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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썩지 않는 면류관을 얻도록 (고전 9: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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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당시에는 아테네와 고린도에서 경기가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그리스와 로마의 올림픽 경기가 있었고, 고린도는 이스미안 경기가 있었습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를 여행하면서 아테네에 가 보았습니다. 올림픽 발상지인 스타디움은 지극히 단순한 경기장이었습니다. 그냥 육상경기장 정도. 사람들이 관람하는 자리도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허지만 그 좌석들은 모두 하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완성을 지르고, 선수들은 달렸을 겁니다.
분명한 것은 선수들은 뛰고, 구경꾼들은 구경한다는 겁니다. 구경꾼들은 소리도 지르고, 그러다가 재미없으면 어슬렁거리며 왔다 갔다 하고, 그래도 재미없으면 집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어느 쪽일까?
구경꾼이면 좋겠습니다. 아무 부담 없이, 그냥 그렇게 살다가 재미없으면 쉬고, 그래도 재미없으면 곰이나 뱀이 한겨울 나듯이 그냥 그렇게 잠들었다가 다시 일어나 살고…….
그런데 산다고 하는 것은 결코 구경꾼일 수가 없습니다. 모두 다 인생이라고 하는 경기장에서 끝까지 달려야 하는 선수들입니다. 달리기 싫다고 멈춘다거나 해서 경기가 멈추는 것 아닙니다. 쉬고 싶다고 그래서 쉰다고 해서 경기 자체가 쉬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멈추어도, 나는 쉬고 있어도, 경기는 계속 됩니다.

마태복음 19:16-22에 한 모범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젊은이는 율법을 잘 지키는 행실이 바른 훌륭한 청년입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치와 방탕의 생활도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 모범 청년입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 이 청년에게 예수님은, “네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돌아갔다.”
이 청년은 영생을 얻는 길에, 그 출발점에 서기는 했는데, 그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출발도 못 해보고 실패한 겁니다. 예수님은 그 영생을 얻고자 하는 거룩한 경주에 참가한 이 청년에게 가벼운 여장을 원하셨는데, 이 청년의 가진 재물이 그만 짐이 되고 발목을 잡고 돌려놓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되돌아갔습니다.

그래요. 되돌아 갈 수 있지요.
금메달 바라보며 1년 365일을 달리고 달리는 훈련을 반복했던 마라톤 선수들도 정작 메달이 걸린 경주에서 중도에 그만 둘 때도 있습니다. 그 경기를 포기하고 돌아갈 때도 있습니다. 열심히 뛰어서 꼭 메달을 목에 걸고 오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사람도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올 때 있습니다.
그럼요. 가다 힘들면 멈출 수 있지요. 돌아올 수 있지요.
그러나 산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살다가 힘들어 멈춘다고 시간도 멈추나요? 살다가 힘들어 쉰다고 시간도 쉬나요? 살다가 사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간다고 시간도 되돌아가나요?
부자 청년이 그냥 돌아갔다고 그냥 부자로 영원히 살까요? 그도 죽을 것이고, 끝내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라는 그 자리에 섰을 겁니다. 되돌아갔다고 죽음도 되돌아가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서 돌아섰다고 하나님의 심판이 그에게서 돌아서는 것 아닙니다.
사람은 원하든 안 하든, 인생이라는 경주 장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던 달려야 합니다.
그렇기에 방법은 하나입니다. 달리는 겁니다.
워킹 머신. 기계가 돌아갑니다. 딛고 서 있는 바닥이 계속 돌아갑니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달리는 겁니다. 멈추면 넘어지고 맙니다. 방법이 있다면 오직 달리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달릴 수밖에 없는데, 알다시피 달리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데, 그 산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왜 예수 믿으십니까? 구원이 있으니까. 은혜가 있으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으니까.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아무튼 신나는 겁니다. 아무튼 기쁜 겁니다.
그런데 사는 게 힘들고, 신앙생활 하는 것도 힘든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멍가게든 큰 사업이든 된다는 보장만 있으면 안 하겠어요? 반면에, 아무리 장래가 보장된다 하더라도 된다는 확신이 없으며 하겠어요?
사는 것도, 어떤 사람은 신나고 힘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전혀 신나는 게 없어요. 힘도 없어요. 늘 얼굴에 그늘이 있고, 하는 일도 별로 신통치 못해요.
왜 그럴까요? 사람들은 환경이야기를 합니다. 신나는 사람은 신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고, 신통치 못한 사람은 신통치 못한 환경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여러분 보다 더 환경이 나쁜 사람들이, 여러분보다 더 신나고, 즐겁고, 힘 있게 사는 사람들 많습니다. 환경 때문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되는 집은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하면 되니까, “난 하면 되더라.” 하는 확신이 생기고, 확신이 생기니까 힘이 생기는 겁니다.
안 되는 집은 늘 안 되는 것 같아요. 그것도 마찬가지. 뭐 하든 안 되니까, “난 안 돼” 그렇게 생각하고, 그래서 무슨 일을 시작하면 먼저 “안 되면 어떻게 하나?” 또는 “이건 얼마나 하게 될까?” 그렇게, 안 되는 결과만 바라게 됩니다. 그러다 안 되면, “그러면 그렇지. 내가 하는 일이 될 리가 있나?” 그럽니다.

신앙생활도 그래요.
열심히 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으니까, 확신이 있으니까 열심히 하는 겁니다. 기도 응답을 경험하면, 기도하지 말래도 합니다. 그러나 기도응답을 경험하지 못하면, 단 위에서 아무리 기도하라고 해도 안 합니다. 그리곤 신앙생활을 적당히 합니다. “내 기도는 안 들어 주신다. 그러면 그렇지 내 기도 들러주실 리가 있나?” “난 믿음이 없나 봐” 그리고 그 결과는 점점 더 침체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히브리서 11:36-37,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왜 이들은 이런 고난을 당했습니까? 왜 이들은 이런 고난을 감당해야 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사람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마라톤 경주에 나선 선수들, 그들은 끝까지 뜁니다. 땀을 흘리고, 기진해서 숨을 헐떡이면서, 그래도 뜁니다. 그들이 그렇게 뛰는 것은 상을 얻기 위함입니다. 모든 선수들의 한 가지 목적은 승리하는 것입니다. 뒤로 쳐져 있지만, 일등은 이미 틀린 줄 알지만, 그래도 뛰고 또 뛰는 것은 “언젠가는 상을 얻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래의 상에 대한 기대감을 때로는 막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보장이 없기 때문에, 마치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를 돌아볼 때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닙니다. “그때가 참 좋았지.” 그런 것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온 삶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정말 어려웠어.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셨지.” 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 그 서문이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 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이스라엘이 잊을 수 없는 기억.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 할 때 하나님께서 해방과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 그 기억이 앞으로도 인도해 주신다는 확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막연한 바람이 아닙니다. 이건 확신입니다.

출애굽 할 때, 모세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하시는 거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없었어요. 그러니 조금만 어려우면 불평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겁니다. 심지어 “다시 돌아가자” 그랬어요.

마태복음 28:20, “보아라. 내기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우리의 힘만으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 다 되면, 예수께서 왜 함께 하시겠습니까? 우리 힘으로 다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그러신 것 아닙니까? 그걸 경험했기에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인 겁니다.
보세요. 우리 앞에 상을 마련하셔서 우리가 달려가야 할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을 받으려고 달릴 때, 달릴 수 있는 힘도 주셨어요. 그런데도 “난, 안 돼” 그러시겠어요?
보세요. 며칠이 지나면 말라 버리고 썩어버릴 올리브 잎으로 엮은 화관 즉 월계관을 쓰기 위해서도 죽어라 하고 달리는 데, 하물며 주님께서 에비하신 상, 썩어질 면류관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는 하늘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찌 달리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달리기를 멈추겠습니까?
전, 여러분과 저, 모두가 반드시 이 하늘의 면류관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목표가 있고 이제 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뛰는 게 그리 쉬운가요? 쉬웠으면 다 뛰지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열심히 훈련받아 자신을 절제해야 합니다.(25절)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해야 합니다.(27절)
버림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28절)

한 해를 뛰어 왔습니다.
힘들었지요?
지금 보면 뭐 했나 싶지요?
아무 것도 없지요?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뛰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뛰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써서 1953년에 플리처 상을 받았고, 1955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큰 물고기 마린과 3일 간의 결투를 합니다. 그리고 기어이 잡습니다. 그러나 물고기를 배에 묶고 돌아오는 중 상어들에게 뜯어 먹혀 뼈만 남겨 가지고 돌아옵니다. 하지만 개선은 개선입니다. 산티에고는 몹시 피곤해 보였으나 그것은 허무에서 오는 피로가 아닙니다. 노인에게 그 물고기는 판매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는 보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 산티아고 노인은 또 고기 잡으러 나갑니다.
‘노인과 바다’가 1952년에 탈고 했는데, 꼭 100년 전인 1852년 헬만 멘빌이 쓴 ‘백경(Moby Dick)'이 있습니다.
백경의 주인공 아합 선장은 흰 고래를 잡는 것을 자기의 숙명처럼 믿고 있었습니다. 3일 간의 사투를 벌였으나 결국 고래를 잡으려던 밧줄에 자기가 얽혀 죽게 됩니다. 인간의 노력이란 숙명 앞에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그리고 있는 겁니다. 멘빌의 결론은 패배였습니다.

사람들, 산티아고 같이 보람과 희망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합 선장과 같이 숙명 앞에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숙명 앞에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보람과 희망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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