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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맹목적(盲目的) 삶으로부터의 탈출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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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46-52) 『[46] <눈먼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다> 그들은 여리고에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부르며 말하기를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하였다. [50]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하시니,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 [5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다. "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이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할렐루야!
12월의 첫주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 삶에 더욱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 [맹목적 삶으로부터의 탈출]에서 맹목적이란 말, 어떤 의미로 쓰이는 것일까요? 국어 사전을 한번 찾아봤습니다. 그 뜻으로는,
“어떤 사물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된 (상태).”
이고, 비슷한 말로는, 무조건적(無條件的), 무분별(無分別), 무비판적(無批判的)이라는 말들이 있군요.
한자어를 그대로 풀어 쓴다면 소경·맹, 눈·목 자를 써서 눈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을 지칭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육체의 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맹목>에서의 ‘目’ 자는 눈이라는 의미로도 쓰이지만 목적(目的), 목표(目標) 등의 글자에도 쓰여 어떤 대상을 향한 마음의 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맹목적>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이 볼 수 있는 육체의 눈,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을 다 포함하여 그 대상을 본질적으로 보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 것을 표현하는 말인 것입니다.

■ 우린 눈 뜨고 있는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린시절부터 겪어온 삶의 경험과 인생의 길목에서 부딪혔던 난관, 고통이 어우러져서 시야를 가려서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내 자신을 잘 못 봅니다.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처럼 나의 인격, 나의 마음, 나의 신앙을 비춰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묻은 먼지도, 보기 싫게 붙어 있는 머리카락도 거울을 보며 툭 털어 내듯이 내 영혼 가운데 앙금으로 가라앉아 있는 죄, 허물, 실수 등을 털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니, 털어내기 전에 그런 것들이 남들이 보는 것보다 더 자세히 내 스스로가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많은 성도들 앞에 서야 할 저는 제 스스로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수백명의 성도들이 이 정목사를 보는 시선은 얼마나 객관적이고도 정확히 나를 볼까? 보여지는 나는 얼마나 단점이 많은 사람인가? 주님,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것보다 더 나를 잘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내 스스로가 보는 훈련을 받기 보다는 어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을 받고 자랍니다. 내 느낌, 내 생각으로 보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하도록 잘 학습되었습니다. 나보다 경험 많은 분들, 나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분들, 나보다 더 많이 배운 분들이 보는 것은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옳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판단하는 연습을 더욱 더 해야 했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도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망이나, 환란이 닥쳐오면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도저히 자신의 앞길을 내다 볼 수 없기에 당황합니다. 너무 많은 눈들이 동시에 떠져서 바라보기 때문에 결국은 어느것 하나 제대로 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의 줏대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여 저는 <맹목적인 삶>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눈이 감겨진 인생이요, 목적을 상실한 삶이요, 눈뜬 소경처럼 눈을 붙어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 눈은 떴지만 보지 못했던 제자들

바디매오 이야기가 나오기 바로 앞에 어떤 이야기가 실려 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향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0:33-34) 『[33]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 줄 것이다. [34] 그리고 이방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뒤에 살아날 것이다. "』

대단히 심각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에 아주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것을 암시해 주는 폭탄 선언인 셈이죠. 그럼 이 말에 대한 제자의 답변을 한번 들어볼까요?

(막 10:35)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

예수님이 무엇을 해 주길 원하느냐고 제자에게 되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가 다시 대답합니다.

(막 10:37)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막 10: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 제자는 멀쩡히 눈을 뜨고 자신의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고 있었지만 그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3년동안 매일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아왔지만 그의 눈은 멀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멀면 그의 인격과 영혼은 <영적 거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의 믿음은 늘 빈곤하여 구걸하는 영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 여유가 없습니다.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들의 가진 것에 매어 달리고 뺏기 위해 공격적 본성을 드러냅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넉넉한 용서와 자비, 사랑과 인격의 훈훈한 감정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날카롭고 억센 가시로 자신을 무장하고 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못 본다는 것이 더 무서운 눈 먼 자의 모습입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구하기만 하는데 그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구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삶, 이것이 바로 맹목적 삶이 아니겠습니까?

■ 디매오의 아들, 소경 거지 바디매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리고를 지나던 중에 만난 사람이 바디매오였습니다.
자,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그가 지니고 있는 몸의 부자연스런 콤플렉스를 나타내는 단어가 하나 붙어 다닙니다. 또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신분까지 달아서 표현한다면 조금 긴 이름이 됩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
이것이 우리가 늘 부르는 그의 이름입니다.

저는 여기서 묘한 대비를 보게 됩니다.
멀쩡히 눈 뜬 제자, 그러나 그 눈으로 그는 영화의 자리에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생각으로 꽉 차서 십자가를 지고 사람들에게 능욕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제자...

눈 뜬 그들 앞에 나타난 한 소경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설명하는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

바디매오는 평생 디매오의 아들로 살아왔고, 지금도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아버지에게서 독립되지 못한 존재로 살아가는 바디매오.
자기 스스로 서지 못한 그의 이름 앞엔 ‘디매오의 아들’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 붙습니다. 이 바디매오가 언제 정말 <바디매오>가 될 수 있는 걸까요?
그런 사람은 또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립니다. 바디매오의 삶도 그 자신만으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삶이었습니다.

상황은 허다한 무리가 떼를 지어 예수님의 예루살렘행에 함께 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바디매오는 길 가에 앉았다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 속에서 이 소란함의 이유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시기 때문이라는 정보를 얻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그는 사생결단의 각오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처절한 외침을 저는 희망의 외침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더 이상 소경으로, 거지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던 그 외침으로 더 이상 그는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아, 저렇게 나 자신을 정확히 들여다보며 절실하게 예수님을 불러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의 외침은 곧 주변 사람들의 꾸짖음과 윽박지름에 묻혀 버릴 위기에 처합니다. 바디매오의 삶은 늘 그런 식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늘 그를 주눅들게 했고, 그의 정서적 시력, 인격적 시력, 영혼의 시력마저 멀게 했습니다.
늘 가련하게만 보는 시선들, 그들은 바디매오를 볼 때에 동정심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바디매오란 존재는 여리고라는 동네의 한 소품에 불과할 뿐, 그가 주인공이 되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랬던 그 바디매오가 자신의 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유명인사인 나사렛 출신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에서 말입니다.

(막 10:48)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아마 이렇게 얘기 했겠죠?
“주둥이 닥치지 못해? 여기가 어디라고 나서? 낄 데, 안 낄 데를 알아야지! 쯧쯧~ 거지 주제에 지금이 어디라고 끼어드는거야?”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는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가 아닙니다. 여리고 길목에서 매일 보던 길거리 풍경을 장식했던 하나의 소품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운명지어줄 이 시간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그 걸음을 지금 멈추게 하지 못한다면 그는 다시 <디매오의 아들 거지 소경 바디매오>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인생에 한번쯤은 내 삶을 걸고 도전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그 순간이 <기회>일 것이요, 어떤 이에게는 그 순간이 그저 <기간>일 것입니다.

저는 요즘 <목적이 이끄는 삶, 40일> 캠페인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맹목, 목적에 눈먼 인생으로 무작정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적, 목표를 분명히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보에 쓴 칼럼처럼 제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가운데 하나는 이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통해서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여러분을 둘러 싸고 있는 주변의 환경과 여러 조건들은 윽박지를 것입니다. 잠잠히 있으라고, 잠자코 그냥 살던대로 살라고, 해오던 대로... 익숙해져 있는 삶 그대로 편하게 살다 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내 앞으로 걸어오시는 그 절대절명의 순간 앞에 우리는 잠잠할 수 없습니다. 내 일생에 단 한번일지도 모르는 이 순간... 바디매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 던지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
내가 볼 때에 불쌍해져 있는 나를 내가 불쌍히 보고 나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결단과 신념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아무리 객관적으로 봐도 불쌍히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더 커져갈 자신을 꿈꾸면서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캠페인을 그저 교회에서 하는 또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 바디매오 앞에 멈춰 서신 예수님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외침 앞에 멈춰 서셨습니다. 그를 부르라는 말씀 앞에 바디매오는 겉옷까지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부르심 앞에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져 보세요.
어린아이처럼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당신의 발 앞에 나아온 바디매오에게 들려 온 소리.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이 묻고 계십니다. 이제껏 그에게 질문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의 소원, 그의 의사를 물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주는대로 받아먹었던 사람, 생기는대로 살아야했던 사람, 자신의 운명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만해도 벅찼던 사람이었던 것인데... 이제 분명한 자신의 목적, 목표를 묻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여러분의 목적을 깊은 영적 교감 속에서 아뢴 적이 있으신지요? 이번 <목적이 이끄는 40일>을 통해 그 목적이 여러분의 삶에 깊이 각인(刻印)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소망의 기도로 그는 맹목적 삶에서 목적이 있는 삶으로, 무가치한 삶에서 가치있는 삶으로, 무분별한 삶에서 분별력있는 삶으로 옮아갑니다.

■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삶으로 새 출발

사랑하는 오천가족 여러분,
저와 함께 여러분의 삶의 목적을 보기 위해 기도하십시다. 오리무중(五里霧中), 안개낀 것처럼 희미해진 인생의 목적, 인생의 목표를 다시 한번 두눈 부릅뜨고 노려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제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었습니다.

(막 10:5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다. "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이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그의 길은 이제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 제자의 삶, 하루살이의 삶이 아닌 영원한 존재에로의 여정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소경이 눈 떴다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은 매일 하루살이처럼 자신의 존재가치마저 누리고 살지 못하던 한 사람이 더 큰 가치를 위해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는 그의 목적있는 삶에 저는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으신 분들, 컬러링이 뭔지 아시죠?
“I have a dream...” 으로 시작되는 ABBA 의 노래가 컬러링입니다. 이 노래의 제목처럼 저는 요즘 밤마다 꿈을 꾸면서 상상만 하는데도 흥분이 되어서 잠이 잘 안오는 그런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거렁뱅이의 겉옷을 집어 던져 버리고 내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눈이 떠져 예수를 쫓는 위대한 출발을 하는 그런 꿈 말입니다.

저의 마음을 달궈주시는 이 성령의 기름부으시는 감동이 저 하나만의 감동이 되지 않기를 저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흥분이 장로님들에게도 똑 같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감동이 권사님들에게도 똑 같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느낌이 집사님들에게도 똑 같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가 왜 이 캠페인이 시작되려면 한달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 난리를 치는 겁니까? 지금부터 결단하면서 기도하면서 준비하라는 의미로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기대하면서 마음 속에 영적인 그릇의 용량을 크게 준비하라고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위대한 이 역사는 바로 나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달의 찬양을 그래서 조금 템포가 빠르고, 리듬이 익숙치 않는 찬양이지만 소리엘의 “나로부터 시작되리.”로 정했습니다. 매 주일 이 찬양을 부르시면서 꿈을 갖고 기도하십시오.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영적 운동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리라.
오천교회가 1천명 예배자를 키워내는 교회가 되기 위한 부흥의 역사는 나로부터 시작되리라. 우리 함께 이 찬양을 일어나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정연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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