나단의 비유를 들은 다윗은 그것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크게 진노하였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는 추상같은 목소리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살인과 간음을 범하였기 때문에 다윗의 집에서 칼이 영영히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단으로부터 하나님의 추상과 같은 책망과 징계를 들은 다윗은 그 즉시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

왕알 책망하는 나단의 요기도 대단하나 선지자의 책망을 하나님의 책망으로 받아들이는 다윗왕의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의 신앙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다윗의 회개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다윗을 사랑하시어서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그를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다윗은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이 허락 않으시자 준비를 합니다(삼하7: 대상22:)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법궤를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하나님은 그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모든 어려운 나날들을 보내고 평안히 왕궁에 거하던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왕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장막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고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순데 있어서야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성전 건축에 대한 다윗의 소망이 하나님의 계획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뜨거운 열심과 변함없는 신앙을 보시고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마음을 가상히 여기신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그와 항상 동행하며 존귀케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를 향한 예언 은 당대에 성취되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되어 졌습니다.

다윗은 비록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려는 계획이 좌절되었지만,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은 조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성전 건축은 솔로몬 때에 할 것이지만 그에 대한 준비는 빨리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철저히 준비하였습니다. 성전 부지는 오르난이라는 여부스 사람의 땅이었는데, 이 장소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오르난의 타작 마당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안에 있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자재들을 준비하였으며, 이방인들까지 건축 사역에 참여시키는 등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윗은 값이 비싼 것이나 귀한 것만 준비하지 않고 못을 만들 철에서부터 비싼 백향목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재료를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순수 유대인들만 건축 준비에 동원한 것이 아니라 기술이 있는 이방인도 동원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직접 성전 건축은 못하여도 아들 솔로몬이 아직 어리고 건축할 성전은 극히 광대하기 때문에 자신이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리라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최선을 다해 성전 건축 준비에 필요한 일들을 실천하였습니다. 사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에 크게 성공한 것은 부왕 다윗의 공로에 크게 힘입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의 언약을 받는 복을 누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대상 22:)

링컨(Abraham Lincoln)이란 이름은 모든 대통령(지도자)의 모범으로 여겨집니다.

세계 최대의 기업인 GE(General Electric)의 웰치(Jack Waltch)회장은 가장 성공적인 모델의 최고경영자(전문경영인, CEO : Chief Executive Officer)로 평가됩니다.

유일한장로님이 창업한 우리나라의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은 비록 규모가 작은 회사지만 투명성과 공익성등 모든 면에서 가장 모범적인 기업의 모델로 연구대상이 됩니다.

방탕한 아들 어거스틴을 예수님 이후 가장 위대한 성자로 변화시킨 모니카는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델이 됩니다.

생후 19개월만에 질병으로 인하여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의 삼중고(三重苦)를 신앙으로 극복한 헬렌 켈러(Hellen Keller)는 고난을 이기는 승리자의 표상입니다.

또한 헬렌 켈러를 6살 부터 50년 동안 가르친 설리반(Anne Sulivan Macy)은 사랑과 인내의 교사로서 모범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들이 바라보고 추구해야 할 삶의 최고의 모델이 되십니다(히브리서12:2).

한 수도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제까지의 그 어떤 설교보다도 더 훌륭한 설교를 하겠다고 알리며, 모든 사람들이 모이기를 강요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성전은 노인과 청년들로 가득 찼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예배를 통하여 훌륭한 설교를 들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수도사는 설교를 시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대신에 촛대를 꽂아 둔 곳으로 가 밝게 타고 있는 초가 꽂힌 촛대를 집어 들고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이 조각되어 있는 제단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수도사는 조용하고 밝게 타고 있는 촛불로 못 박히신 예수님의 팔을 비추어서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촛불을 옮겨 역시 못 박히신 예수님의 다른 한 팔을 비췄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촛불은 못 박힌 예수님의 두 발을 밝게 비추어 주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그 수도사가 일어나서 돌아섰습니다. 그때에도 손에 쥐고 있던 촛불은 그의 얼굴을 밝게 비춰 모인 사람들은 그 수도사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그의 뺨을 흘러내리는 눈물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설교입니다." 그리고 그는 축복기도를 하고서 사라졌습니다.(하나님의 사랑-로버트 슐러-디럭스바이블)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합니다. '본'('튀포스)은 '상처를 내다'(튀프포)로부터 나온 단어로서 어떤 것을 만드는데 필요한 '양식' '모델', '본보기'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본이 되셨으니 주님을 본받아 사랑의 본을 보이는 모두가 됩시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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