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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청년이 누구냐? (삼상 17:55-58, 고전 10:23-31, 마 16: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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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달 16일 서울 상암 경기장에서 벌어진 2006년 월드컵 출전을 가름하는 축구경기에서 우리 팀이 10 경기에서 단 1골 밖에 내어주지 않았다는 유럽 최강의 세르비아를 2:0으로 제압한 것은 그야말로 쾌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벼랑 끝에 있던 우리 축구가 기사회생하여 세계 11위로 월드컵 티켓을 따냈습니다. 이것은 물론 새로 감독을 맡은 아드보카트와 전 선수들의 합심협력이 이끌어낸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승리의 대부분의 공(功)을 감독에게 돌립니다. 그리고 개전 4분 만에 첫 골을 얻어낸 최진철 선수, 그리고 후반 8분여에 쇄기 골을 넣은 이동국은 그야말로 영웅처럼 떠올랐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저 엘라 골짜기의 전쟁은 이미 결판이 난 싸움이었습니다. 블레셋이 승리를 따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당시 전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기는 했으나 왕이나 장군이나 병사나 국민이나 할 것 없이 이미 승리는 물 건너 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 기울어진 이 싸움에 구원투수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바로 베들레헴 이새의 막내아들 목동 다윗이었습니다. 그가 평소 단련한 돌 던지기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블레셋의 역전노장이요 거인인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여기 힘을 얻은 이스라엘이 일제히 공격하여 마침내 블레셋을 물리치고 전쟁을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냈습니다. 사태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는 저 축구경기에서와 같이 누구 한 사람 다윗에게 어시스트 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순전히 다윗의 단독 드리 볼로 승리했습니다. 승전의 주역은 단연코 다윗입니다. 나중에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한 노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삼척동자라도 다윗이 승전의 영웅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이 사태를 멀리서 바라보던 사울왕은 정말 놀랐습니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이 “이 소년이 누구 아들이냐...이 청년이 누구냐?”라고 거듭 묻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골리앗의 목을 들고 왕 앞에 왔을 때 다시 물었습니다. “소년이여,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이스라엘을 패전의 위기에서 구한 소년 영웅 다윗이 왕 앞에 서있습니다. 그런데 왕은 먼저 그 신분을 묻습니다. 여기에는 사울의 복합적인 심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물론 전쟁을 이긴데 대한 안도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승리가 왕이요 총 사령관인 자신이 아니라 한 어린 목동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데 대하여 매우 못 마땅한 심기가 발동하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래봐야 너는 베들레헴 촌놈이 아니냐?”는 것, “너는 내 국민이요 내 부하이니 그 승리의 공은 네 것이 아니라 당연히 나 사울의 것이어야 한다”는 등의 심술이 발동했습니다.

왜 이런 심사가 나타납니까?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악령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이미 바른 판단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없습니다. 승리로 이끈 다윗을 인정하려고도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이 승리 때문에 나중에는 다윗을 죽이려고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울이 “이 청년이 누구냐?”라고 묻는 이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누구냐라고 묻기 전에 자신이 먼저 지금 누구인가를 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발견하는 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사울은 자신은 잊고 다윗을 향하여 그의 화살을 겨누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자신과 왕국까지 망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2. 성경에는 우리를 향한 수많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우리 인생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1) 맨 먼저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과 이브를 향한 하나님의 첫 질문이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정위치가 있습니다. 거기서 이탈하면 그것이 곧 타락입니다. 아담이 있어야 할 정위치는 “하나님 앞”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 앞에 서서 사탄과 교제하였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금단의 열매를 따먹어서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한 것은 아담이 정위치인 하나님 앞을 떠난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그 정위치에 서서 맡겨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습니까?

논어에는 “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금은 임금의 자리가 있고 신하는 신하의 자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부모는 부모의 자리가 있고 자녀는 자녀의 자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리에 서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역자는 교역자의 자리가 있습니다. 제직들은 제직들의 자리가 있습니다. 직분과 은사, 그리고 달란트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자리요 역할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하나님은 마침내 큰일도 맡겨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자리에 서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사람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시고 상급을 주십니다.

(2) 성경에 나오는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맏아들 가인에게 물으신 질문입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제사문제로 서로 이견이 있을 때 용납하지 못하고 상대방인 아우를 살해한 형 가인에게 물은 질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도 신앙의 양태는 서로 한결같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런 문제로 그동안 분열에 분열을 거듭해 왔습니다. 최근에 서울 어떤 큰 교회가 결국 예배 처소를 달리하게 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매우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큰 계명을 두 가지로 말씀했습니다. 하나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질문이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한다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질문은 이웃과의 관계가 어떠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아우”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물을 제단에 드리러 가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그 자리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형제와의 관계가 막히면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아벨은 어디 있습니까?

(3) 아브라함의 첩이었던 애굽 여인 하갈에게 물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가 쫓겨나서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인생의 근원과 본질에 관한 질문입니다.

옛날 최희준이라는 가수가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노래를 부른 일이 있습니다. 그는 인생을 “구름이 흘러가듯 떠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인생을 부평초와 같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라고 하는 뜻입니다. 고전10:31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할 인생의 길입니다. 우리 요리문답 맨 처음에 “사람의 제 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갈에게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신 하나님은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우리 찬송가 가사처럼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눅15:에 나오는 탕자 비유에 보면 아버지를 멀리 떠나 허랑방탕하던 둘째 아들이 매우 곤궁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제 정신이 들어서 인생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분주하더라도 우리는 신앙의 정신을 똑똑히 차려 우리 갈 길을 제대로 가야 할 줄 믿습니다.

(4) 신약에 보면 우리 주님의 가장 큰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오랫동안 나라를 잃고 외국의 지배를 받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 오시기를 학수고대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라고 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소망을 잘 대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 예수님의 등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논란꺼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위대한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을 놓고 정반대로 상반되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3년 동안 가르친 제자들의 예수관은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예수관이 어떠냐 하는 것은 앞으로의 예수 운동의 승패를 좌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어떠냐 하는 것이 바로 우리 교회, 나아가서 한국 교회,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내일의 명운을 좌우하게 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이 여러분 각 사람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이 질문에 썩 나서서 대답한 사람은 평소에도 늘 덜렁대기를 잘 하던 베드로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늘 실수 잘하던 베드로였는데 이 중대한 질문 앞에 우리 주님을 만족시키는 대답을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교리와 신조들이 이 베드로의 고백을 토대로 형성되었습니다.
이 올바른 신앙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바른 신앙 가진 사람이 복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런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이런 고백을 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반석위에 세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승리하는 교회에 대한 우리 주님의 보장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런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 이런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모인 교회에 천국 문을 여는 열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른 신앙의 보배로움이 여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외부적으로 신앙에 대한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가 하면 엄청난 유혹과 도전을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은 하나님 앞에 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믿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주님 뜻을 따라 맡겨 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이런 자리에 여러분이 서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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