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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 기쁜 소식을 들려주소서 (사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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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TV에서 굉장히 충격적인 뉴스가 기억난다. 학교의 수업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선생님 어제 기르던 햄스터가 죽었어요.” “그래 많이 슬펐겠다. 죽은 햄스터는 어떻게 했어.” “그냥 변기통에 흘려보냈는데요. 한 마리 더 사면되죠 뭐.” 선생님과의 대화를 하면서 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뭐가 잘못됐나요.’ 하는 표정의 아이 옆에서 선생님은 잠시 말을 잃었다. 폭력적인 게임과 자극적인 영상에 길들여진 요즘 아이들, 호기심으로 애완 동물들을 키우지만 하나의 생명체라는 생각보다 단순히 놀이와 유희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듯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시대가 엄청나게 빨리 변하는데 이제는 어떻게 보면 원칙도 없고, 가치관도 없고, 순서도 없이 변화되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가치관도 시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진다. 중고등학교 복도에 붙은 구호를 보면, 60년대에는 증산, 수출, 건설이었고, 70년대는 “유신으로 번영하자”이었고, 80년 대에는 “나라에 충성, 부모에게 효도”를 가르쳤다. 그러다가 90년 대에는 “삐삐는 진동으로”가 걸려 있다고 한다. 그러면 요즈음에는 무슨 구호가 걸려있는지 모르겠다.
시대에 따라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일찍이 본회퍼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제시되는 어떤 기준도 완전하지 못하다. 도덕의 기준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제시될 수 있다.”

이렇게 엄청나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 그래도 우리에게는 분명한 기준이 얼마나 소중한가? 피아노 조율하는 사람을 보라. 소리굽쇠를 갖고 와서 그 소리를 기준으로 피아노 전체의 음을 조율한다. 이렇게 해야 올바른 음을 낼 수가 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이다. 건강진단을 받아보라. 다양한 치수가 나온다. 그리고 거기에는 정상치의 숫자가 나온다. 높을 수도 있고, 많이 놓을 수도 있다. 기준이 있다. 그 기준에 맞춰져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도 이러한 기준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다.” 아모스서에 보면 다림줄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다림줄은 벽돌을 쌓을 때에 똑바로 쌓을 수 있도록 하는 기구이다. 다림줄은 기준이다. 올바로 쌓을 수 있는 기준이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른 인생의 탑을 쌓아갈 수 있도록 돕는 기준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성경이 우리 인생의 분명한 기준이요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요즈음에 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난자에서 핵을 제거한다. 비누 방울만큼 쉽게 터지는 난자에서 핵을 제거하는 기술이 세계적이라는 것이다. 짧은 순간에 핵을 제거하고, 제거된 핵 안에 다른 체세포에서 뽑아낸 다른 세포를 주입하고 전기 충격을 주면 새로운 세포가 형성이 되어 핵 분열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미 줄기세포연구를 통해서 인간을 복제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과학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 이성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 비과학적인 기적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라든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동정녀 탄생과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이러한 요소들은 제거하고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요즈음에 과학의 연구를 보라. 난자에서 핵을 제거해서 다른 체세포를 집어 넣어 똑같은 사람을 복제할 수 있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 과학자도 이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 실제로 하등동물에게서 난자에 핀셋으로 지르기만 해도 수정이 되어 세포분열이 일어난다고 한다.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려 했지만, 오늘날 과학자들이 오히려 동정녀 탄생의 가능성을 뒷받침 해 주는 결과가 되었다.
나의 부족한 생각이 틀릴까 싶어서 전문가에게 직접 문의해 보았다. 나의 생각이 옳다는 전문가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보라. 성경을 옛날 이야기로 생각하지 말라. 바로 지금 우리의 삶에 충분한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을 통해서 계속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는 그릇된 길로 간다. 잘못된 길로 간다. 바른 길로 가도록 우리를 가르치고 계신다.

죄는 과녁을 빗나가다, 헤매다(길을 잃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사기 20:16 말씀에 "그 군대에는 왼손잡이 정예부대 칠백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머리카락 하나 빗나가지(히타) 않게 맞히는 돌팔매질의 명수였다." 욥기 5:24 말씀에 "자네의 장막에는 다시 평화가 깃들이고 목장을 찾을 때 아무것도 잘못되지(히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라. 죄의 이미지는 활 쏘는 것과 비유된다. 흔히 성서라고 부르는 히브리 단어는 토라이다. 토라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동사 "야라"의 명사형이다. 야라의 기본 의미는 다름 아닌 "활을 쏘다"이다. 토라인 하나님의 말씀은 과녁을 향해 나가는 화살의 질주이다. 성경은 올바른 과녁에 맞추게 하는 것이요, 죄는 그 과녁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가? 성경은 이 시대에 우리의 기준이다. 잘못되어 벗어나는 우리에게 바른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이 말씀의 내용은 무엇인가? 요한복음은 분명히 가르쳐 준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가?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고, 재를 대신하여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리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전하는 기쁜 소식이다.

말씀을 통해서 얻은 생명은 우리에게 고난을 뚫고 나갈 힘을 얻는다. 수박 씨에는 흙을 밀어젖히고 나오는 힘이 있다. 자기보다 20만 배나 더 무거운 것을 뚫고 나오는 것이다. 수박 씨가 어떻게 이런 힘을 내는지 알 수 없다. 도저히 모방 할 수 없는 색을 껍질 바깥으로 우러나오게 하고 그 안쪽에 하얀 껍질, 그 안쪽에 다시 검은 씨가 촘촘히 박힌 붉은 속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 하나 하나의 씨는 또다시 차례 차례 자기 무게의 20만 배를 뚫고 나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역사이다. 작은 수박도 이렇게 엄청난 역사를 일으킨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통하여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겠는가?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이 우리 속에 머물러 있게 해 보라. 거기에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내가 지금 수렁에 빠져있는가? 말씀을 통해서 생명을 얻으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마음이 상해 있는가? 고치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는다. 이 얼마나 소중한 사건인가?

영국을 여행하던 한 사람이 해안지방을 지나는 중에 많은 갈매기들이 모래 사장에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치우고 있는 사람들 곁으로 가서 한 인부에게 갈매기들이 왜죽었는가 물어 보았다. 그 물음에 그 인부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곳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갈매기가 많은 것을 보고 먹이를 던져주게 됩니다. 갈매기들은 과자, 사탕 등 여러 가지를 맛있게 받아먹게 되지요, 실은 그런 것들은 갈매기들에게 해로운 것들입니다. 좋은 자연음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갈매기들이 과자나 사탕을 받아먹게 되다보면 좋은 자연 음식에 대한 식욕을 아주 잃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철이 지나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이처럼 굶어죽는 답니다.”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스턴트 인생을 즐기고 있다. 인생의 겨울이 올 텐데, 전혀 준비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세상의 즐거움과 향락에 도취된 생활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내가 산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다. 어두움의 터널에서 벗어나게 한다. 깊은 수렁에서 빠져 나오게 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말씀은 곧 생명으로 인도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가? 그러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런데 이 말씀은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자에게”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난한 자에게 임한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돈이 없어 가난한 자인가? 그러면 돈이 많은 부자는 성경을 읽을 수 없다는 말인가? 우리 나라에서 부자라고 함은 50억 이상의 돈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면 50억 이상의 돈을 갖은 부자는 성경에서 멀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가난한 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스스로의 한계를 많이 고백한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고백한다. 부자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스스로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닫히고 만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있게 된다.

지금 사업이 잘 되어 부하다고 하여 교만하면 절대 안 된다. 과학기술은 더욱 발전하고 기업경영기법도 더욱 진화되고 있지만 기업의 수명은 날로 짧아져 가고 있다. 산업의 첨단화 되었다. 그렇지만 소비자의 성향이 너무나도 쉽게 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제품의 수명주기와 함께 기업의 수명도 점차 짧아져 가고 있다. 현재 기업의 평균 수명은 5년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미국과 일본의 평균 기업수명이 각각 4.8년과 6.7년으로 집계된 바 있으며, 어느 책의 저자는 이보다 먼저 통계청과 한국은행에서 얻은 자료를 종합하여 법인기업의 평균 수명이 6.3년이라고 보고한 바 있다(1997년 기준). 지금 현재 우리나라 기업의 평균수명은 약 5년 정도로 볼 수 있다.

사업이 잘 된다 해도 기업의 평균 수명은 5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보고서 큰 소리 칠 수 있겠는가? 하나님 앞에 언제나 가난한 자가 되라.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자가 되라. 하나님께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자가 되라. 그럴 때에 우리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생명의 소식을 들을 수가 있다. 깊은 수렁을 뚫고 나올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줄로 믿는다. 수박씨도 20만배의 힘을 얻는다고 한다. 생명이 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생명력을 얻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숫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말씀을 통해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고, 재를 대신하여 기쁨과 찬송의 옷을 입자. (곽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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